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향 맡으며 떠난 섬진강 기행

모진 겨울 이겨낸 봄꽃들의 처연한 아름다움을 만나다

등록 2002.03.02 21:37수정 2002.03.0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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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하는 왜가리
세상을 넘어버린 선사처럼 강심을 관조하는 왜가리들이 섬진강에 모여 삽니다. ⓒ 전고필



별다른 자극없이 3·1절을 맞이한 아침이다.


해가 갈수록 광복절이나 제헌절·개천절이나 모두 그다지 내게 다른 감회를 주지 못하고 다만 그 날이 붉은 글씨를 지닌 쉬는 날이란 것 이상의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한 지리멸멸한 날들이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대해 집착하던 때에는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합당한 일들을 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제 상당히 많은 부분 게을러지고 상당히 많은 욕심을 잃어 버렸으며, 삶의 진정성에 목말라 하는 것 따위가 나를 기만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난 속물화의 길을 걷고 있고 그런 만큼 나만이 간직한 국가에 대한 충성심(?)도 변색되어 버렸다고 느껴진다.

텔레비전을 켜니 3·1절 행사를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작하고 있고 양희은의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지사적인 가사와 3·1절의 숭고함이 사뭇 비장하게 어울리는 듯 하는데 왜 진작 이런 노래들이 그들속에 함께하지 못하고 다만 운동가요라고 터부하고 배척해 왔는지 이제야 그 멋진 노래를 포용하는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갯버들의 봄
갯버들에도 선홍빛의 봄이 머물고 있습니다. 저 붉은 기운은 봄이 깊어지면 노랗게 변해 갑니다. 그리고 하얗게 씨앗을 감싸안습니다. 그렇게 봄이 가는 것입니다. ⓒ 전고필
그러고 보니 이 노래를 금남로의 한켠에서 부른 이후 그다지 부를 기회가 없었는데 외환위기때 다함께 이 위기에서 벗어나자고 들려 주었던 기억들도 지나간다.

원래 게으른 이는 생각이 짧은 법, 그 정도 생각을 마치고 이런 저런 책들을 뒤적이고 있으니 막내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다.


"가족들이 전부 여수를 가자고 하는데 형 어지간하면 함께 갑시다"라는 간결한 그러면서도 다분히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을 간곡한 어투가 배어 있다.

"그래 집으로 들려라. 매제 차로 가는 것이면 내 차는 가지 않아도 되겠네." 그렇게 온 가족이 함께 한 차에 모였다.

아주 오랜만에 가족들이 함께 모여 여행을 가는 셈이다. 이내 도착한 차에 오르자 어머니는 오늘 여행은 어디가 괜찮겠니 하고 여쭤 오신다.

당연히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섬진강 자락의 다압쪽이다. 비엔날레가 열리는 중외공원에 붉은 매화가 꽃을 피운지 벌써 10여일이 지났으니 섬진강 또한 매화가 꽃을 피웠을 것이란 예감 때문이다.

▲방생
위태했던 겨울을 뚫고 새생명은 가지끝을 오르고있고, 인간은 잡았던 생명을 놓아주는 의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원래 그 강물에 살았던 생명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제 길의 반대편에 있었습니다. ⓒ 전고필
그런 내 생각대로 섬진강으로 가자고 하고 앞좌석에 올랐다.
가족들이 모두 모인 모처럼만의 여행이지만 들썩한 분위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 모두의 가슴에 남아있었다.

50여일전 안개 자욱한 1월 중순 매제가 우발적인 사고로 조카 둘을 남기고 먼저 하늘로 돌아갔고 어제 가족들은 그의 영혼을 위해 도갑사에서 49재를 지냈던 터였다.

침묵의 시간이 다소 길어지니 어머니가 말씀을 꺼내신다. 진이 아빠가 있었으면 떠들썩거릴 것인데 라며, 매제의 쾌활함을 상기하신다.

동생들은 어머니의 그런 말씀을 받아 내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통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하고 내 나름대로 봄기운 완연한 날씨를 보면서 그렇게 얼어던 땅도 다 풀리고 있지 않냐고 말머리를 돌려 보았다.

참 슬프고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의 과실로 발생한 산업재해의 처리 과정이라는 것이 쉽지 않았고 더구나 책이나 뒤적이는 내 입장에서 머리를 차갑게 하고 피만 뜨거워진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완결짓지 못하고 경찰들의 수사와 근로복지공단의 조치와 사측의 합의 과정을 기다리는 가운데 그렇게 미적거리며 50여일을 보내 온 것이라니...

하여튼 그런 가족들의 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는 석곡 나들목을 빠져 나와 보성강 자락을 달렸다. 도통 운전하면서 달렸고 그것이 승용차라서 쉽게 만나지 못했던 강변의 풍경이 유달리 아름답게 보였다. 아직 시베리아로 가지 않은 기러기들의 유영과 텃새화 되버린 왜가리들이 세상에 초탈한 신선 마냥 관조하고 있는 모습들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모래사장 위의 봄
벌써 강변에는 봄이 깊어졌나 봅니다. 옷을 벗어 버린 사람과 모자에 수건으로 햇볕을 가리는 사람의 모습속에는 강물속만큼이나 깊어진 봄이왔나 착각이 일 정도였습니다. ⓒ 전고필
작년 여름 맹위를 떨치던 더위를 피해 가족들이 수영을 했던 압록교 다리를 보면서 어머니의 상심이 깊어질까봐 막내는 재빨리 다른 얘기를 꺼내 화제를 돌린다.

이쪽 다리 건너는 예전에는 비포장이었는데 이제는 포장이 되어 운치있게 섬진강을 즐기는 사람들은 유곡을 지나 구례구쪽으로 간다는 말을 하면서 정태춘의 노래를 얘기한다.

92년 발표된 그이의 노래집 속에 들어있던 '나 살던 고향'이라는 가사의 구절속에 매춘관광코스로 후쿠오카에서 부산으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순천 거쳐 이곳 섬진강 유곡나루에서 은어낚시를 하고 순천의 특급호텔에 가서 한국 여인을 껴안고 잠을 자는데 6만엔이라는 비참했던 관광 현실을 담았던 노래 이야기였다.

그 등살 푸른 섬진강은 오늘도 그렇게 푸르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상심이 깊은 가족들에게 어둠의 굴레만큼이나 그 시대의 처절함이 다가오는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동생의 얘기를 듣고 있고, 아무것도 모르는 조카들은 강심 깊이 흐르는 물을 받아 내고 있는 바위위에 졸고 있는 새들을 보며 그 이름을 물어 온다.

참 맑고 청명한 물살이다. 그 진안의 데미샘에서 물줄기를 시작하여 임실을 거쳐오는 동안 난데없는 섬진강 댐에 갖혀 시름을 앓다가 운좋게 헤쳐 나온 녀석들은 그 아래에서 여기 저기 몸을 섞어 순창과 곡성을 지나 여기에 당도한 것이다.

함께 실고온 세월의 흔적인 모래들은 곡성의 압록에서부터 군데군데 모여 놓고 낮은 곳으로 흘러가며 수많은 조개들과 다슬기와 꺽지와 쏘가리와 참게 따위를 실하게 키워내는 섬진강 자락의 유유자적한 모습들이 이제 긴 겨울을 이겨 내고 본격적으로 흘러 가는 것이 한눈에 보인다.

우리들을 실은 차는 구례구에서 좌회전하여 구례 시가지 쪽으로 향하다 다시 문척 방향으로 운전대를 꺾었다.

▲봄 하늘의 비상
새는 날지 않고 강물에 기대어 있는데 사람들은 자꾸 날고 있습니다. 저 깊은 자연에 묻히고 싶은 열망을 담아서 말입니다. ⓒ 전고필


지리산과 대척점에 있는 오산의 상봉에서는 행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차를 멈춰 그들의 날개짓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날고자 하는 욕망을 그 깎아지를 듯한 산 위에서 풀어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일곱살 된 조카 더러 너도 아가씨 되면 해 볼 수 있으니까 엄마 말 잘듣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얘길 건네면서 또 다음의 행선지로 향했다.

문척을 지나니 간전이 나온다. 다리 건너의 구례와 하동으로 가는 길에는 석주관칠의사 사당과 피아골의 연곡사와 화계장터 그리고 쌍계사가 있지만 우리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곧장 구불한 길을 따라 다압으로 향했다.

강 자락 이곳 저곳 심어진 산수유가 벌써 꽃을 터뜨린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차를 세우고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볼록하게 올라온 암술의 모습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수술의 모습을 보면서 조그마한 꽃 한송이의 조화로움에 젖어 본다.

겨울을 이겨낸 봄꽃은 정말 처연하게 아름답다. 하지만 이런 산수유 같은 나무의 꽃은 그런 아름다움을 도드라지게 드러내지 않는다.

대지가 잿빛 기운을 파르르 떨치고 나올 때 그리고 중국에서 거친 황사 바람이 불어올 때 그때 아무런 경쟁의 대상없이 홀로 꽃을 피워 올린다.


▲샛노란 산수유꽃
겨우내 움추렸던 꽃눈이 한꺼번에 눈을 활짝 피워냈습니다.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묻고 싶어졌습니다. ⓒ 전고필
어찌 보면 산수유의 꽃은 현실적이다. 그가 다른 나무들이 싹도 뿜어 올리기 전에 꽃을 피우기 때문에 벌과 나비의 관심을 받고 삭막한 사람들의 오감을 자극하는 것 일뿐 만약 산수유보다 더 아름답고 화려하며 후각을 자극하는 꽃이 동시기에 피어오른다면 아마 산수유는 그들의 생존을 위해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해야 했을 것이다. 꽃망울속에 다른 꽃보다 더 많은 꿀을 간직하고 있다든지, 그 향기가 독특하다든지, 꽃이 더욱 크다든지 무언가 그들의 생존을 위해 몸 부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무런 경쟁의 상대들이 없을 때 그들은 꽃을 피워 수정을 하고 싹을 올리고 수정된 꽃에서는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다.

산수유가 가장 많이 핀다는 산동에서 매번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나는 산수유꽃이 핀 노란 산동의 풍경을 한번도 제대로 잡아 내지 못했다.

몇 번을 걸음을 했어도 잡혀지지 않는 노란 산수유꽃을 보며 나는 산수유는 신기루 같은 것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분명 눈에 들어오는 그 진한 노란 색들, 그러나 렌즈에 들어앉지 못하는 노란색이 말이다.

산수유를 몇컷 담고 차에 오르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산수유꽃을 보리라는 느낌은 오지 않았던 터이다. 지금쯤 섬진강에는 매화가 조금 이른 것은 꽃을 피워내고 있을 것이고 그리고 다른 해보다 따스한 겨울이었으니 다음주중이면 만개를 할 것이라는 예감말고는 산수유에 대해서는 그 보다 열흘 정도는 늦어 질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3월 1일날 산수유를 만난 것이다.

제 시기를 잃어버린 꽃에 찬사를 보내야 하는 것인지?
남보다 일찍 봄을 만났다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일었다.


▲언덕위의 매화
이렇게 봄이 와있었는데 답답한 일상에도 활짝핀 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 전고필


제 철에 피고 지는 꽃이어야 할 것인데 자꾸만 개화의 시기가 당겨지고 있는 현실에서 내 머리에 감도는 것은 지구의 온난화가 가속되고 있다는 불길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배가 고픈데 삼촌은 한눈만 판다고 하는 조카의 지청구를 들으면서 차에 올랐다. 강변으로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차는 또 나를 위해 멈춰서야 했다.

백사장에 모여 앉아 두런거리며 얘기를 하고 있는 한무리의 사람들을 보면서 봄이 벌써 와있었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푸른 물결속에는 벌써 생명의 기운이 넘실 거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두터운 옷을 벗어 가고 있었으며, 나무들은 물의 기운을 몸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에 너무나 열중하고 있다는 것이 보여졌다.

김오천이라는 한 독지가가 만들어낸 섬진강 청매실 농원에 당도하기 전에 매화의 향기는 차 안으로 가득 밀려와 있었다.

봄 바람에 차 문을 열면 한웅큼 씩 진한 향기가 차 안에 맴돌고 있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언덕을 비껴 돌아가니 만개한 매화가 산 언덕을 가득 메우고 있다. 벌써 섬진강에서는 사람을 비껴 놓고 매화들만의 향연이 벌어진 것이다.

3월 10일로 예정된 매화축제는 인간의 문제이고, 매화는 그들의 방식을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졸졸졸 흐르는 개울물을 세차게 돌려놓고, 겨우내 부시시하던 벌들을 그들의 잔치에 불러 들여 놓고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무슨 말을 꺼낼 수 있을까. 그 진한 매화의 향과 볼수록 심장을 고동 치게 하는 꽃의 모습에 더 할 말은 없는 것이다.


▲터뜨린 매화
사실 터뜨려 버린 매화보다 곧 폭발해 버릴 듯한 꽃망울이 더 사람을 붙잡습니다. 그들에게는 팽팽한 긴장이 있습니다. ⓒ 전고필


매화밭을 다니면서 조카들은 연신 즐거워한다. 배고픔도 잊고서.
어머니 또한 그런 조카들을 데리고 이곳 저곳으로 다니시면서 잠시 그날의 슬픔들을 잊고 계신다.

깊이 바라보면 볼수록 한스러운 기운들이 보이던 청매에 대한 몇해전의 기억을 나는 애써 부인하면서 매화가 구름처럼 펼쳐진 꽃밭에서 중심을 잃고 헤매였다.

섬진강 깊이 봄이 시작되고 있었고 우리 가족은 그 봄에 취해 배고픔도 슬픔도 잊어버리고 한동안 꽃밭에 있었다.

그리고, 조카들의 배 고프다며 울어 제끼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강 자락을 따라 피어난 매화향기를 가득 싣고 하동포구에 차를 멈추었다.

아직 그 짙은 매화향이 가시기 전에 섬진강의 봄소식을 염려스런 마음으로 세상에 전한다.

덧붙이는 글 | 세상의 모든 소식들 가운데
어둠을 뚫고 희망을 전달하는 메시지가 힘을 얻는 것처럼
잿빛의 겨울을 이기고 돌아온 봄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드리는 것은 참 즐거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봄이 빨리 찾아왔다는 소식이 지구온난화라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야만으로 인해
이제는 그다지 유쾌한 일이 못되는 것 같아 마음이
우울해집니다.

덧붙이는 글 세상의 모든 소식들 가운데
어둠을 뚫고 희망을 전달하는 메시지가 힘을 얻는 것처럼
잿빛의 겨울을 이기고 돌아온 봄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드리는 것은 참 즐거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봄이 빨리 찾아왔다는 소식이 지구온난화라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야만으로 인해
이제는 그다지 유쾌한 일이 못되는 것 같아 마음이
우울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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