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팽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아르센 뤼팽 전집>

등록 2002.03.27 12:28수정 2002.03.27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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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독자들은 행복한 비명을 질러야 했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개막 앞두고 원작 소설이 세 곳의 출판사에서 동시에 번역·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들은 독자들 사이에 번역 판본과 원전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프랑스어판을 원전으로 삼았던 출판사의 판본이 많은 독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판정승을 거두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이 일단의 행복한 비명이 채 가라앉지도 않은 봄날, 서점가에는 또 한번의 비명이 메아리치고 있다. 이번 비명의 주인공은 바로 유명한 프랑스의 도둑 '아르센 뤼팽'. 무려 네 곳의 출판사에서 완역된 전집과 선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뤼팽의 활약상을 담은 책을 앞다퉈 내놓고 있어 독자들의 눈과 손을 바쁘게 만들고 있다.


홈스와 뤼팽이 뜨는 이유?

뤼팽 전집이 우리 출판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유는 다양하게 분석될 수 있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저작권의 문제다.

작가 사후 50년이 지난 작품에 대해서는 저작권에 대한 문제에서 자유롭게 벗어나 얼마든지 출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단 뤼팽 전집은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다음으로 최근 몇 년 사이 불어닥친 완역에 대한 욕구를 들 수 있다. 독자들은 독자들대로 제대로 번역된 책을 원할만큼 수준이 업그레이드되었고, 출판사들도 그 욕구를 수용할 수 있을만큼의 인적·물적 토대를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원인은 일정한 사이클에 따라 움직이는 명작 혹은 대작의 유행 흐름이 지금 시기와 맞아떨어졌다는 분석이다. 부모 세대가 어린 시절 읽었던 명작들을 자녀 세대에게 다시 읽히고 싶어하는 욕구가 지금 시점에서 고개를 들고있기 때문이라는 것.

또 정치적 불신과 경제적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 현실의 어려움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영웅에 대한 갈망의 욕구가 높아지고 있으며, 현실 자체도 추리소설처럼 얽히고 설킨 매듭을 풀어가야 할 만큼 혼란하고 복잡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뤼팽은 '의적 홍길동'이 아니었다?

뤼팽에 대한 일반의 평가는 바로 의적이라는 것. 부자와 권력자들을 조롱하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사회의 부조리를 마음껏 비웃어준다는데 그 매력이 있었다. 뤼팽은 언제나 용감무쌍했으며, 치밀하고 유쾌하며 정열적인 인물로만 우리 안에 각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원작자인 르블랑이 그려낸 뤼팽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보다 입체적이면서 불운한 사내다. 여섯 살에 첫 절도를 하고 열두 살에 고아가 되었으며, 네 번의 결혼을 했지만 번번이 불행한 결말을 맞아야 했다.

또 언제 어디서 잡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으며, 잦은 변장과 속임수 덕분에 스스로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일으킬 만큼 불우하고 어두운 면을 가진 그런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앞서 추리소설의 붐을 이끌어 나왔던 「셜록 홈스 전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냉철하고 논리적이며 이성적인 인물이라고 알고 있던 셜록 홈스의 모습은 새로운 완역본에서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수시로 몰핀에 탐닉하고 짐짓 잘난척하는 괴팍한 사내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뤼팽과 그의 숙적으로 그려지는 탐정 홈스와의 관계다. 잘 알려진 대로 셜록 홈스라는 영국의 탐정이 먼저 태어난 이후 이와 유사한 영웅적 소설과 인물을 원했던 프랑스의 한 잡지사가 르블랑에게 원고를 의뢰했던 것. 르블랑은 탐정이라는 캐릭터 대신 정반대의 도둑 캐릭터를 만들어 냈는데 그가 바로 아르센 뤼팽이었던 것이다.

두 인물은 각각 영국과 프랑스라는 서로 다른 문화·역사적 배경 속에서 태어난다. 출신 배경이 다른 탓에 그들이 그려보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이나 가치관 역시 다를 수 밖에 없다.

영국의 이성 중심의 가치관과 제국주의적 성향이 홈스의 사냥 모자와 담배 파이프 속에 숨어 깃들어 있었다면, 뤼팽에게는 프랑스 특유의 모험과 도전정신 가득한 정열적 삶이 깃들어 있다는 점이다.

출간 한달만에 10만부 이상 팔려나간 「셜록 홈스 전집」이나, 네 곳의 출판사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펴내고 있는 「아르센 뤼팽」전집 혹은 선집의 열풍은 봄바람을 타고 본격적인 경쟁의 장으로 들어선 상황이다.

또 다시 즐거운 책 읽기를 위한 행복한 고민에 빠진 독자들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어떤 출판사의 책을 선택하게 될 것인지. 연이어 일년 동안 쏟아질 전집 만큼이나 흥미로운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1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arte(아르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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