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강화도 바다로 간 자전거

등록 2002.04.15 19:48수정 2002.04.1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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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사람에게는 그침이 있고 행함이 있다. 그침은 집에서 이루어지고 행함은 길에서 이루어진다. 맹자가 말하기를 인(仁)은 집안을 편하게 하고 의(義)는 길을 바르게 한다고 하였으니, 집과 길은 그 중요함이 같다.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산경표》를 쓴 신경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길의 주인이 되고 싶어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사람이란 때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떠날 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렇게라도 떠나지 않으면 제자리로 돌아올 자신이 없기 때문에 길 떠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일요일 정오, 신촌에서 강화도행 버스를 탔습니다. 울긋불긋 나들이옷을 차려 입은 사람들을 가득 싣고 버스는 떠났습니다. 섬이면서도 섬이 아닌 땅 강화도를 찾을 때마다 조금은 기분이 이상해지곤 합니다.

강화 외포리에서 석모도로 가는 배를 탈 때, 그 배 뒤를 죽어라 따라오며 손님들의 새우깡을 탐내는 바보 갈매기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섬 사람들의 삶도 육지 사람들에 의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때는 씁쓸해지기도 하지요.

마리산 정상에 올랐던 일행 중 한 사람이 남자 일행들과 같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가 “저런 싸가지 없는 ×을 봤나, 어디서 담배를 꼬나물고 ××이야?”하는 상소리를 들었던 기억도 새롭더군요. 진정 신성한 땅이라면 자기 앞에 있는 수많은 남자들은 그냥 두고, 꼭 집어 한 여자에게만 욕설을 퍼붓는 당신의 편견은 과연 그 장소에 어울리는 것입니까, 따지기에 그 할머니의 나이는 너무 많아 보였었지요.

전등사 올라가는 길은 또 어땠던가요?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꼭꼭 밟아댔던지 등산로 옆의 나무들이 전부 뿌리를 내놓고 신음하는 걸 봐야 했지요. 서울 근교에 있다는 이유로 죄없이 고통당하는 그 나무들을 지켜 줄 길은, 슬프지만 없어 보였습니다.

설악에 살면서 산양을 지키고 있는 박그림 선생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가 봅니다. “당신들이 진정 아끼고 사랑하는 곳이 있다면, 그 곳에 평생 동안 가지 말아라. 당신 한 사람이라도 가지 않는 것이 그 땅을 지키는 유일한 답일지도 모른다.”


전등사 대웅전을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불쌍한 중생의 조각품보다, 사바 세계 사람들 때문에 신음하는 나무의 벗은 뿌리를 먼저 보아 주는 이들의 밝은 눈이 그리워지는 곳이 어디 강화뿐이겠습니까.

이런저런 상념에도 불구하고 자전거로 달리는 강화의 봄날은 아름답고, 아름다우며, 길 이어지는 모든 곳, 눈 닿는 모든 곳이 또한 아름다웠습니다. 강화 갯벌을 왼쪽에 끼고 달렸던 9킬로미터의 해안 도로는 비릿한 갯내음과 더불어 마음을 한껏 부풀게 했습니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바퀴가 뒤로 밀리는데도 불구하고, 바람에 섞인 모래가 입 안에서 버석버석 씹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갯벌에서 게를 잡겠다고 꼬물꼬물대는 아이들이 동그마니 앉아 있는 모습도 보기 좋았지요.

갯벌을 끼고 화도돈대 입구 삼거리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배꽃이 환하게 피어난 배밭에 이르렀습니다. 환하게 꽃등을 밝히고 있는 배나무 가지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발길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세우고 배밭 주인 아저씨에게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여쭤 봤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하시네요. 마음에 담아 두어도 그만이련만 어설픈 여행객이라 사진에 연연하고 맙니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화도돈대 입구 삼거리까지 달렸습니다. 거기서 ‘불은’방향으로 우회전하면 그때부터는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시골길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완만한 오르막길과 조금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져 바퀴를 돌리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만 막 갈아엎은 봄 땅이 따스하게 내뿜는 그 기운이 좋고, 복사꽃이랑 벚꽃 피어난 돌담 안쪽에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마을 사람들 풍경도 참 평화로웠습니다.

불은면소재지에서 호국교육원 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리다가 간판도 없고, 이름도 없는 칼국수집을 만나 허기를 면하고 오던 길을 되짚어 돌아왔습니다. 낑낑대며 올랐던 오르막길도 순식간, 자전거에서 내려 땀 뻘뻘 흘리며 끌고 올랐던 비탈길도 순식간입니다. 페달에서 두 발 다 떼고 신나게 달렸습니다. 길이 막혀 오도 가도 못 하는 자동차들을 뒤로 뒤로 보내며 신나게 달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서울입니다.
이 여행의 목적은 '돌아옴'에 있었습니다만, 아직은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내 마음에 평화가 오면 그 때는 알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겠지만요. 굳이 정답을 알려고 애쓰지 않으렵니다. 그 길을 가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그 길의 주인이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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