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광고 한 편에 가슴이 내려앉았습니다

등록 2002.02.18 18:26수정 2002.02.18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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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신문 보는 방식도 제각각입니다. 1면과 사설만 읽고 덮어버리는 사람, 몇 시간씩 공을 들여 완독하는 사람, 만평 하나로 모든 것을 통찰하는 사람.


저는 먼저 1면을 펴서 제목만 쭉 훑어보고는 곧바로 신문을 뒤집어서 뒷면부터 읽어 나갑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커피 한 잔 옆에 끼고 신문을 뒤집었습니다. 늘 그렇듯 맨 뒷면은 전면광고입니다. 그런데 광고 카피를 눈으로 읽다가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떠나라!"
전 순간 정리해고나 희망퇴직을 권고하는 광고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내서는, 기껏 하는 말이… 열심히 일한 사람보고 떠나라니…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 윗줄을 읽고 나니 허무하다 못해 기가찹니다.

바쁜 생활로 잃어버린 나를 되찾을 권리
아이와 밤하늘의 은하수를 즐길 권리
아내와 함께 성산포 일출을 보러 떠날 권리
열심히 일한 당신은 떠날 권리가 있습니다.



모 카드 회사의 런칭 광고였습니다.
'염장 지른다'는 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임이 분명합니다.

올해 초 효성 해고자와 술을 한잔 했더랬습니다. 지난 해 여름 무쟁의 13년만에 파업을 벌이고 공권력 투입, 용역 깡패 문제 등으로 전국을 들썩이게 했던 바로 그 회사입니다. 이 분은 '괄괄한 성격'말고는 아주 평범한 직장인이었는데, '파업에 끝까지 동참한 죄'로 해고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보니 아들놈 이가 까맣게 썩었어요. 그런데 병원에를 안가는 거예요. 알고 보니 돈이 없어서 그랬다네요..."
그 길로 집을 나와서 옥매트를 한 무더기 떼어다가 직장 동료들에게 팔기 시작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하는 것을 그렇게나 싫어하던 그분이요.

지난 해 12월 31일, 어떤 사람들은 좀더 멋진 일출을 보려고 비행기 타고 해외나들이 갈 때 이 분은 울산 근처 바닷가에 가서 밤새도록 오뎅과 라면, 커피를 팔았습니다. 방송에서 '올해는 날이 흐려서 일출 못본다'고 떠들어댄 덕분에, 스무 시간 가까이 장사를 했는데도 같이 고생한 조카 녀석 용돈 주고 나니까 아무 것도 남지 않더라는군요.

열심히 일하던 그분은 '떠났지만', 아이와 밤하늘 은하수를 즐길 권리도, 아내와 성산포 일출을 볼 권리도 없었던 것이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열심히 일한 당신'에게 '떠날' 권리를 속삭이고 있는 이 카드 회사는 지난 98년 여름 이곳 울산에서 초대형 정리해고를 감행한 그룹의 계열사입니다. 궁금해지네요. 그때 '떠난' 사람들은 지금 '바쁜 생활로 잃어버린 나'를 찾고 있을까요.

땀 흘리는 남자의 사진 밑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광고 문구는 이것입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은 대접받아야 합니다"

아무래도 세상에는 이 말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나 봅니다. '떠나게' 해주거나 혹은 '떠나지 않을 수 있게' 해주거나.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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