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야경을 내려다 보다

등록 2002.03.31 19:05수정 2002.04.02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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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야경을 볼 만한 곳이 몇 군데 있다. 남산타워는 아주 전통적인 곳이고 63빌딩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내가 알게 된 곳은 삼청동에서 정릉으로 통하는 스카이웨이 끝에 놓인 팔각정이다.

성북동 고급 주택가를 돌고돌아야 찾아갈 수 있는 그곳에 서면 서울의 서북부가 한 눈에 펼쳐진다. 남쪽으로는 멀리 남산이 보이지만 그 너머 화려한 강남은 보이지 않는다. 가까운 아래 보이는 것은 화려한 빌딩 아니라 서민 주택들이 모여 이뤄내는 정겨운 불빛들이다. 그러므로 그곳은 역설적으로, 부자들이 사는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서민들의 서울인 셈이다.


올해 초 누군가 3년 전에 비해 한국인들의 표정이 상당히 여유롭게 보인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몇 년 살다 돌아갔던 타국인이었다. 경제는 아직 어렵다는데 사람들은 외환위기 전보다 더 평화롭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곳 팔각정에 밤나들이 온 가족들, 10대 동무들을 보면 어쩌면 우리 한국인들도 여가를 중시하는 삶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국가는 국민의 부를 물량적으로 따지는 차원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과정은 앞으로 더욱 진전될 것이다.

그런 서울의 밤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새롭게 느낀 것은 서울의 야경을 수놓고 있는 노란 가로등들이었다. 3월이 끝나가는 지금도 서울의 밤은 춥다. 최근 들어 3한4온이며, 꽃샘추위며, 황사며, 아주 전통적인 기후들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더욱 3월이 추운 것일까? 추운 밤 노란 불빛들 점점 흩뿌린 산 아래 도시를 내려다보면 저 불빛들이 창백한 흰빛 아닌 것이 고맙다. 어떻게 보면 그 노란 전구색 불빛들은 마치 잃어버렸다 되찾은 한국인들 따사로운 인정 같기도 하다.

검은 산줄기와, 골골이 들어박힌 인가 불빛과, 거리의 가로등과 차량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보면서 나는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 긍정할 것을 찾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오랜 부정의 생리에서 벗어나 긍정할 것을 찾고 있는 나. 밤을 수놓는 그 아름다운 노란 가로등 불빛들은 내게 한국적인 경로를 밟는 현대라는 것도 치유불가능한 환자만은 아닐 수 있겠다고 가르친다.

폭력과 불합리와 부패와 오염을 뚫고, 헤치고, 내가 속한 이 세계는 서서히 변모해가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이 서울의 야경은 얼마나 아름답고 따뜻하고 한국적인가. 열대나 아열대의 나라에는 희디흰 가로등이 어울릴 수 있겠지만, 이곳 한국의 서울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밤에는 나는 감상적이 되고 미래적이 된다. 세월이 흘러 내가 늙고 또다른 세대가 이 도시를 가득 메우는 때가 오면, 한국은 더 첨단적이고 동시에 더 한국적인 곳이 될 수도 있겠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부조리가 내일에도 똑같이 군림하고 있지는 않겠지. 그 100년 뒤 어느 또 다른 내가 지금보다 열 배는 더 고요한 서울의 밤을 보내며 '지금, 이곳'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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