나도 '명품족'이다

내 몸의 일부가 된 주머니 속 친구들을 소개하며

등록 2002.02.18 12:04수정 2002.02.18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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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 없이 명품족을 자처했지만, 이 글을 읽고 실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굉장히 멋진 물건이라도 소개하는 줄 알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면 한낱 소지품에 불과한 물건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나와 떨어질 수 없는 친구들이기 때문에 그 값어치와 상관없이 명품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고가의 외국 브랜드를 선호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명품족'이라 부른다. 기억하기도 발음하기도 힘든 비싼 외국 제품에 대한 열광적인 선호는 사회적 문제로 확대되어 종종 언론에서 다루어지기도 한다(요즘은 언론에서 도리어 부추기는 경향도 있다). 내가 소개할 친구들도 모두 '물 건너 온 것들'이라 솔직히 마음에 걸리지만 어디서 왔는지는 지금 내게 중요하지 않다. 단지 내게 소중한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기준만 있을 뿐이다.

뜻하지 않게 문화 상품권이 생기게 되어 서점에 들렀다가 '윤광준의 생활명품 산책'이라는 책이 눈에 띄어 읽게 되었다. 책의 첫머리 글에서 '물건에도 격이 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최고급 물건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어렵게 알아 가는 내밀한 즐거움을 모른다. 격이 있는 물건에 도달하기까지 겪는 수많은 일들, 그것이 내 삶의 내용이고 역사가 된다'라는 저자의 생각은 내가 주머니속 친구들에게 느끼고 있던 감정을 꼬집어 이야기해 주는 것이었다.

세이코 손목시계, 빅토리녹스 주머니칼, 로터링 만년필, 맥라이트 손전등. 어딜 가도 내 몸의 일부가 되어 함께 다니는 친구들이다. 나의 능력(?)을 연장시켜주는 탁월한 성능을 가진 이 제품들은 오랜 지기와 같은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번째 소개해야할 친구인 손목시계는 벌써 내 왼쪽 손목에 자리를 차지한지 6년째이다. 군대를 제대하고 일본으로 배낭여행을 갔을 때 거리의 시계점에서 보고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것을 진주의 한 시계점 진열장 구석에서 보았을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비싼 가격 때문에 살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저시계 멋지지. 그지그지?"하며 물어보는 것이 마음 아팠던지 여자친구(지금의 아내)가 20만 원이란 거금을 들여 선물로 사준 것이다.

당시 아내의 아르바이트비를 날려버린 이 친구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인해 결혼할 때도 예물시계 같은 건 아예 구입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지금은 한 달이면 꼭 5분씩 느려지는 시계로서의 치명적인 결함조차도 항상 느릿느릿한 나를 그대로 닮아 가는 것 같아 더더욱 정이 간다.


다음 소개할 친구는 지난 3년 동안 주머니 속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붉은 색이 잘 어울리는 빅토리녹스 주머니칼이다. 일명 '맥가이버 칼'이라고도 불리는 빅토리녹스 주머니칼은 실생활에서 쓰임새가 많다. 맥가이버 수준처럼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안경테 나사가 풀어졌을 때부터 시작해 우편물을 깔끔하게 개봉할 때도 이 친구를 불러낸다. 그 외에도 이 칼의 유용함은 셀 수가 없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나의 새끼손가락 만한 이 주머니 칼이 만져지지 않으면 얼마나 허전한지......

세 번째 친구인 로터링 만년필은 보통 '아트펜'(내가 가진 것은 아트펜과 펜촉만 같고 모양은 다른 제품이다)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문구점에 가면 만 원 정도 하는 것이다. 그냥 끄적거리는 낙서에서부터 가끔씩 생각을 가다듬고 쓰는 편지까지 모두 소화해 내는 로터링 아트펜은 내가 가진 생각들을 깔끔하게 종이로 옮겨준다.


보통 펜보다 길이가 길어 뒷꼭지를 과감하게 잘라서 윗 주머니에 꽂을 수 있게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아트 펜'이 가진 좋은 점은 싼 가격도 있지만, 펜촉이 매우 가늘어 글씨를 예쁘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멋지게 싸인을 하는 것은 힘들지만 획수가 많은 한글이나 한자를 쓸 때 그 진가가 드러나거니와 볼펜이나 연필과는 다른 필기감을 선사해 준다. 혹시나 만년필을 사용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선택이 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소개할 맥라이트 손전등은 작은 항상 열쇠고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친구이다. 제대할 무렵 산 것이어서 지금은 검은색 페인트가 벗겨져서 보기가 흉하기는 하지만 성능에는 별 이상이 없다. 어두운 곳에서 열쇠구멍을 찾을 때나 컴퓨터나 이것저것 무엇인가 수리를 할 때 부품이 무엇인지, 확인하거나 빠져버린 나사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때도 참 요긴하게 쓰인다. 물론 이 친구의 능력이 가장 크게 빛을 발할 때는 등산이나 여행을 갔을 때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물건들이 모두 외제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꼭 이 친구들을 사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튼튼하고 쓰임새가 많겠구나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구입했다는 것밖엔 다른 변명거리가 없다.

어떤 물건의 값어치가 얼마인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윤광준 씨는 명품에 대한 정의를 '실질적인 사용가치를 웃도는 아우라(aura)를 지닌 물건'이라고 내렸다. 정말 공감이 가는 말이다. 진정한 명품이란 '정을 붙인 물건'이 아닐까. 괜스레 특정제품을 홍보하는 거냐고 핀잔들을 글을 쓴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 정도쯤이야 그동안 열심히 제 역할을 충실히 다하고 정이든 친구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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