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사람에게 그래도 우는 날보다 웃는 날이 많았던가. 앉아서 다니는 혁이를 두고 둘째아이 딸을 낳았고, 또 셋째아이인 둘째딸을 낳았다. 한 아이 한 아이를 낳을 때마다 머리맡에 앉아 있는 큰아들 혁이를 보며 눈이 맞붙어 앞이 보이지 않도록 울었다. 죄를 짓고 또 죄를 짓는 것 같은 마음에..."
신체 부위중 오른팔만 쓸 수 있는 1급 장애우 장윤혁(28. 칠곡군 왜관읍) 씨의 어머니, 박상희(50) 여사가 쓴 수기 내용이다.
장 씨는 태어나면서부터 '뇌성마비 장애' 진단을 받았으나 고장난 컴퓨터를 수리, 같은 장애우 등에게 기증할 정도로 지금은 어엿한 '컴도사' 가 됐고 오는 20일 제22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올해의 장애극복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장 씨의 오늘이 있기까지 박 여사의 모성애와 도움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다른 모든 신체는 그저 아들의 몸에 모양으로만 달려있 뿐이다"면서 아들의 손발 노릇을 충실히 하는 동시에 항상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었다.
박 여사는 "윤혁이가 '더 열심히 배워서 같은 처지의 장애우들에게 더 많은 컴퓨터를 무료로 주고 싶다'고 했을 때 그렇게 자랑스럴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장씨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고장난 컴퓨터를 수리, 지난해부터 모두 32대를 장애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기증했다. 그는 10여 년 동안 책을 보면서 직접 컴퓨터 수리 경험을 쌓았고 지난해 장애인 창업자금 2400만 원을 지원받아 '프리컴퓨터'를 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10평 남짓한 장 씨 가게에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컴퓨터를 수리해서 기증해달라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중고 컴퓨터를 넘쳐나고 있다.
장 씨는 또 최근 꽃씨 1만여 봉을 구입, 주민들에게 무료로 배포하는 등 컴퓨터 수리 외에 다른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 장 씨는 오는 20일 장애인-가족과 장애인 단체 관계자 등 5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서 열릴 장애인의 날 기념 행사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메달과 부상금 500만 원을 각각 받게 된다.
어머니의 수기
젖은 땅에도 희망은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앞유리를 꺽어 원탁 앞 의자까지 깊게 비춰주고 컴퓨터에서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음악은 아들과 나의 잠시 분주했던 시간을 피해 마음에 휴식을 젖게 한다.
2000년 초여름 창업자금을 받아 지금에 아들의 작은 공간을 만들게 되던 날, 우리는 행복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운명적으로 뇌성마비 장애란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세상을 살게 된 내 아들 윤혁이 신체에 부위중 오른팔만 쓸 수 있을뿐, 다른 모든 신체는 그저 아들에 몸에 모양으로만 달려있을 뿐이다.
어리석었던 지난 날.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옷가지 몇 개는 싸야겠지하며 작은 보자기 하나 펴놓고 있는 나에게, 어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아이는 앞으로의 자신의 삶을 예측치 못한 채 무심히 바라보며 서투른 말로 "엄마! 어디 가?" 하고 묻는다.
누구나 그랬듯이 먹거리가 그리 넉넉지 못했던 시절, 그래도 고을에서는 손꼽히는 시골 한 부잣집 막내 며느리로 시집을 가던 날. 두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 기구할 줄이야. '막내아들네 손주까지 봤으니, 이제 내 할 일 다했다'하며 좋아하시던 시부모님, 한칠날, 백일날 온동네가 떠들썩하게 잔치를 하셨건만, 첫돌날, 2년, 3년... 그러나, 아이는 아직 일어서지 못했고 자상하신 시아버님은 '내가 살아서 이놈을 낫게 해놓고 죽어야지'하시며 언제나 앞장서서 좋다하는 병원과 의원을 찾아 다니셨다.
태어날 때 거꾸로 태어난 것이 뇌에 손상을 미쳐 뇌성마비가 되었다는 의사선생님 한 분 한 분의 결론은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는 받아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더 이상 여러 사람이 괴로워해서는 안되겠구나하는 나의 판단은 남편과 시부모님의 사랑을 가슴깊이 묻고 어딘가 가서 둘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작은 보자기 하나에 운명의 길을 바꾸려 했던 날, 그날처럼 사람의 눈에서 그렇게 많은 눈물이 나려면 사람의 몸속에는 도대체 얼마나 큰샘이 있는 것일까... 못난 자식을 낳아 가족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을 나의 죄로 여겨 집을 나서려 했던 그날은 결국 또 한 번 가족의 가슴에 못을 박는 날이 되었다.
작은 가계에 아들과 나란히 앉아 컴퓨터를 통해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바보같았던 지난 날들의 나를 돌이켜 보며 삶의 희노애락을 가늠해본다. 몸이 불편함을 왜 그렇게 가슴아파했던지 왜, 내아들이 장애인이라 생각했는지... 좀 더 의연하지 못했던 나를 책망하기만 한다.
살아가는 사람에겐 그래도 우는 날보다 웃는 날이 많았던가. 앉아서 다니는 혁이를 두고 둘째아이 딸을 낳았고, 또 셋째아이인 둘째딸을 낳았다. 한 아이 한 아이를 낳을 때마다 머리맡에 앉아있는 큰아들 혁이를 보며 눈이 맞붙어 앞이 보이지 않도록 울었다. 죄를 짓고 또 죄를 짓는 것 같은 마음에...
그렇게 또 넷째아이인 막내아들을 낳던 날, 시아버님께서 웃음띤 얼굴로 '너무 가슴아파 하지마라 그래도 돌봐줄 놈 한 놈 생기지 않았냐'하실 때, 내 모든 생은 하늘의 뜻이니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자며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미소로 대답해 드렸었다. 아이가 자라 초등학교 입학하던 날, 교장선생님의 장애인학교가 아니니 입학할 수 없다는 말씀에 제대로 답변을 할 수 없던 모자란 아이의 어미로 인해 아이는 다음해 9살이 되어서야 한 선생님의 구원으로 입학을 할 수가 있었다.
아이가 잘못되면 자기가 책임을 지겠으며 자신이 아이의 담임이 되겠다고 교장선생님께 약속을 한 후에야 혁이는 초등학생이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고마운 선생님이셨다. 선생님과의 숙명적인 만남으로 혁이의 학교생활은 시작되었다. 나는 아침마다 아이를 업고 학교에 갔다가 수업이 마치면 다시 업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너무나 행복한 걸음들이었다.
다음날 또 다음날
한 시간이 끝나면 조심스레 여자친구들에 눈을 피해 프라스틱 컵 하나에 얼른 볼 일을 보여주고 너무나 착한 친구들 즐거운 점심시간 이면 혼자 밥그릇을 잡지 못해 떨어뜨리기가 일수인 혁이에 도시락을 친구들이 잡아주고 밥숫가락 위에 반찬을 올려주던... 내아들은 그렇게 행복한 초등학교 생활을 했었다.
한 학년이 한 반인 작은 산골 학교인지라 1학년때 친구가 다행히 졸업때까지 같은 반이어서 가족처럼 지낼 수가 있어 아무 탈없이 6년의 과정을 마치고 감격의 졸업을 맞던 날, 고맙고 감사한 분들에게 기도했다. 당신들의 덕분이라고...
그 해 삼월, 혁이는 다시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방안에서 늘 보던 TV와 라디오가 혁이의 유일한 친구였다.
골목길을 지나 저멀리 중학교 가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혁이는 웃음도 잃어가고 있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같이 보고, 집에 와서 다시 얘기하기를 좋아하던 그 밝았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사라져가고 있었다.
말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봄이 가고, 여름을 보내고... 날이 새면 일터로 가던 엄마, 아빠를 하루종일 방안에서만 기다리며, 가끔씩 돌아가신 할아버지 얘기를 꺼내기만 했었다.
나는 혁이에게 작은 수족관 항아리 하나를 사다주었다. 수족관 속 금붕어가 한참은 혁이를 즐겁게 해줬지만 말수가 줄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느날 농가에 지도를 위하여 다니던 어느 공무원의 소개로 전화국에서 주는 작은 통신단말기를 얻게 되었다.
내아들의 신체에서 쓸 수 있는 유일한 한부분 오른손으로 단말기의 뚜껑을 열고, 전화기에 코드를 꽂아서 화면의 설명을 보며 간단한 조작만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던 단말기통신. 얼마쯤이나 씨름을 하며 지냈을까...
어느날부터 혁이는 얘기가 시작되었다.
통신에서 어떤 누나를 만나 나눈 얘기를 일터에서 돌아온 가족에게 들려주는 것이 혁이의 유일한 낙이었다. 종일을 타자쳐서 작성한 한두 줄의 편지를 누나에게 보내는 것과, 누나의 긴 답장은 우리 가족 모두의 즐거움이었다. 가족중 반찬을 집어 입에 넣는 것이 혼자 힘들었던 혁이였지만, 타자에서만은 또 혼자 선수라며 날마다 자랑스런 웃음을 지었었다.
통신속에서 만난 누나는 이화여대를 나왔고 당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아버지는 병원장, 오빠는 세브란스병원 의사선생님인 어느 부자집 고명딸이었다.
세상의 좋은 것만 보고 아름다운 것만 간직한 희망을 담은 천사처럼 이혜정 누나는 약국에 늘 켜놓은 컴퓨터로 내아들이 하루종일 힘들게 친 타자편지에 꼬박꼬박 답장을 건네주며 자신의 희망을 나누어 주었다. 어느날 누나는 혁이에게 새롭고 커다란 희망을 전해주었다.
"혁아! 부모님께 잘말씀드려서 컴퓨터를 사달라고 하렴. 단말기는 통신만 할 수 있지만, 컴퓨터를 배우면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아. 혁이는 잘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부자집 누나가 가르쳐 준 희망은 가난한 농가에서는 무리한 숙제였다. 이백삼십만 원! 그시절 시골 인건비가 삼천 원. 논을 몇 마지기 팔아야 가능한 일인지... 한참을 온가족이 혼란에 빠졌었다.
어느 날, 일터에서 온 우리에게 혁이는 환히 웃으며, "엄마! 누나가 컴퓨터 사준데..."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말인 것 같아 그저 웃고 말았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돈을 보낼테니 사주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시절 삼성386알라딘 최신기종의 컴퓨터를 갖게 된 아들은 날아갈 듯 기뻐하며 이리저리 기어다니며 어쩔줄 몰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그것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가 아니었다. 전원을 켜면 영어만 화면에 뜨니 도대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누나에게 단말기로, 전화로 하루종일 누나를 보채서 컴퓨터를 배우는 것이 혁이의 새로운 일과가 되었다. 무엇을 켜라, 어떻게 입력해라, 책자를 사서 보내오고, 교육방송 이기성 교수님 컴퓨터 교육 방송시간이 혁이 컴퓨터 수업시간이었다. 누나의 소개로 서울의 여러 사람들이 혁이에게 컴퓨터 교재들을 많이 사서 보내주었다. 그렇게 혁이와 컴퓨터와의 싸움은 몇 년동안 계속되었다. 당시 도스용 프로그램의 가까스로 초등학교 졸업한 혁이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아이는 말라서 뼈만 앙상하게 남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말뿐이었다. 그저 조금씩 천천히 잠도 자고 쉬어가며 하라고.... 막내는 항상 형이 앉은 의자 등에 붙어서서 신기한 듯 컴퓨터와 형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곤 했었다.
어느날은 컴퓨터를 끄고 혁이를 자리에 눕히고 잠을 재웠다. 그러다 잠을 청한지 얼마나 되었을까 컴퓨터 앞에 다시 앉아있는 혁이를 보고 낮에 하면 안되겠니 하고 다가서니 돌아보는 아들의 옷자락에 온통 피가 묻혀 있었다. 한참을 끌어안고 울다가 자리에 누워 다시 잠을 청하던 그런 날은 그날만이 아니었다. 컴퓨터에 앉아 있다가 뒤로 넘어져 숨을 제대로 못쉬던 날은 차라리 함께 그대로 눈을 감고 싶기도 했다. 내가 지은 죄가 얼마나 많아 내아들이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세월은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웃음과 눈물이 오고 가기를 몇 년. 해마다 6월 6일, 내아들 혁이 생일 때면 가족선물 모두 챙겨 오시던 혁이 누나 이혜정 씨, 고마움을 어떤 낱말이 대신할 수 있을까. 그저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 될 뿐이었다.
어느날 농가를 순회하던 공무원이 컴퓨터에 대해 내아들 혁이에게 묻고, 또다른 사람이 자기 컴퓨터를 가지고 와서는 안되는 것을 고쳐가고, 모두들 일주일에 몇 번 놀러와서는 컴퓨터를 배워가고, 이웃에 아이가 과일 한바구니를 들고와서는 컴퓨터 좀 가르쳐 달라고 찾아오고...
언제부터인가 혁이는 작은 산골마을의 유일한 컴퓨터 선생님이 되어가고 있었다. 용돈을 주는 사람, T셔츠를 사주는 사람, 통닭을 시켜주는 사람 등 갈 수가 없으니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그렇게 소문이 나가고 있을 때, 내가 몸이 아파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으면서 우연히 혁이 얘기를 했더니 정재우 원장님께서는 직접 우리집에 찾아오셔서 혁이를 봐주셨다.
그때부터 원장님은 혁이가 몸이 아프면 달려가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혁이가 집을 떠나 세상에 뛰어들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분도 바로 그 분이었다. 이만한 컴퓨터 실력이면 이제 세상밖에 나와 사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 어떠냐고 하시면서 그 분의 여동생이 하고 있는 사업장 한켠에 자리를 만들어 권해 주셨다. 정재우 원장님과 김영붕 사장님, 사장님의 부인이자 원장님의 여동생분 모두들 고마운 사람들이다.
얼마나 불편했으랴. 그래도 불편한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셨으니... 지금 이렇게 조그만 컴퓨터 가게를 하며 살아보니 새삼 그분들의 고마움이 가슴에 와닿는다.
혁이 등 뒤에서 서있기만 하던 막내는 이제 컴퓨터 박사가 되어 국가고시자격증도 분류별로 취득하여 지금은 한 손 밖에 쓸 수 없는 혁이에게 또다른 한 손이 되어주고 있다. 막내는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을 했다. 형을 도우기 위해 살뜰히 시간표를 짜서 학교를 다니면서, 늘 웃으며 형은 안에서 자신은 밖에서 형과 둘이라면 컴퓨터로는 못할 것이 없다며 저녁시간 쪼개어 다시 또 밖으로 뛰어나간다.
몇 해전부터 윤혁이는 갑상선을 앓고 있었다. 한달에 한번씩 휠체어를 타고 병원을 가야했다. 검사를 하고 약을 받아오곤 했었다. 그날도 난 아들의 휠체어를 밀고 병원 복도를 걸었다. 많은 환자가 기다리는 지라 잠시 대기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책꽂이에 있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장애인과 일터"란 한국 고용촉진 공단에서 나온 책이었다. 책 속에 길이 있었다. 장애인 창업자금을 받을 수 있는 설명이 있었다. 난 행운이라도 잡은 듯 미안한 마음으로 책을 움켜쥐고 진료를 끝내고 집으로 왔다. 책 속에 설명대로 교육을 신청했으나 접수가 끝난 뒤였다. 난 전화로 문의를 했다. 다른 기관서라도 창업교육을 받으면 된다고 했다. 전화로 묻고 찾아 다니고 영남대에서 하는 교육을 받을수 있었다. 아들과 난 수료증을 받아들고 창업 자금을 신청했다
2000년 7월.
지금의 가게를 얻어 개업하던 날. 지역의 아는 모든 사람들이 보내 준 축하의 꽃다발과 화분들로 가게가 가득찬 날. 난 가슴으로 울었다. 장애인 창업자금을 받기 위해 힘들게 아들과 교육을 받던 일, 창업자금 신청을 하고도 제외되지는 않을까하며 가슴 조이던 일, 신청자금이 반으로 줄어든 것이 모자라 어렵게 어렵게 남편과 돈을 구하러 다니던 일, 자신을 위한 가게가 하나하나 준비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며 의자에 앉아서 빙빙돌며 좋아하던 혁이 모습.
때로는 벼랑끝에 혁이와 둘이 서 있는 것 같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세상살이는 힘든 날도 많았지만 모든 것이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컴퓨터를 팔고 또 수리도 하고, 혁이는 지시를 하고 난 부품을 뽑기도 하고 꼽기도 하고, 내아들 혁이는 자신이 소원하던 대로 가게 홈페이지도 이쁘게 만들고... 그러던 어느 날, 컴퓨터를 수리하러 왔다가 결국은 새컴퓨터를 사가게 되었는데, 쓰던 컴퓨터를 버려달라며 두고 갔다. 그 컴퓨터를 보며 혁이는 나에게 제의를 하나 해왔다. 쓸 수 있는 부품만 한 번 모아서 고쳐보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한 대의 컴퓨터를 만드는 데는 여러 대의 중고 컴퓨터가 필요했는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뒤늦게 난 혁이의 생각이 옳았다는 걸 알았다. 타자를 칠 수 있고, 통신만 할 수 있다면 하는 아들의 이쁜 마음을 말이다.
"어머니, 제가 이렇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저의 곁에서 늘 힘드신 어머님도 계셨지만 무엇보다도 따뜻한 사랑을 주신 서울누나가 계셨습니다. 누나에게 컴퓨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힘든 장애인 누군가에게 컴퓨터를 전해주고 싶습니다." 가슴 한구석이 찡해왔다. 평생 받기만 할 줄 알았던 아들이 이제는 누군가에게 베풀며 살 수 있는 힘까지 모았던 것이다.
모두들 열심히 닦고 수리하였다. 학교 갔다온 막내도 신이 나서 도운 덕분에 당시 두달전 장애인 가족교실에서 만난 지역 장애인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다. 물론 제일 열심히 하고, 제일 신이 난 것은 혁이였다. 어쩌다 그렇게 몇 개의 새부품만 끼워도 쓸 수 있는 컴퓨터를 얻게 되는 날은 하루종일 들떠서 컴퓨터를 만지작 거렸다. 많은 사람들에게 줄 수는 없었지만.
얼마만에 한 대씩 완성되는 컴퓨터를 몇몇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다. 우리 모두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컴퓨터를 받은 장애인은 감사하다는 말을 인터넷에 올리곤 했었다. 어느날 군청직원이 그 글을 보게 되어 과분한 군수님 상을 받기도 했다. 상받을 만한 자격이 되지 못해 상받는 내내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했지만, 혁이가 태어나 처음 받은 상인지라 기쁨을 감출 수는 없었다. 내아들이 이렇게 자랑스러울 때가...
축하 전보를 보내주신 사회복지 과장님, 내아들을 믿고 컴퓨터를 사가신 고마운 분들, 어쩌다 신문방송에 장애인 컴퓨터 나누기가 방송에 나가게 되어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택배로 또는 직접 좋은 일에 쓰라고 중고컴퓨터를 보내주신 얼굴 모르는 고마우신 분들, 학교 마치고 늦은 시간에 오늘도 이렇게 새까만 중고 모니터를 닦고 먼지쌓인 본체를 뜯어 수리하며 끙끙대는 우리 막내. 모두가 이 상장안에 어리어 있었다.
많은 기능은 못하지만 중고컴퓨터 기증하신 분 이름으로 전해진 컴퓨터를 받은 한 장애인이 200여미터도 안되는 거리를 음료수 2병 들고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 2시간이나 걸어 찾아왔을 때 우리의 그동안의 힘든 시간들은 진한 감동으로 바뀌어졌다. 기증하신 분에게도 전화를 드렸다면서 전해준 그 음료수는 세상에서 다시는 맛볼 수 없는 맛있는 음료수였다.
지금은 컴퓨터를 받은 장애인이 열심히 배워 이메일로 편지가 오고 홈페이지를 만들었다고 자랑을 했을 때 아들은 보람을 느낀다며 즐거워 한다. 더 열심히 해서 모든 것이 허락 되면 장애인에게 더 많은 컴퓨터를 주고 싶다며 오늘도 장부에 줄줄이 적혀있는 희망 장애인 명단과 창고 가득히 쌓여있는 중고컴퓨터를 보면서 혁이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하루를 시작한다. 지난달 서울에서 받아온 자랑스러운 장애인패는 내아들에게 '열심히 해'하며 매일 삶의 희망을 비춰주듯 가게 한구석에서 빛을 내고 있다.
어리석었던 지난날 이렇게 자랑스런 내아들을
얼마나 가슴아파 했던지
우리에겐 영원히 보이지 않는 빛인줄 알았던 날들이
이렇게 젖은 땅에도 희망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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