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한국에 귀화 러시아인 박노자, 그는 한국인 보다 더 한국말과 한국사에 능통한 비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게 결코 과장이 아님을 실감했다. 유려한 문장 구사, 한국사 전공자다운 역사적 안목, 거기에다 한국인 스스로 지금껏 잘 보지 못했던 한국 사회에 대한 정직한 통찰을 보노라면 누구나 혀를 내두를 정도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책은 외국인이 피상적으로 바라본 한국사회에 대한 경험담들과는 아예 그 격을 달리한다. 박노자는 진정으로 한국인다운 한국인이며, 벌거벗은 임금님을 조롱했던 정직한 아이처럼 한국사회에 약이 될만한 신선한 화두를 던진 젊은 학자다.
본래 병 치료에 진짜 도움이 되는 약은 쓰디쓴 게 특징이다. 이 책을 읽으며, 부끄러움을 느낄 수 없다면 그가 어디 한국인이겠는가. 그만큼 저자의 한국에 대한 해부는 솔직하고 예리하다. 만약 그가 귀화하지 않은 외국인만 되었다 하더라도 "당신은 한국을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한다"며 변명부터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의 지적은 비난이 아니라, 진정으로 한국을 사랑하여 지적한 고언(苦言)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그냥 흘려 들을 수 없다.
한국사회의 전근대적이고 극단적인 '우상숭배, 사대주의, 종교 패거리문화, 폭력이 충만한 사회 등등 저자의 신랄한 지적은 우릴 아찔하게 한다. 특히 나의 관심을 끌었던 대목은, '아직도 폭력이 충만한 사회'라는 주제로 묶인 '군대 문화'에 대한 그의 비판이었다.
저자는 평화주의자로 '민족'과 '신성한 국방'을 들먹이는 군대가 사실상 '폭력단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을 감옥에 가두는 국가적 자해행위를 속히 멈추고 그들이 폭넓은 대체복무를 할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장한다. 그가 이런 주장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고 있는 것은 막연한 낭만적 이상론을 펼치려함에서가 아니다. 그는 한국에 처음 유학 왔을 당시부터 학생들이 군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인터뷰하였다. 그러면서 한국의 군사 문화가 개인과 사회에 얼마만큼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실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사를 전공한 그에게 가장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예로 들라면, 그는 한국사에서 다민족적 국가들이 단일민족의 국가들보다 훨씬 자주적이고 선진적이었다는 이야기를 늘 강조해 왔단다. 이는 '대한민국은 단일민족국가'라는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세뇌된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폐쇄적 국수주의를 벗어 던지도록 만드는 훌륭한 일갈이 아닌가 한다.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와 강한 군사력은 다종족적·다문화적 포용정책에 의해 가능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많은 고민 끝에 한국인으로 귀화할 것을 결정했던 주된 요인 중의 하나도 바로 '폐쇄적 단일 민족관'에 사로잡힌 많은 한국인들에게 하나의 화두를 던지고 싶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의 민족주의가 얼마나 허구적이었는가를 '혈통주의를 부정한 재외동포법'을 실례로 잘 보여주고 있다.
현 '재외동포법'에 따르면, 1948년 정부 수립 이전에 외국으로 이주한 동포들을 '재외동포'의 개념에서 제외하고 있으므로, 중국, 구소련, 무국적 재일 동포들이 법적으로 '동포'의 지위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왜 중국 동포들을 '재중동포'라고 하지 않고, '조선족'이라고 즐겨 부르는지 납득할 수 없었는데, 실정법으로 그들을 이토록 배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저자는 중국 동포의 배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귀화한 외국인마저 이질시하는, '한국적 자기 민족 중심주의'의 유형을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배제와 통제의 방법인 '국가주의적 민족중심주의'라고 규정한다.
아직도 연령·계층간의 불평등, 인종주의적 편견과 폭력, 외국인 차별이 만연한 한국사회는 과연 저자의 바램처럼 변화할 수 있을까?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발견한 한국인들의 깊은 반성과 실천만이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으리라. 저자는 한 방글라데시 이주 노동자의 분노에 찬 발언을 한국인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며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아니, 백인 미국인 앞에서 절절 매고 꼼짝 못하는 사대주의자들이 왜 우리를 맨날 짓밟아야 해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을 가진 민족은, 과연 우리들을 지렁이만도 못하는 존재로 보는 것이요 무엇이요?"
덧붙이는 글 | 정병진 기자는 전남 여수에서 솔샘 교회(http://solsam.wo.to)를 섬기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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