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보다 더 재미있는 '경선 생중계'

정치 행사 생중계의 가치

등록 2002.04.01 23:36수정 2002.04.02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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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미에도 가치가 있다

1971년에 제작된 우디앨런의 영화 <바나나 공화국>에서는 주인공 우디앨런과 그의 연인의 결혼식 장면을 전국에 생중계하는 신이 나온다. 한 개인의 결혼식을 공중파로 생중계한다는 발상은 그 당시만 해도 날카로운 풍자 정도로만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꼭 10년 뒤인 1981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와 스펜서 다이애나의 결혼식이 전 세계로 생중계되면서 우디 앨런의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그로부터 또 다른 10년 뒤, 미국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빌미삼아 이라크에 사막의 여우라는 공습작전을 감행했다. 그러한 공습 과정 역시 미국의 24시간 뉴스 채널 CNN에 의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전쟁마저도 안방에서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돈이 된다면 그 무엇이라도 중계해야 하는 것이 현대의 방송사가 처한 상황이다.

텔레비전하면 으레, 쇼, 드라마, 뉴스 정도만을 떠올린다. 또한 방송이 비대화되면서 방송국의 생존을 위해 그들은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인다. 방송국 PD들에게 아무리 시청률 지상주의를 내던지라고 비판을 해도 그들은 그 비판을 한쪽 귀로 조용히 흘려버린다. 생존의 위기 앞에서는 그 어떤 도덕적 가치도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더 자극적인 오락프로그램의 생산을 위해 일본의 각종 민영방송물을 뒤지며 표절에 표절을 거듭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엿한 대기업인 방송국에게 시청률을 포기하라는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이론적으로는 너무나 간단하다. 공익적인 목적을 지니되 대중성도 함께 확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가치있는 재미를 찾으면 된다는 것이다.

2. 오마이뉴스, 대통령 후보 경선을 생중계하다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는 지난 총선을 앞두고 열린 인터뷰 시리즈로 장안에 화제를 몰고 왔다. 기껏해야 A4 두 매짜리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일간지의 인터뷰를 뛰어넘어 직설적인 질문과 답이 오가는 생생한 인터뷰글을 웹상에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해도 아직까지 초고속 광케이블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네티즌들은 그 정도의 텍스트 보도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뒤 오마이뉴스는 또 하나의 새로운 실험에 성공했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과정을 5시간 이상 인터넷으로 생중계 한 것이다.

97년의 신한국당과 국민회의의 경선과정을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누가 누구의 지시에 따라 뽑는지도 모르고, 이미 뻔해 보이는 이회창과 김대중이 당선되는 결과만을 통보받던 국민들은 과정 하나하나를 즉석에서 지켜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라면 국민선거인단 경선제를 시행한 민주당의 공도 클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마이뉴스가 발달된 인터넷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그 딱딱해 보이는 정치인들의 행사로 흥행성공까지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오마이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16일 광주경선에서 동시 접속자 수 4500명, 24일 강원 경선에서 동시 접속자 수 5500명을 기록하며, 생중계가 진행되는 동안 무려 320만 페이지 뷰를 올릴 정도로 접속자 수가 폭주했다고 한다. 오마이뉴스가 생중계하기 전부터 민주당의 홈페이지에서도 경선과정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민주당의 홈페이지 역시 네티즌들로 가득찼던 것은 물론이다.

한 번의 경선이 끝날 때마다 민주당의 후보인 노무현 고문과 이인제 고문의 순위가 뒤바뀔 정도로 박진감 넘치는 경선 레이스도 중계의 흥행 성공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황색 찌라시라는 오명을 갖고 있는 스포츠지 중 경향신문이 발행하는 굿데이에서조차 <노무현이냐 이인제냐 '용쟁호투'>라는 기사를 1면 톱으로 올리는 파격적인 편집을 선보였을 정도였다. 굿데이의 이상우 회장은 이렇게 보도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는 경기를 주로 취급하는 신문이지만, 선거도 스코어 아닌가? 선거도 투수 방어율 등 경기 기록의 관점에서 보면 재미있다. 승패가 있는 것은 스포츠라는 관점에서, 정치도 어느 정도 스포츠다.(오마이뉴스 인터뷰 중)"

3. 정치는 과연 스포츠인가?

아무런 해설이 없는 민주당 홈페이지의 경선중계와는 달리 오마이뉴스의 경선 중계에는 시사평론가 유창선 씨와 이병한, 구영식 기자의 해설이 첨가되었다. 스포츠 중계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마치 이들을 해설자와 아나운서 정도로 인식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의 복장은 물론 해설 또한 그러했다.

"예, 노무현 후보 앞섰습니다. 다음 경선에 대한 평을 해주십시오."

"다음 경선에는 아무래도 이인제 고문의 홈그라운드이니 이인제 고문의 우세가 예상됩니다."

마치 야구경기에서의 홈 앤드 어웨이와 별반 다를 게 있겠는가? 각 후보들의 지지자들은 마치 한일간의 축구경기를 볼 때와 비슷할 정도로 가슴을 졸이며 중계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한국 정치의 엔터테인먼트화는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찌보면 이는 한국 정치의 치명적인 결함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제대로 된 나라 같았으면 이미 금배지는 고사하고 철창에 갇혀도 시원치 않을 고문 기술자 정형근 의원이 지역감정의 게임화를 이용하여 당당히 국회의사당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 국민들에게는 옳고 그름의 가치가 아니라 경상도의 정형근이 이기냐, 전라도의 김대중이 이기냐는 한판 게임의 법칙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 오마이뉴스의 정치 스포츠화와 기존의 구태 정치의 게임화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4. 결국 승패의 결과 이후의 문제이다

야구나 축구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경기가 있는 날 일을 손에 잡을 수가 없다. 어느 팀이 이기느냐에 따라 그날의 운세가 뒤바뀔 정도이다. 자신의 팀이 이기면 모든 것을 손에 넣은 듯하다가도, 그 다음날 팀이 패하게 되면 살 맛이 뚝 떨어진다. 그러면 그 다음날은? 일상에 아무런 변화도 없다.

월드컵 16강에 못 들면 나라라도 무너지듯 말하고 있지만 까짓 한국이 월드컵에서 전패를 한다 해도 무슨 큰 일이라도 벌어지겠는가? 에라 4년 뒤에 또 한 번 하면 그만이지. 다들 16강에 목숨을 걸고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도대체 왜 한국 축구 대표팀이 16강에 올라가야 하는지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나마 경제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16강에 올라가야지만 월드컵 특수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 정도이다.

반면 이번 민주당 경선의 중계에는 승과 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어떻게 이기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한국 정치 구조는 그 궤를 달리하게 된다. 극한 지역감정이 기승을 부릴 수도 있고 그토록 염원하던 국민 통합이 눈앞에 다가올 수도 있다. 이겼다고 술 한잔 하고 끝내고, 졌다고 5년 뒤를 외치고 끝낼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외견상 비슷해 보이는 유창선 씨의 해설과 신문선 씨의 해설에는 질적으로 엄연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경선 생중계가 가치를 지닌 이유도 그 때문이다. 국민의 관심이 없이는 절대로 바뀔 수 없을 것만 같던 국민 통합 및 지역 통합이 서서히 다가오지 않는가? 이는 경선 중계가 끝나도, 혹은 경선과 대선이 끝나도 사라지는 거품이 아니다. 앞으로 더욱 더 발전할 정치 관련 생중계의 초점도 바로 이에 맞춰야 한다.

"쳤습니다. 홈런, 이겼습니다. 국민 여러분 기뻐해주십시오."

이것이 아니다.

"지역감정이 떠나갔습니다. 경제가 바로 서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기뻐해주십시오."

바로 이런 정확한 가치판단이 포함된 중계방송이 이루어져야 한다. 앞으로 지속될 경선이든 대선이든 말이다.

지난 번 정형근 의원 강제소환 때도 생중계까지는 아니지만 각 방송사에서는 이 장면을 동영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과연 그 장면을 보고 도대체 왜 정형근 의원을 소환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 본 시청자들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정형근 의원 잡혔습니까? 아아, 아쉽습니다. 놓쳤습니다."

왜 잡아야 하는지 어떠한 정치세력의 준동에 의해 놓쳤는지 해설할 자신이 없다면 아예 하지를 말아야 한다. 이건 CNN의 전쟁 생중계와 다를 바 없다. 아예 차라리 "정형근 의원, 슬라이딩 태클, 세이프. 살았습니다. 국민 여러분 기뻐해주십시오. 정형근 의원이 전라도 정권의 탄압에 살아 남았습니다." 이런 해설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정치 방송에 적합한 일이다.

미디어는 기술적 발전을 통해 그 어떤 분야라도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정치의 대중화도 미디어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에 관한 미디어라면 결국 정치 본래의 의미, 옳고 그름을 명확히 가르고 올바른 길을 제시해야 하는 의미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

맥주와 팝콘을 쌓아놓고 대선 생중계를 시청하자. 단 한 가지만 명심한다면 된다. 정치 생중계는 스포츠 생중계와 달리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그 맥주값이 오르락 내리락한다는 것을. 과연 무엇이 더 스릴 넘치고 재미있겠는가?

정치 관련 중계에 나서는 방송사들은 이를 명심해야 한다. 앞으로는 생존권이 왔다 갔다 하는 스릴 넘치는 게임이 시청률에서도 승리한다는 것을. 우디앨런이 30년 전에 경고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 옳고 그름의 가치에서 비롯되는 스릴이 없다면 전쟁 생중계가 방송계의 엔터테테인먼트 시장을 장악할 수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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