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전날에 흘린 두 아이의 눈물

<시와 아이들> 봄 소풍 이야기

등록 2002.04.22 14:20수정 2002.04.2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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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수원


봄 소풍을 가던 날입니다. 모이기로 약속한 장소에 가보니 시간이 퍽 이른데도 십여 명의 아이들이 먼저 나와 있었습니다. 밝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묵정밭에 핀 한 무더기 봄꽃을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중 한 아이가 저를 먼저 발견하고는 쪼르르 달려와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저 오늘 청바지 입고 왔어요. 이 웃옷도 오래 전에 산 거구요. 그리고 구두 안 신고 운동화도 신고 왔어요. 오늘의 베스트 드레서 저 맞죠?"

그러자 이번에는 서너 명의 아이가 한꺼번에 앞을 다투어 몰려와 마치 패션쇼라도 벌이듯이 묘한 몸 동작까지 곁들여 옷맵시를 자랑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옷차림을 설명하느라 난리입니다. 말에 과장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더러는 진실성이 의심되긴 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상을 타려는 모습이 예뻐 보입니다.

"선생님, 저도 청바지 입고 왔는데요, 작년에 언니에게 물려받은 거예요. 우리 집 가정 경제를 생각해서요. 그래도 워낙 모델이 좋아서 섹시해 보이죠? 그리고 여기 이 구멍은 너무 오래 입어서 닳아진 거예요. 일부러 찢어진 것을 산 것이 아니고요."

아이들이 청바지에 헌옷 타령을 하면서 제 앞에서 궁색을 떤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소풍을 한 열흘 앞두고 저는 소풍날 가장 옷을 잘 입고 온 아이에게 '베스트 드레서' 상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단서조항을 붙여서 말입니다.

첫째, 소풍을 위해 새로 장만한 옷이나 정장차림은 실격.
둘째, 오래 걷기에 편한 복장과 신발을 신을 것.
넷째, 소박한 옷차림이지만 자신만의 개성을 살릴 것.


해마다 아이들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소풍날 하나의 재미를 더하거나, 아이들 복장을 단속하려는 생활지도 차원에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오래 전 소풍 하루 전날에 흘린 두 아이의 눈물 때문이었습니다.

서너 해 전의 일입니다. 그해 처음 여자 반 담임을 맡았는데 소풍을 불과 하루 앞두고 두 아이가 교무실로 저를 찾아와 갑자기 소풍을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다가 갑자기 훌쩍훌쩍 울기 시작합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사정을 물어보니 대답이 너무 뜻밖이었습니다.


"저, 내일 입고 갈 옷이 없어요."
어이가 없는 대답이었지만, 혹시라도 집안에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이렇게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옷이 없다니?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
그러자 옆에서 함께 훌쩍이고 있던 아이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애들은 내일 다 새 옷을 입고 올 거란 말예요."

저는 그날 두 아이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소풍을 가는 날 새 옷을 사 입는 것은 부모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며, 더욱이 편한 복장도 아닌 정장스타일의 옷을 사 입고 소풍을 가는 것은 정말 촌스럽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해주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다만, 두 아이 모두 집에 청바지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내일 그것을 입고 오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만 귀띔을 해주어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수업 시간 다른 반 교실에 들어가 두 아이의 말이 사실인지 직접 확인을 해보았습니다. 과장이겠거니 했는데, 놀랍게도 절반 가량이 소풍을 위해 새 옷을 장만한 것으로 응답을 하였습니다. 왜 집에 있는 말짱한 옷들을 놓아두고 소풍날 하루를 위해서 새 옷을 사느냐고 물어보니 한 아이의 대답이 이랬습니다.

"소풍날 친구들은 다 새 옷 입고 오는데 저만 안 입으면 쪽 팔리잖아요."

'언제부터 아이들이 이렇게 허약해졌을까?'
그런 아득한 생각이 밀려오면서 소풍날 하루를 위해 옷을 산 아이들이나, 그것 때문에 상처가 된 아이들이나 모두 함께 혼을 내서 정신을 차리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습니다. 하지만 차츰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아이들만의 잘못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날 종례 시간, 저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킨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은 자유복장입니다. 그리고 내일 옷을 가장 잘 입고 나온 학생에게 '베스트 드레서' 상을 주겠습니다. 그런데 소풍날 하루 입자고 부모님을 졸라서 새 옷을 사 입고 온 학생은 실격입니다. 그런 학생들은 부모님께 결코 효도하는 학생이라도 말할 수 없으니까 금번 효행상 시상에서도 제외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힌트를 드리면, 선생님은 청바지를 입은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 다음날, 청바지에 가벼운 웃옷차림을 하고 온 아이는 그 두 아이 말고도 상당수가 있었습니다. 몇 아이만 이미 사놓은 옷을 안 입고 올 수도 없었던지 새 옷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옷 모양새가 모두 엇비슷하여 무슨 제복 같기도 한 것이 색깔조차 밝지 못하고 침침하여, 밝고 소박하고 발랄한 자유복장을 한 아이들에 섞여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올해 봄 소풍에는 단 한 명의 아이도 새로 산 옷을 입고 오지 않았습니다. 언니나 엄마가 입었던 것으로 보이는 임신복 비슷한 옷을 입고 온 아이가 한 명, 그리고 양장 스타일(본인은 절대 양장이 아니라고 우겼지만)의 불편한 옷을 입고 온 아이가 한 명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 두 아이는 소풍날 하루 종일 불편함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모둠별로 하는 소풍놀이가 주최측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서 대부분 몸으로 때워야 하는 남성적인 놀이들로 짜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뜨겁고 흥겨운 몸의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은 다시 모둠별로 모여 제가 내준 문제를 풀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었습니다. 그 문제란 게 사실은 별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를 읽고 모둠별로 상의하여 시의 의미가 이어지도록 빈 공란을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시내버스 안에서
내게 자리를 양보 받은 할머니 한 분이
버스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을
슬그머니 어루만지시더니
손을 쥐었다 놓았다 하신다

불혹을 넘긴 지도 오래인 내가
당신 눈엔 아이 같았을까
아니면, 신혼 시절 남정네나 같았을까
어느 아슴한 시절을
가만 손을 대어 쓰다듬었을까

정류장이 가까워오면서
조심스레 손을 빼려하자
화들짝 놀랐다가 다소곳해지는 손
허전해진, 공기처럼 가벼워진 손을
이번에는 내 쪽에서 ( )( )( ) ( )( )( ) 해본다
-------------- 졸시 '손' 전문

답을 찾기 위해서는 시를 꼼꼼히 읽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는 바로 그 점을 노렸던 것입니다. 비록 놀이를 통해서라도 시를 접한 아이들 중에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노년의 내면 풍경을 간접 체험하는 기회가 오지 않을까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그 동안 철없이 받기만 하던 사랑을 청산하고 돌연 사랑의 주체가 되어 '이번에는 내 쪽에서 쥐었다 놓았다' 해보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거의 환상적인 생각을 해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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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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