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희망이 보였어요!"

아들이 받은 교감 선생님의 편지

등록 2002.03.22 12:58수정 2002.03.25 09:44
0
원고료로 응원
밤 11시 30분,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거실에서 고3짜리 아들과 아내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여느 때와는 다른 웃음소리가 간간이 섞여 있는 것이 무언가 좋은 일이 있는 듯 싶었습니다. 안방에서 책을 보고 있는 저에게 아들이 인사를 하러 들어오자 제가 물었습니다.

"학교에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니?"
"예, 저 오늘 감동 먹었어요."

아들이 들려준 자초지종은 이랬습니다. 학교에서 오전 수업을 마치고 시내 모 교회 식당에서 학급 선교부장들이 중심이 된 선교부 수련회가 있었는데 아들은 학교 선교부장 자격으로 참석을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식당에 들어서자 자신들을 환영하고 격려하는 문구와 장식들이 환상적인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명패처럼 각을 세워 만든 하얀 종이 위에 세련된 글씨로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앞에는 담임 선생님의 성함이 적힌 한 통의 편지와 작은 선물이 놓여 있어서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더 놀라게 한 일이 생긴 것은 점심 시간 뒤였습니다. 점심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자리로 돌아와 보니 담임 선생님의 편지와 선물이 놓여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이번에는 교감 선생님께서 친히 써주신 편지와 선물이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아이들의 자리에도 담임 선생님이 아닌 다른 선생님이 써주신 편지와 선물이 놓여 있기는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아들은 흥분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정말 깜짝쇼였어요. 편지 봉투에 적힌 교감 선생님의 성함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저희들이 알지 못하게 감쪽같이 준비한 학교와 교회가 고맙게 느껴졌어요. 다른 아이들도 정말 좋아했어요. 정말 오늘은 학교에 희망이 보였어요."

학교에서는 수련회를 위해 많은 준비를 했던 모양입니다. 아들 말로는 며칠 전 학교 선교부 담당 선생님께서 찾아오셔서 자기가 좋아하는 성경문구와 학교 선교부장으로서 학교에 바라거나 학교를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을 적어내라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이 주신 편지에 그 성경문구가 적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담임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으로부터 편지와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보다도 그것을 준비한 손길과 과정에 더 큰 감동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담임 선생님이 학급 선교부장에게 편지를 쓰고 선물을 준비하는 일도 고마운 일이지만, 담임 반이 아닌 다른 반 선교부장에게 편지를 쓰고 선물을 준비한다는 것이 얼마나 번거롭고 많은 준비가 필요했겠어요. 편지를 줄 짝을 고르느라 교무실이 한 바탕 난리가 났을 거예요. 선생님들이 정말 존경스럽고 감사했어요."


저는 아들의 말을 들으면서 아들아이가 유독 교감 선생님으로부터 편지를 받게 된 것이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설명 대신에 손에 들고 있던 교감 선생님의 편지를 제게 건냅니다. 저는 편지 내용 속에 그 이유가 들어 있겠거니 하고 급한 마음으로 편지를 읽어갔습니다.

사을아!
무척이나 반갑고 또 기쁘다.
내가 너에게 편지를 쓸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너도 교감 선생님에게서 편지를 받으리라고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오늘 이러한 계기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너와 교감 선생님과의 관계도 어느 의미에서 보면 우리 학교에서 배움을 갖고 나간 무수히 많은 학생들 중의 하나였을 테니까...

너에게 편지를 쓰려고 앉아 있으니까 이 시간만큼은 우연히 스치고 지나가는 그러한 의미 없는 시간일 수 없고, 너에게 무엇인가를 남겨주어야 할 존재로서의 의미를 교감 선생님 스스로에게 부여해 보게 되는구나. 그러니까 이 순간만큼은 너와 교감 선생님 사이에서 의미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이 되어지는구나.

교감 선생님이 생각해 보니 너를 알게 된 것이 벌써 세 해가 되는구나. 너의 아버지 저서 '나는 우리 집이 좋다'를 기증 받고 나서 너의 아버지에게 "보내주신 책 감사합니다"하는 전화를 드린 것이 기억나는데, 그때 이후 너는 교감 선생님의 머리 속에 기억되는 몇 안 되는 학생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단다.

교감 선생님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어렵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사람 이름을 기억하는 거란다. 내게는 사람 이름을 기억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거든. 그렇게 나는 머리가 나쁜가봐! 무엇을 암기하려고 하면 무척이나 힘들단다. 그런데도 너는 몇 안 되는 학생, 아니 사람 중의 하나란다.

그 첫째 이유는 아버지가 자기 가정을 소재로 하여 책을 쓴 교사가 많지 않거니와 또 나는 그러한 분들로부터 책을 기증 받아본 적이 더군다나 없었으니까 말이야. 글을 쓰는 분들은 우리가 쉽게 접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갖고 있는 존재로 항상 느껴졌으니 너를 기억할 수밖에…그리고 너의 이름은 내가 기억하기에 너무도 편하고 퍽이나 쉽단다.

안사을!
처음에 교감 선생님은 '한사흘' 정도로 기억하였는데 발음을 하다 보니 자연히 사을이 되더구나. 역시 너의 아버지는 그러한 모든 것조차도 생각하신 사려 깊으신 분이셨더구나. 또한 그 책 속에서 너의 이름에 관한 부분을 읽고 나서 그런 생각이 더 들었단다. 생각하는 새처럼(思乙)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달라는 너의 아버지의 애정이 깃들인 이름 아니겠니?

사을아!
이러한 사을이가 어느덧 3학년이 되어서 매산 학교가 교육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갖춘 민주시민의 양성'이라는 학교 교육의 한 축을 감당하게 될 신앙부장이 되었고, 이 일을 위해서 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귀한 일이냐. 아무쪼록 이 시간이 너의 일생 중에서 가장 값지고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너의 영혼이 살찌고, 너의 신앙이 더욱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너의 인생관과 가치관, 그리고 세계관이 새롭게 정립되어지기를 바란다.

이 시간 이후의 너의 삶이 우리 구주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기를 바란다. 겸손하고 자기를 낮추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자기 희생적인 삶을 결단하는 시간이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너의 삶이 풍성해지고 날로 각박해만 가는 이 세상 속에서 사을이가 있음으로 밝아지고, 사을이가 있음으로 따스해지고, 사을이가 있음으로 평화가 깃들었노라고 말할 수 있는 너의 삶이 되기를 바라며…

2002년 3월 21일 신앙부장 수련회에 참석한 사을에게
교감 최병린 선생님 보냄.

덧붙이는 글 | 글의 성격 상 아들의 담임 선생님이신 백수근 선생님이 주신 따뜻하고 아름다운 내용의 편지를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그리고 교감 선생님께서 주신 편지의 소중한 한 부분을 생략한 것도 밝힙니다. 부족한 아버지에 대한 칭찬을 해주신 대목입니다. 아들에게 편지와 선물을 주신 두 분 선생님과 그런 감동의 드라마를 기획하신 순천매산고 모든 선생님들께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덧붙이는 글 글의 성격 상 아들의 담임 선생님이신 백수근 선생님이 주신 따뜻하고 아름다운 내용의 편지를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그리고 교감 선생님께서 주신 편지의 소중한 한 부분을 생략한 것도 밝힙니다. 부족한 아버지에 대한 칭찬을 해주신 대목입니다. 아들에게 편지와 선물을 주신 두 분 선생님과 그런 감동의 드라마를 기획하신 순천매산고 모든 선생님들께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AD

AD

AD

인기기사

  1. 1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2. 2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3. 3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4. 4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5. 5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