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마간산(走馬看山)

등록 2002.03.10 19:34수정 2002.03.10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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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당원+국민 경선이 한창이다.
제주도에서 시작한 이 경선은 오늘 울산까지 총 2곳에서 투표가 진행되었다.

아직 전체 경선 유권자의 3%정도밖에 투표를 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초장 기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선거판에서 각 후보들은 사력을 다하여 자신을 피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당내 경선'이라고는 하지만, 일반인들의 관심은 아마 대선 못지 않을 정도로 집중되어 있을 것이다.

어제(9일) 제주도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한화갑 후보가 1위를 차지하였고, 오늘(10일) 울산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최다득표를 하였다. 그리고 제주도와 울산의 투표수를 합한 1위는 노무현 후보로 근소하기는 하지만 경선 초반의 분위기를 잡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자세하게 듣지 못하였지만, 이번 민주당 당내 경선에 임하는 '예비주자'들의 자세는 무척이나 진지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게는 '청와대로 가는 첫 관문'이 될 것이며 유권자 앞에서 어떤 '검증'을 거치는 과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하여 공개투표를 행한다는 것도 새로운 일이지만 그 후보자들이 당원뿐만 아닌 일반 유권자들에게도 어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비중이 얼마나 크던지 간에 대중적 지지도가 후보선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번 경선은 우리나라 제도 정치권에 한 가지 긍정적인 의미를 남기게 될 것임은 당연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얼마 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前 국무총리인 이수성 씨와 신당을 결성하겠다는 박근혜 씨의 행보도 요즘 무척 바쁘다. 전부터 어느 정도 예고된 일이라고는 하여도 그 일이 '현실'로 드러났을 때의 충격은 '예상'일 때와는 전혀 다른 수준이었고, 그녀를 중심으로 어떠한 세력이 결집하여 향후 정국에 미칠 영향을 계산하느라 각 정치세력은 무척 숨가빴으니까 말이다.

한나라당 내부의 비민주적 행태와 총재의 '독단적 행동'에 불만을 느껴 탈당했다고 하지만 기실 그녀의 궁극적인 목적은 '독자적인 세력화'라고 볼 수 있다. 어떠한 절차를 거쳐 당내 세력화가 불가능하게 된 지금 그녀뿐만 아니라 그 외의 어떤 사람이라도 '탈당이냐, 아니냐'의 선택은 한번쯤은 고민하고 종국에는 불가피한 선택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니까.


이렇게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슬슬 달리기 시작하고 있다. 세력화, '대통령'이라는 꿈을 꾸고 있는 다수의 정치인들이 숨가쁘게 앞으로의 일정을 계획하고 차근차근 그 과정을 밟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저렇게 열심히 달리고 있는 여러 주자들에게 찬물을 끼얹는다면(내 한 마디로 과연 찬물이 끼얹어질지 의문이지만), 열심히 달리고 있는 그대들의 눈앞에는 앞만 보일 뿐 주변의 수많은 산들은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모든 관심이 정치에 쏠리다보니 우리 사회 전체가 달려들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하는 지점들은 갑자기 실종된 것처럼 보인다.

건강보험, 공기업 민영화, 높은 실업률, 전전긍긍하고 있는 이른바 각종 개혁정책들... 한국사회를 뒤흔들 수많은 이슈들이 사장되고 있고, 그 해결과정은 지연되고 있다. 대선이라는 일정 속에서 권력교체는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각 사안들의 거대한 파괴력을 생각해 볼 때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렇게 대선 일정이 점점 본격화되어 가고 있다고 해서, '예비후보'들만 바쁜 것도 아니다. 정치권 전체가 대선을 앞둔 자신의 계획을 밟고 있으며, 그들이 최소한 논의하는 시늉이라도 해야하는 각종 법안들은 잠을 자고 있고, 그렇게 잠자고 있는 서류뭉치들이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쌓여가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들어보신 적이 있는가.

갑자기 모든 이슈가 사라진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선으로 가는 길'뿐인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물론 이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차기 권력을 어떻게 구성하느냐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좌우할 수도 있는 문제이니까.

그러나 '제도정치'의 과정 속에 녹아나야 하는 각종 사회현안들은 어느새 잊혀지고, 최근의 정치가 과연 무엇을 주제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대선'을 향하여 기나긴 카펫을 깔고 있는 지금, 그 카펫 밑에 깔려가는 중차대한 현실들을 과연 우리는 무시해도 되는 것인지.

나는 '대의정치'의 한계를 제도교육 12년 동안 수없이 배워왔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나 '보완책'들에 대해서도 수없이 배워왔다. 그러나 그렇게 책 속에 명백하게 나와있는 답들은 현실에서는 아무런 위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정치의 주제'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 '정치의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인지는 언제나 중요한 문제이며, 이는 단순한 선언이 아닌 실질적인 계획과 그것의 실행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작금의 정치행보는 보다 깊고 넓어져 가는 '망각의 강'을 향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일 따름이다.

수천만 유권자를 상대로 '정치'를 논하기란 쉽지 않으리라. 그리고 우리 시대의 '무관심'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더욱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리라. 그러나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정치의 주제'를 묻는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의 현안이 되어야 하고, 그 이유는 그 현안 하나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좌우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저렇게 열심히 달리고 있는 수많은 말들을 보라.
헐떡거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는 저 말들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즐거워할 수 있을까. 그 말들이 지나치는 수많은 산들이 이 시대 우리들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때다.

그 산 밑에 깔려있는 것은 버릇없는 원숭이 한 마리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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