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향리 사람들의 삶과 꿈

장주식의 소년소설 <그리운 매화 향기>

등록 2002.03.05 14:44수정 2002.03.05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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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구이를 먹던 기억

매향리하면 나는 먼저 몇 해 전의 일을 떠올리곤 한다. 오월 초, 햇살이 자락자락 내려앉는 길을 따라 제암리를 거쳐 매향리에 간 적이 있었다. 사실은 거기가 매향리인 줄도 모른 채, 그저 발길을 따라 간 것이었는데, 우연히 거기가 바로 문제의 매향리였다.


바닷가 포장마차에서 조개구이를 먹다가, 난데없이 울리는, 고막을 터트릴 것 같은 소음에 깜짝 놀라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비행기가 낮게 날아 바다 앞 섬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행기 소리는 쉬지 않고 이어졌고, 그제야 그 길에 함께 했던 친구 둘과 나는 그곳이 매향리인 것을 알아차렸다.

정말 대단한 소음이었다. 아니 그것은 소음이라는 언어로는 이해하기 힘든 거대한 폭음이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우리들의 목소리는 비행기의 파열음을 넘어설 수 없었고, 결국 시켜놓은 조개구이를 다 먹을 동안 우리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대화도 토막토막 끊어졌고, 돌아오는 길에는 모두들 목이 쉬어 있었다.

장주식의 소년소설 <그리운 매화향기>를 읽으면서 나는 내내 그 해 그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독했던 소음과, 쉰 목소리와, 미군 비행기, 미군의 폭격지인 농섬과, 일본과 필리핀 기지에서까지 날아와 폭격을 해댄다는 미군의 문제가 그날 우리들의 주제였고, 내가 읽은 장주식의 소년소설의 주제였기 때문이다.

현실주의 동화, 살아있는 역사 동화

전쟁이 한창인 1951년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서해안 바닷가 한적하고 아름다운 마을, 봄이면 매화 향기가 마을을 가득 채우는 매향리의 아이들 놀이터였던 농섬에 비행기의 폭격이 쏟아진다. 그 폭격을 보면서 왜 아무도 없는 농섬에 비행기들이 폭격을 해댈까 궁금해하는 아이들이 이야기의 첫 장면이다. 그 가운데 진수가 있다. 진수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 삼촌이 함께 사는 단란한 가족이다. 그러나 그 단란함도 잠시, 진수네에게는 온갖 불행이 닥치게 된다. 그 불행은 모두 미군의 농섬 폭격과 관련이 있다.


미군은 아무런 사전 통고도 없이 매향리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김 양식장과 농섬을 폭격기의 사격 연습장으로 만들어 출입 금지시키고 만다. 그 충격으로 진수 할아버지는 세상을 뜬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여름 방학에 진수는 친구 경호와 함께 꼴을 베러 사격장 부근에 갔다가 불발탄이 터지는 바람에 실명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진수네 가족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기를 가진 숙모가 갯벌에 일을 나갔다가 미군기의 오폭에 맞아 죽고 만다. 그 후에도 미군의 횡포는 그치지 않는다. 농토까지 사격장으로 편입되고, 집안 살림은 점점 어려워만 간다.


진수는 서른 둘에 이웃마을 처녀와 결혼을 해서 딸 화영이를 낳는다. 오랜 세월 동안 진수네를 비롯한 매향리 사람들의 미군 비행기 폭격에 의한 피해는 이어져 온다. 진수는 마을 청년회장으로 선출되고, 그 동안 미군 비행기의 폭격에 의해 황폐화된 마을을 예전의 매화 향기 가득한 마을로 되살리기 위한 싸움에 나선다. 사격장 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하기도 하고, 경찰에 잡혀가 고초를 겪기도 한다.

그러나 미군은 주민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파릇한 모가 심어져 있는 사격장 안의 진수와 경호의 논에 돌과 모래를 퍼부어 논을 못쓰게 만든다. 진수와 경호를 비롯한 주민들은 사격장 안으로 뛰어들고, 미군들은 그런 주민들을 마구 짓밟는다. 그 일로 진수는 잡혀 들어가 재판을 받게 되고,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이제 매향리는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는 곳이 되었다.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매향리에 모여 미군 문제를 의논하고 집회를 연다. 그 집회의 중심에 진수의 딸인 화영이가 있다. 화영이는 진수의 기대대로 매향리에 뿌리 내리고 살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고향을 되찾겠다고 다짐하고, 그런 딸을 바라보는 진수의 마음은 환하게 밝아온다.

이처럼 <그리운 매화향기>는 매향리 사람들의 삶과 꿈을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 속의 중심 인물은 진수라는 소년이지만, 그러나 이 이야기는 어느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매향리로 대표되는, 주한 미군 문제와 맞닥뜨리고 있는 우리 나라 전체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최근 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사회적 주목을 받고 있는 용산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동두천이나 평택이기도 하고, 한미 행정 협정에서 한 치도 벗어나고 있지 못한 2002년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소년 소설은 어린이 문학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현실주의적인 성취를 이루어 낸 작품이라고 할 만 하다.

1951년부터 2000년까지 50년이라는 비교적 긴 시간을 담아내고 있는 이 작품의 의도는 매향리 미군 사격장 문제가 어느 한 시기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몇 대에 걸쳐 이루어진 문제이고, 그 해결 또한 길게 큰 호흡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라는 의도를 형식화 한 것으로 보인다.

진수네로 대표되는 매향리의 역사를 소설로 읽는 것 같은 이 이야기는 제2회 어린이문학상 수상작이며, 말 그대로 아이들과 함께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늘 황소같은 눈을 껌벅이며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글쓴이 장주식은 전교조 지회장으로 열심히 교육운동을 해오더니 어느 새 이런 소년소설까지 써 제2회 어린이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묵묵한 뚝심과 선한 눈망울을 기억하며, 세상을 밝힐 또 다른 작품을 기대한다.

그리운 매화향기

장주식 지음, 김병하 그림,
한겨레아이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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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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