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30년 친구' 동아일보를 끊은 이유

과거 '1등 신문'이 어쩌다 지금은 '3등신문' 됐나

등록 2002.04.10 10:00수정 2002.04.11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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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상> 22호 표지
시사평론가 유시민 씨가 30년 동안 애독해온 동아일보를 최근 끊고 그 '절독기'를 단행본 <인물과 사상> 22호에 실었다. <오마이뉴스>는 출판사측과 필자의 양해를 얻어 그 내용을 싣는다. 다만 여기서 소개하는 내용은 일부 예문 등은 줄인 것으로 전문은 기사 말미에 별첨한다.<편집자 주>

내게 많은 것을 준 <동아일보>

집에서 구독하던 <동아일보>를 끊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30년 동안 매일 읽던 신문을 끊은 것이다. <동아일보> 지국에 전화를 걸어 지국과는 관계없는 일이니 즉시 끊어달라고 요구했지만, 한 달이나 시간을 끌다가 3월 중순에야 마무리가 되었다. 내 집 현관에는 새벽마다 다른 신문이 셋이나 들어오기 때문에 <동아일보>를 끊었다고 해서 불편할 건 전혀 없다. 그런데도 처음 며칠 동안은 왠지 기분이 무척 쓸쓸하고 허전했다.

신문 하나 끊은 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 책망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동아일보>는 ‘신문 그 이상의 신문’이었다. 한때 <동아일보>에 시사칼럼을 연재했다는 인연 때문만은 아니다. <동아일보>를 보면서 나는, 정의가 언제나 이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1974년 말 고등학교 입학을 눈앞에 둔 겨울방학 때였다.

부모님이 집에서 구독하시던 <동아일보>가 어느 날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린 모습으로 들어왔다. 광고란이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였다. 처음에는 그게 뭔지를 몰랐다. 다만 성금을 모아 보낸 독자들의 격려광고가 재미있었을 뿐이다. 몇몇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씹히지 말자. 이빨 부러질 때까지.” “동아일보여, 너마저 굴복하면 이민갈 거야.” “이기 니끼가!” 이런 것들이다.

나중에 자세히 알게 되었지만 ‘동아 광고 사태’는 <동아일보>와 지금은 없어진 동아방송 기자들이 1974년 10월 24일 감행한 ‘자유언론실천선언’에서 비롯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동아일보>의 보도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일깨우는 사태를 막기 위해 기업인들을 협박해 <동아일보>, <동아방송>, <신동아>, <여성동아> 등 계열사 매체에 광고를 내지 못하게 했다.


▲1975년 2월 광고탄압 당시 동아일보에 실렸던 독자들의 격려광고들. ⓒ <너마저 배신하면 이민갈 거야!>
같은 해 12월 20일 광고 해약이 시작된 이후 한 달만에 <동아일보> 지면에서는 기업광고가 완전히 사라졌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 최후까지 광고를 냈던 기업은 안국약품이었다.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감기약 투수코친! 1면 하단에 가로로 길게 광고가 나왔다. 그래서 독자 격려광고에 이런 것이 나왔다. “동아일보 만세! 투수코친도 만세!”

견디다 못한 경영진이 유신정권의 압력에 굴복해 언론자유 수호투쟁에 나섰던 기자들을 대량 해고함으로써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는 막을 내렸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모든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된 줄 알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다시 광고가 나왔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진학과 동시에 시작된 입시경쟁에 휩쓸려 신문을 꼼꼼히 살필 여유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언론자유 하면 <동아일보>, 신문 하면 <동아일보>라는 인식이다. 그렇다. <동아일보>는 ‘1등신문’이었다. 그런 <동아일보>를 끊는다는 것은 오래 사귄 벗과 의절하는 것만큼이나 가슴 아픈 일이다.


게다가 <동아일보>는 나와 개인적으로 인연이 깊은 신문이다. 내가 오늘날 시사평론가를 참칭하면서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이 바로 <동아일보>다. 1984년 가을 집시법도 국보법 위반자도 아닌 폭력범이 되어 감옥에 갔을 때, 누구도 귀를 열지 않는 상황에서 <동아일보>만은 내 말을 들어주고 지면에 옮겨주었다. 1년 6개월 징역형을 내린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했는데 교도관이 ‘항소이유서’라는 걸 써야 한다고 말했다. 할 말도 있고, 집필실에서 글 쓰는 동안에는 0.7평 독방에 갇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사흘 동안 짬짬이 항소이유서를 썼다.

그런데 당시 무료변론을 해주셨던 이돈명 변호사가 혼자 읽기 아깝다면서 큰누이한테 복사본을 주셨다. 누이는 그걸 들고 을지로 뒷골목 인쇄소에 가서 청타 마스터를 뜬 다음 법원 기자실과 언론사에 돌렸다. 그런 종류의 문건이 흔히 굴러다니던 시절이라 법원 출입기자들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모양인데, 지금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있는 황호택 기자가 우연히 그걸 보고는, 본인의 표현으로는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기사를 썼다.

편집국에서 며칠을 묵었던 그 기사는 <동아일보> 박스기사인 ‘창(窓)’에 실렸다. 그리고 독자들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게 들어오자 지방판에는 분량을 두 배로 키워 내보냈다. 그 덕분인지 항소심 재판부는 형량을 6개월 줄여주었고, 출소한 뒤 나는 민청련을 비롯한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성명서를 작성하는 일을 많이 맡게 되었다. 결국 그 시절 재야단체의 ‘문건 하청업’에 종사하면서 글쟁이로서 살아갈 능력을 길렀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문화공보부에서 날마다 ‘보도지침’을 내려보내 신문편집을 일일이 통제하던 전두환 정권 시절, 감시와 검열의 눈을 피해 그 작은 기사를 내보냈던 <동아일보> 기자들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나는 잘 안다. ‘관제언론’이라는 비난을 들어가면서도 시위 관련 구속학생 이름이라도 하나 더 보도하려고 애쓴 기자들, ‘행간을 읽는’ 수준 높은 독자들을 위해 보도지침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한 줄이라도 더 비판적인 기사를 실으려 했던 일선 기자들의 노력이 우리 민주화운동에 보이지 않는 기여를 했다는 것을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특히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1987년 박종철 씨 고문치사 사건 당시 <동아일보>는 진실을 파헤치고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데 다른 어떤 언론매체보다 큰 역할을 했다. 적어도 6월민주항쟁의 승리에 관한 한 <동아일보> 기자들은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본다. 판매부수의 많고 적음과 무관하게, <동아일보>는 그때까지만 해도 변함없는 ‘1등신문’이었고 나에게는 특별히 고마운 신문이었다.

‘IMF 귀국유학생’이 되어 5년간의 독일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대책 없이 서울로 돌아온 나에게 <동아일보>는 귀중한 지면을 내주었다. 처음에는 월간 <신동아>와 <주간동아>에 경제평론과 시사칼럼을 연재했고, 연이어 <동아일보>에 매주 기명칼럼을 연재했다. 학위도 없고, 직위도 없고, 이렇다 할 명성도 없는 프리랜서 평론가에게는 실로 파격적인 배려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MBC 100분토론'에 패널로 출연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진행자로 일하게 된 것도 <동아일보> 칼럼을 통해 알려진 덕분이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내가 집에서 구독하던 <동아일보>를 끊었다. 그깟 구독료 몇 푼이나 한다고 말이다. 게다가 그 사실을 이렇게 공개함으로써 <동아일보>를 욕하고 나섰다. 정말 야박한 놈이라는 비난을 들어 마땅하다. 하지만 나도 하루 이틀 고민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내가 어려울 때 보살펴주었던 오래 사귄 벗이 자꾸만 나쁜 길로 빠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 벗은 나를 자기의 벗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또 내가 이런다고 해서 <동아일보>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로서는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그토록 오랫동안 일체감을 느꼈던 신문이 자신을 망치는 길로 달려가고 있는데도 구경만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공개적으로 <동아일보>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남아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3등신문으로 전락한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1등신문’을 자처한다.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은 ‘1류신문’을 지향한다. 나는 지난 70년대와 80년대에는 <동아일보>가 ‘1등신문’이요 ‘1류신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소위 ‘조중동 빅3’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3등신문이 되었다. 일각에서는 ‘조중쩜동’이라는 표현도 들린다. 조선 중앙이 양강을 형성하고 동아는 뒤로 한참 처졌다는 것이다.

▲ 지난해 8월 17일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서울지법에 출두하고 있는 김병관 동아일보 전 명예회장. ⓒ 오마이뉴스 이종호
나는 <동아일보>가 망할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지난해 적자를 좀 내기는 했지만 경기가 호전되어 광고시장이 살아나면 돈벌이는 그럭저럭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동아일보>의 ‘건강’이다. <동아일보>는 지금 병들어 있다. 남들이 생활방식과 식습관을 바꾸라고 아무리 충고를 해도 듣지 않는다.

<동아일보>의 병증은 두 가지다. 첫째는 과거의 잘못을 털어내지 못하는 탓으로 먹지 않아도 될 욕을 먹는다는 점이다. 둘째는 그로 인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방향을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아일보>의 두 가지 증세는 전 명예회장 김병관 씨의 탈세사건 재판 최후진술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이 최후진술은 <동아일보> 사주인 김병관(金炳琯) 씨의 철학과 언론관, 역사의식을 비교적 분명하게 노출시키고 있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동아일보>에 실린 그대로 인용한다. 그는 지난 1월 14일 결심공판에서 탈세에 대한 법률적 책임소재를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혔다.

"이 정권의 언론사 세무조사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언론을 길들여 무력화하고 장악해 도구화하려는 불순한 동기에서 기획되고 추진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 씨가 세무조사를 언론탄압으로 규정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동아일보>는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현 정권의 대북정책 수행이 드러낸 지나친 양보나 무리한 발상 등 많은 문제점을 적시에 비판해 왔습니다. 권력은 이 비판이 남북관계를 이용해 국내 정치적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려는 자신들의 정략적 구도에 차질을 가져오게 되리라고 우려한 것입니다. 게다가 내치(內治)의 거듭된 실정(失政)과 권력부패에 대해서도 엄정히 비판하자 정권재창출에 끼칠 영향을 우려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정권은 장기간에 걸쳐 전례 없는 대규모의 조사인력을 투입해 무차별적인 방법으로 세무조사를 실시하여 감당할 수 없는 추징금을 부과했습니다. 더욱이 언론계 관행의 영역을 자의적으로 축소하고, 그렇게 하면 드러날 수밖에 없는 흠결까지도 과장하고 악의적으로 발표해 해당 언론사와 대주주를 부도덕하게 몰았습니다.

결국 이번 세무조사는 조세정의 구현이라는 미명으로 자행되고 적법한 권력행사로 포장된 언론탄압입니다. 권력의 힘은 물리적 수단이지만 언론의 힘은 말(言)의 힘이며 이것은 곧 독자의 공감(共感)입니다. 지난해 권력은 바로 독자들의 공감을 이른바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동아일보>는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the good’이고 김대중 정부는 ‘the bad’ 또는 ‘the ugly’다. 그런데 문제가 그리 단순한 건 아니다. 김병관 씨는 언론사 세무조사라는 사건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동아일보> 사주의 해석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고 특별한 무게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김씨는 대주주로서 세무조사와 관련해 특수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동아일보>의 역사와 관련하여 움직일 수 없는 사실마저 부정하려는 사람이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200여명의 기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자유언론실천선언대회'. ⓒ <너마저 배신하면 이민갈 거야!>
동아의 영광과 오욕, 누구의 몫인가

<동아일보> 임직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동아일보>는 부끄러운 과거를 털어내지 못함으로써 스스로를 망치고 있다. 세무조사 문제 그 자체는 잠시 후에 따져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김병관 씨의 이어지는 최후진술을 조금 더 들어보자.

"<동아일보>는 82년의 역사에서 보여주었듯이 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맞서면서 불편부당 시시비비의 자세를 일관되게 지켜왔습니다. 앞으로도 권력의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정확하고 공정한 보도와 논평을 통해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다하리라고 믿습니다."

<동아일보>가 그랬던 때가 있다. 일제하에서도 그랬고 군사독재 시절에도 그랬다. 1936년 8월의 저 유명한 ‘일장기 말소사건’ 때는 일제 총독부가 <동아일보>에 무기정간 처분을 내려 아홉 달씩이나 신문을 내지 못하게 했다. 앞서 말한 유신시대의 백지광고 사태 역시 김씨가 말한 바 ‘부당한 권력 행사’에 맞선 결과 생긴 일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82년 역사를 볼 때 <동아일보>가 “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맞서면서 불편부당 시시비비의 자세를 일관되게 지켜왔다”는 김 씨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부당한 권력 행사’에 맞선 것은 기자들이다. 사주와 경영진은 신문사의 생존을 위해 ‘부당한 권력’에 굴복해 그들을 박해했다. 이게 진실이다.

‘동아일보 82년’은 영광과 오욕이 교차한 역사다. 무기정간을 불러온 일장기 말소사건과 백지광고 사태를 일으킨 언론자유수호선언은 ‘동아일보 82년 역사’의 짧았던 영광이었을 뿐이며 <동아일보>는 그 주역들을 해고했다. 일제 말기 <동아일보>의 친일행위, 그리고 검열과 보도지침에 굴종했던 70~80년대의 행적은 긴 오욕으로 남았다. 진실을 말하자면 ‘짧은 영광’은 기자들의 몫이요, ‘긴 오욕’은 사주와 경영진의 몫이다. 신문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손 치더라도 부당한 권력 행사에 맞섰던 기자들한테 못할 짓을 한 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일제와 군사독재 시대 <동아일보>가 한 친일보도와 관제보도를 ‘강요된 곡필’로 본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용서받지 못할 죄악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사실을 인정하고 진솔하게 사과하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면 된다. 그런데도 <동아일보>는 그걸 하지 않는다. 친일행위에 대해서도 그렇고 백지광고 사태 당시 해고한 100여 명의 기자들에 대해서도 오로지 외면과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동아일보>가 “앞으로도 권력의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정확하고 공정한 보도와 논평을 통해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다하리라고 믿는다”는 김병관 씨의 말에서 한 오라기의 진실이나 감동도 느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렇게 하는 한 <동아일보>의 미래는 밝을 수 없다. <동아일보>는 지금이라도 동아투위 관계자들에게 지난날의 잘못을 사과하고 그들이 당했던 고통을 많든 적든 보상해주어야 한다.

누구도 <동아일보> 사주와 경영진을 그 때문에 욕하지는 않는다. 늦기는 했지만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박수를 칠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권력의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정확하고 공정한 보도와 논평을 통해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다할 것”이라는 김병관 씨의 말이 믿음을 얻을 수 있다.

자기성찰이 없는 <동아일보>

친일문제나 동아투위, 세무조사에 대한 <동아일보>의 대처방식과 견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구독을 중단한 건 물론 아니다. 그런 건 예전부터 있던 문제이고, 세무조사에 부당한 면이 있어서 정부와 싸우는 것도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최근의 정치사회적 현안을 대하는 <동아일보>의 보도 태도다.

결론부터 말하면 <동아일보>는 꼭 읽지 않아도 되는 신문이다. 나는 <조선일보>를 읽지 않은 지가 2년 정도 되었는데 별로 불편한 줄 모르고 산다. 무슨 말을 할지 너무나 뻔한데, 괜히 읽어봐야 아침부터 속만 불편해질 뿐이다. 예전에 <동아일보>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동아일보>를 읽으면 몇 년 전 <조선일보> 읽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든다. 날마다 똑같은 너무나 뻔한 이야기인 데다, 읽고 있으면 속이 불편하고 머리에서 김이 날 지경이다. 한마디로 스트레스 받는다. 김병관 씨는 법정 최후진술을 마무리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의 정도언론(正道言論)은 작년의 혹독한 시련을 거울삼아 거듭 태어나리라고 봅니다. 그것은 권력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론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독자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 언론은 생존도 발전도 할 수 없습니다."


<동아일보>에서 이걸 보고 나는 마음 속으로 박수를 쳤다. “정말 옳은 말입니다. 제발 그렇게만 해주십시오. 독자의 요구에 부응하기만 한다면 <동아일보>는 어떤 어려움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헛된 기대였다. <동아일보>는 나와 같은 독자의 요구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거듭 태어나기는커녕 그럴 조짐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이게 바로 내가 <동아일보> 구독을 중단한 이유다.

▲2002년 1월1일 동아일보 신년 사설.


그 실망은 사실 김병관 씨의 법정 진술을 보기 전인 2002년 1월 1일 새해 첫 아침 신년사설에서 시작되었다. 「정권부패 척결에서 구국 시작해야」라는 제목으로 나온 이 큼직한 사설을 몇 대목만 추려보자.

정권지도부의 겉으로는 아름다우나 실제로는 거짓말이나 다름없는 언행들에서 위선을 느끼게 된다. 국가중추기관들의 명예가 이렇게 더럽혀지고 위신이 이렇게 떨어진 일은 건국 이래 드물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이 사설을 누가 썼는지 모르겠지만 그분에게 물어보자. 우리 역사에서 “겉으로는 아름다우나 실제로는 거짓말이나 다름없는 언행들에서 위선을 느끼게” 하지 않았던 정권지도부가 단 하나라도 있었던가? 국정원과 검찰 등 “국가중추기관의 명예가 이렇게 더럽혀지고 위신이 이렇게 떨어진” 일이 정말 “건국 이래 드물다”고 생각하는가.

4·19혁명으로 쫓겨난 이승만이나 종신집권 체제를 구축했던 박정희 씨는 물론이려니와,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간판 뒤에서 제 국민을 도륙했던 전두환과 보통사람의 시대를 표방하면서 천문학적 뇌물을 받아먹었던 노태우 씨의 위선이 김영삼 정권이나 김대중 정권의 위선보다 가벼웠던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국가중추기관’이 국민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아무리 세무조사에 원한이 맺혔다고 해도, 이렇게 균형감각이 없어서는 ‘정도언론’이 되기는 어렵다.

내가 <동아일보> 구독을 중단하기로 한 직접적인 계기는 9·11 테러 이후 <동아일보>가 보여준 대북정책 관련 보도들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으로 인해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에 들어간 가운데 햇볕정책의 지휘자인 김대중 대통령은 친인척을 포함한 권력 핵심부의 부정부패가 연일 드러나면서 레임덕 정도가 아니라 정치적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

부시의 ‘악의 축’ 발언으로 북미간의 긴장이 높아지고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이 고려되는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해 <동아일보>가 사설과 해설기사, 노재봉 씨 등 외부필진 칼럼을 통해서 보여준 것은 햇볕정책에 대한 비아냥, 김대중 정부 외교정책이 곤경에 빠진 것을 즐거워하는 듯한 무책임한 논평이 거의 전부였다. 이런 것이 싫어서 <조선일보>를 보지 않고 사는데, 나의 오랜 벗 <동아일보>마저 이럴 줄이야!

<동아일보>, 정체성을 찾아야

김병관 씨의 법정진술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인용하자. 그는 정부의 세무조사가 대북정책 비판에 대한 보복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동아일보>가 햇볕정책을 비판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민족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통일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훼손되거나 국가안보가 위태로워지는 일, 그리고 민족의 염원인 통일과제가 정략적으로 이용되는 일에 대해서는 경계해왔습니다."

나는 언론사가 통일문제의 정략적 이용을 경계하는 데 전적으로 찬성한다. 정부가 2000년 4·13 국회의원 총선을 며칠 앞두고 남북정상회담 합의를 발표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것은 총선용 호재로 삼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다. 야당 총재한테 미리 통보하고 발표시기를 조율했더라면 처음부터 정쟁의 초점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략적으로 이용한 걸로 보면 야당 역시 그 못지않았다. <동아일보>가 진정 “시시비비 불편부당의 정론”이라면 이 점을 함께 지적했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정체성 훼손’을 걱정하는 건 좋지만 <동아일보>는 그와 함께 ‘동아일보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지난날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 <동아일보>는 민주공화국의 기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많은 고난을 겪었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온전한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법률, 제도, 관습이 도처에 남아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위협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말이다.

나는 <동아일보>가 진정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걱정한다면 우리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권위주의, 차별, 연고주의, 부패를 감시하고 적발하고 비판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국제여론의 비난을 받는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을 비판해도 시원치 않은 판국에, 그에 편승해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부에 야유를 퍼붓는 것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나 국가안보에 도대체 무슨 보탬이 된다는 말인가.

<동아일보>에는 내가 개인적으로 또는 지면을 통해서 아는 훌륭한 기자들이 많이 있다. 나는 그분들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은 자기 손으로 만든 <동아일보> 가판을 펴드는 순간 흐뭇함과 자랑스러움을 느끼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동아일보>에 대해서 아무런 기대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동아일보>는 지금 <동아일보>를 구독한다는 데 자부심을 느꼈던 전통 독자층을 배신하고 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그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일상적 생활공간에서 몸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내가 <동아일보>를 끊고, 그 사실을 공개하는 것은 <동아일보>를 욕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동아일보>를 욕보일 힘도 없다. <동아일보>에서는 아마 이런 글에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병들어가는 오랜 벗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내 자신을 비난하게 될 것 같아서 쓰게 되었다.

나는 칼럼니스트로 돌아오면 <동아일보> 독자들께 제일 먼저 인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또 내 칼럼이 <동아일보>에 일종의 해독제 노릇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가져보았다. 하지만 약속을 지킬 기회를 얻지 못했다. 칼럼을 실어주지 않는다고 열 받아서 <동아일보>를 욕한다는 오해만큼은 피하고 싶다.

<동아일보>에게 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독자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게 <동아일보>는 30년을 사귄 룸메이트다. 나는 당분간 방을 따로 쓸 것이다. 거리의 가판대에서 얼굴이 마주쳐도 못 본 척할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서 흘끔흘끔 동정은 살필 생각이다. 내가 오래 알아온 <동아일보>로 다시 돌아오면 즉시 '합방'을 해야 하겠기에.

유시민의 '나의 동아일보 절독기' 전문

다음은 기사 내용에서 언급된 '항소이유서' 전문이다. <오마이뉴스>는 일부 네티즌들의 요청에 따라 그 전문을 싣는다.-편집자주
유시민의 '항소 이유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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