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내 사우나

<교육 장편 소설> 그 집의 기억 15

등록 2002.04.22 10:36수정 2002.04.25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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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시간, 옆 반인 박 선생 반이 시끌벅적하다. 별로 전달할 것도 없는 터라 나는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자고 한마디하고는 교실을 나서 옆 반으로 가본다. 박 선생이 교단 옆에서 피식 웃고 있다.
'녀석들, 담임이 있는데도 저렇게 난리네.'
나는 그냥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온다.


계단 군데군데 아이들이 뱉어놓은 가래침이 늘어지고 있다. 아침 일찍 학교에 온 아이들이 벌써 운동장에서 축구 한 경기를 끝냈나 보다. 교실에 틀어박혀 있는 것은 죽도록 싫어하지만, 아이들은 운동장에만 나가면 휙휙 날아다닌다.

아이들은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운동장 가 나무 그늘에 팽개쳐 두고 공차기에 달려든다. 요즘처럼 날씨가 춥지도 덥지도 않은 오월이면 더하다. 한동안 비가 오지 않아 운동장은 바싹 말라 있다. 아이들이 달릴 때마다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그 먼지 구덩이 속을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달린다.

'최루탄 범벅 같다.'
나는 그런 운동장을 바라보다 난데없는 최루탄 생각을 하곤 했다. 역시 어쩔 수 없는 세대인지도 모른다, 나는. 종로나 명동에서 젊음을 보낸 세대답게 나의 상상력은 뻗어간다. 자욱한 최루탄 가스와 미친 듯 날뛰던 지랄탄, 쫒아오던 군화 발, 몽둥이 찜질과 막다른 골목, 콧물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바라보던 그 거리의 자욱함이 아이들의 뜀박질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리고 한 시절이 지났다. 이제 이렇게 햇살만 살쪄가는 교정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며 또 다른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때, 쫒기다 쫒기다 한 숨 돌리던 골목에서 쓰고 또 쓰던 땀과 눈물.콧물에 젖은 휴지, 그래도 모자라 맨 바닥에 뱉어내던 침과 콧물 같은 것일까, 지금 아이들이 운동장을 달리다 뱉어놓은 저 가래침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달리니 목구멍에는 가득 먼지가루가 차 있을 테고, 시작종이 울리자 급하게 교실로 달려가던 아이들은 계단 이곳저곳에 먼지와 뒤섞인 가래침을 뱉어내곤 했다.

"제발 가래침 좀 함부로 뱉지 못하게 지도하세요."
교장과 학생부장이 회의 때마다 아우성이었지만, 아이들 또한 막무가내로 가래침을 뱉어댔다. 하긴 계단 위에서 아래쪽으로, 살아있는 벌레처럼 슬금슬금 몸통을 늘이며 떨어지는 가래침을 보노라면 아침 먹은 것이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운동장에 스프링 쿨러 시설이라도 해놓으면 좀 나을텐데."
체육과 박 선생이 역시 마당쇠답게 한마디하곤 했지만, 예산이 부족하다는 한마디 말로 끝이었다.
오늘 아침도 유난히 계단 곳곳에 가래침 천지다. 나는 마치 진 데를 피해 걷는 어린아이처럼 조심조심 교무실로 내려온다.


오늘은 일 교시가 비었으니 한숨 돌려볼까? 나는 기지개를 켜고 읽다 둔 소설을 꺼낸다. 식민지 시대의 민족의 슬픈 삶을 그려낸 대하 역사 소설 일곱 권 째다. 읽는다 읽는다 하고 마음만 먹고 있다 손에 든 게 두어 주 전이다. 마음먹기는 힘들었지만, 읽기 시작하자 속도감이 붙는다. 좋은 소설은 뒤가 궁금하기도 하며 한편으론 책장 넘어가는 것이 아쉽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며 어제 보다 둔 부분을 펼치는데 누가 툭 어깨를 친다.

"어? 누구?"
박 선생이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다는 듯 억지로 참는 웃음이 얼굴에 가득하다.
"아까 좀 시끄러웠지요?"
조회 시간 얘긴가보다 생각하며 나는 별 일 아니라는 투로 대답한다.
"뭘요. 아이들이 다 그렇지 뭐. 근데 무슨 일이에요?"


박 선생은 다른 얘기 없이 나를 끌고 임간교실로 간다. 손바닥만한 공간에 등나무를 두어 그루 올려, 이름뿐인 임간교실을 만들어 놓은 곳이다. 임간이란 숲 속이란 말 아닌가? 그런데 이 학교의 임간교실은 숲이 아니라 정원도 못된다. 운동장 끝 쪽이라 언제나 의자에는 먼지가 자욱하게 내려앉아 있고, 한 반 아이들도 다 앉지 못할 정도로 좁아터진 장소니 교실로 쓰기에는 원천봉쇄된 곳이다. 그저 점심시간, 몇몇 아이들이 모여 도시락을 까먹기나 하는 장소일 뿐이다.

박 선생은 의자에 쌓인 먼지를 한 번 훅 불더니 내게 앉으라는 표정을 짓는다.
"수업 없죠?"
"박 선생님도?"
내 물음에 그는 그냥 피식 웃는다. 긴히 할 무슨 얘기가 있는가 싶어 나는 정색을 하고 묻는다.
"뭔 얘긴데?"
"아니 아까 조회시간에 좀 시끄러웠던 거요. 나 참."
박 선생은 한 편으론 어이가 없고, 한 편으론 재미있다는 듯 표정을 다양하게 바꾸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제 퇴근 무렵의 일이었다. 마침 전에 있던 학교 선생들과 약속이 있어 박 선생이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오늘 만나기로 한 전의 학교 선생 중 한 명이었다. 학교에 일이 생기는 바람에 약속시간을 한 시간쯤 늦춰야 되겠다는 말이었다. 까짓 것 그러지 뭐, 한 시간 정도야 어디 가서 바람이나 쐬다 보면 금방 가겠지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막상 한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생각해 보니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에라, 사우나에나 가서 몸 좀 풀고 가야겠다. 오늘 분명히 술 깨나 마셔 댈텐데, 미리 몸을 노골노골하게 만들어 놓고, 우유라도 한 잔 마시고 나면 덜 취하겠지 뭐.'
박 선생, 그런 생각으로 학교 옆 동네 사우나로 슬금슬금 들어갔다.
옷을 다 벗고, 탕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늘 다닌 목욕탕이 아닌지라 구조도 낯설고, 안이 온통 김이 서려 잠시 어리벙벙해 있었다. 그때 난데없이 샤워기 밑에서 머리를 감던 아이가 비누거품 채로 그에게 다가와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자세히 보니 박 선생네 반 아이였다.
"응, 그... 그래."
박 선생 얼결에 인사를 받으며 얼른 수건으로 아랫도리를 가렸다.

참 나, 목욕탕과 화장실에서는 제자들과 만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이게 뭐야. 괜히 학교 근처 목욕탕에 왔군. 그렇게 생각하며 박 선생, 아이를 향해 한 마디 던지고 돌아섰다.
"목욕 왔니? 열심히 해라."
목욕탕에서 만났으니 목욕 온 게 뻔할 텐데, 게다가 열심히 해라라니 뭘 열심히 하란 말인가? 때를 열심히 밀라는 얘기?
말을 하고 나니 어이가 없어 박 선생은 얼른 물을 한바가지 끼얹고는 온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갑자기 탕 속에서 한 녀석이 벌떡 일어나더니 또 한 마디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리 오세요, 시원해요."
어마, 뜨거워라. 박 선생 다시 바라보니 역시 자기 반 아이다. 얼른 아랫도리 쪽으로 손을 가져갔지만, 이번엔 가릴 수건도 없다. 샤워기 밑 세수대야에 넣어두고 온 터였다. 그런 박 선생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탕에서 밖으로 나오려는 자세다.
"어, 그... 그래."
박 선생 더듬더듬 탕으로 들어갔다. 괜히 아랫부분이 묵지그레하고 엉덩이가 점점 뒤로 빠지는 것 같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었다. 탕에 들어가 막 몸을 물에 담그려 하는데, 맞은편에서 등을 보이고 열심히 몸을 씻던 녀석에게 탕 안에 있던 녀석이 소리를 질렀다.
"야, 깜. 선생님 오셨어."
얼굴이 유난히 까맣게 타서 깜이라는 별명을 가진 천희였다. 녀석은 몸을 닦던 이태리 타올을 든 채 엉거주춤 일어나 탕 속의 박 선생을 향해 고개를 꾸벅 했다.

이곳저곳에서 목욕을 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박 선생과 아이들을 번갈아보면서 키득키득 웃음을 참느라 야단이다. 에라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뭐 어차피 사람이 맨 몸으로 태어나 맨 몸으로 떠나는 것 아니더냐. 까짓 선생이 제자들과 목욕 함께 하는 거야 자식놈과 욕탕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박 선생, 그렇게 마음먹고 맘 편히 탕 안에 들어가 앉았는데, 탕 안에 있던 녀석뿐만 아니라 샤워기 아래 있던 놈, 등짝을 보이고 때 밀던 깜이란 놈까지 모두 우루루 탕 안에 들어오더니 박 선생 옆에 몸을 스스르 밀어넣는 것이 아닌가.

거기까지는 그래도 좋았는데, 이 녀석들 이런저런 말을 붙이면서 슬금슬금 박 선생 아랫도리를 훔쳐보느라 가자미눈이 되었겠다. 그렇다고 점잖은 체면에 아랫도리를 두 손으로 가린다면 더 어색할테고, 박 선생 이럴 바에야 더 당당해져야겠다 싶어 자기도 슬금슬금 아이놈들을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일 학년이라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했다. 하지만 깜이란 녀석은 벌써 아랫도리에 몇 오라기 털이 제법 여봐란 듯이 자라나 있다.

적당히 몸을 불리고 난 박 선생, 탕에서 움찔움찔 일어났다. 그러자 세 놈 역시 벌떡 일어나 박 선생을 따라 나오며 한마디씩 했다.
"선생님, 등 밀어 드릴게요."
"때밀이 저리 가라 하게 밀게요."
"맡겨만 주세요."
녀석들이야 반가워서 그러는 것일테지만, 박 선생은 괜히 찝찝할 밖에. 하지만 별 수 있나, 박 선생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오냐, 그래."
박 선생의 허락이 떨어지자 녀석들은 등짝에 매달리기도 하고, 팔을 잡아 늘이기도 하며 몸 이곳저곳을 닦기 시작했다.

참, 나 원.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볼 것 다 본 바에야.
그렇게 마음먹은 박 선생, 목욕탕이 우렁우렁하게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들아. 구석구석 박박 밀어라."
"예에. 걱정 맙쇼."
녀석들은 정말 때는 단 한 점도 용서할 수 없다는 듯 박 선생의 온 몸을 박박 밀어댔는데, 특히 다리 쪽을 밀 때는 박 선생 아랫도리의 그놈을 힐끗대며 서로 묘한 눈짓도 해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목욕을 마치고 나와 세 놈과 함께 목이 얼얼하게 시원한 음료수 한 깡통씩을 나누어 마시고 헤어졌다.

그런데 오늘 아침, 교실에 들어간 박 선생은 깜짝 놀라고 말았으니.
칠판에 박 선생이 벌거벗고 누워 있는 그림과 함께 이런 낙서가 적혀 있었다나. 그림에 '목욕탕의 담임 박 아무개'라고 화살표가 그려져 있고, "어제 선생님 그거 봤다. 존나 크더라."
그 옆에 다른 글씨체로 이렇게 이어져 있었다.
"웃기지 마라. 조또 아니더라."

"아까 웃음이 그것 때문이었군요."
나도 그만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다. 아이들 표정이 눈에 선하다. 아이들은 욕을 욕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매우 좋으면 존나 좋다고 하고, 화가 나면 열나 화난다고 한다. 존나는 좆나게, 열나는 열나게라는 말이지만, 선생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그런 말을 쓴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으면 그저 매우, 아주 정도의 뜻이라고 대답할 뿐이다. 정도를 나타내는 부사일 뿐이다.

박 선생과 목욕탕에서 만난 아이들이 쓴 낙서도 아마 그들의 일상 언어일 뿐이리라. 하긴 모르고 쓰는 말이니 나무랄 이유도 굳이 없으리라.
"그러니 학교 동네 사우나는 가는 법이 아니라니까."
나는 여전히 킥킥거리며 박 선생에게 한 마디 한다.
"허, 참. 혼낼 수도 없고 그냥 넘어가기도 뭐하고."
박 선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며 두 손을 펴 보인다.
"어쩌긴 뭐. 그게 다 선생 노릇 하는 탓이지. 아, 좋지 뭘 그래. 그만큼 아이들이 박 선생에게 스스럼이 없다는 뜻인데."

내 말에 박 선생 옆구리를 푹 찌르며 한 마디 한다.
"그럼 오늘은 맹 선생님이 선생님 반 아이들 데리고 사우나나 한 번 하시죠. 내 체육 시간에 아이들을 흙강아지로 만들어 줄테니."
"아이구, 그런 말 마슈. 나는 결코 교내 사우나는 안가네. 괜히 애들한테 뭐만하다는 소리나 듣게?"
나는 손을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박 선생도 싱긋 웃는다. 그의 웃음이 등나무 푸른 잎새 속에서 더 눈부시다. 곧 저 등나무들 자주색 등꽃을 세상 가득 피워내리라. 나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체육실로 향하는 그의 어깨 가득 아이들 웃음이 등꽃처럼 엉켜 피어나는 모습을 환영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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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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