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고 짧게, 길고 가늘게

<교육장편소설> 그 집의 기억 10

등록 2002.04.11 09:43수정 2002.04.11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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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발령받은 초임교사 장 선생이 부른 배를 움켜쥐고 열을 올린다. 졸업하고, 갑자기 결혼을 하는 바람에 교직의 꿈을 잠시 접어두었다가, 이래서는 사는 재미가 반쯤 접혀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어느 날 임용고시 공부에 매달리고, 그러기를 이 년만에 드디어 이 학교에 발령을 받게 되었다며, 이제 뱃속의 아기만 순산을 하면 더 바랄 게 없다는 장 선생이다.

올해 새로 발령 받은 세 명 선생들과 며칠 전 머리를 맞댄 결과, 처음 발령 받은 학교이고, 평생동안 아이들 가르치는 일로 살아갈텐데, 이 학교야말로 자신들의 인생의 출발점이 아니냐며, 그러니 학교를 직접 운영하는 교장선생님께 저녁 식사라도 대접하며 교직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하여 어제 저녁 세 명의 신참 교사들과 교장선생이 한 자리에 모여 간단한 반주와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이런 저런 말 끝에 장 선생이 이렇게 입을 열었단다.

"교장선생님, 이제 교장선생님은 내년에 정년이시지 않습니까. 삼십 년 넘는 세월을 교직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로 보내셨으니 경륜도 경험도 숱하게 많으실텐데요. 이제 막 교직에 발을 내딛은 저희들에게 평생 마음에 새겨두고 아이들 앞에 설 수 있는 말 한 마디 들려주시지요."
"예, 교장 선생님.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 마디 해주시죠."
다른 신참 선생들도 장 선생 말에 그렇게 맞장구를 쳤단다.

그러자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 맛나게 쭉 비운 교장 선생 말이 이랬다나.

"교직, 참 좋지요. 내 나이 올해 예순 하나인데, 이 나이에 직장에 나와 돈버는 사람 있을 것 같애요? 내 친구들 다 애저녁에 회사에서 물러나 지금은 며느리 자식 눈치 보아가며 손주녀석 돌봐주는 걸로 소일하고 있어요. 그런데 나는 아직도 이렇게 학교에 나와 돈 벌고 있잖아요. 교직, 참 좋습니다."

평생 마음에 새기고 아이들 앞에 설 수 있는 말을 들려 달랬더니 얼토당토않게 나이 먹어서도 돈 벌 수 있는 직장이니 얼마나 좋으냐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에 그만 초임 교사 세 명은 어안이 벙벙해졌단다.


그때, 마음 속 말을 감추어두고 아님보살 하는 체질이 아닌 장 선생, 대뜸 이렇게 말했다나.
"교장 선생님, 그러니까 가늘고 길게 살라는 말씀이시죠."
장 선생의 비꼬는 말을 한참 뒤에 알아들은 교장 선생, 얼굴이 불그락푸르락 해대는 바람에 그날 저녁 식사는 똥 누고 밑 안 닦은 것처럼 흐지부지 파장이 되고 말았단다.
그날 이후로 교장의 별명은 '가늘고 길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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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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