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은 범죄를 저질러도 '미군'이다?

'주한미군지위협정'에 의해 처벌없이 귀환 우려

등록 2002.04.26 10:49수정 2002.04.26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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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6일 음주중 교통사고를 낸 뒤 피해자를 차에 매달고 달려 특정범죄가중처벌에 관한 법률위반(도주차량) 등으로 형사입건된 미 해군 중령 H(43) 씨에 대해 한국 측이(담당 서울지검 강경필 검사) 아직 재판권 행사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 매단 채 200m가량 달려

사고가 난 것은 지난 3월 26일 오후 7시 50분경. 서울 용산구 이태원 상가거리를 운전중이던 미군 H씨가 급하게 차선을 변경하다 뒤에 오던 정영권(26) 씨의 차량과 추돌했다. 미군은 사고 직후 구호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곧바로 도주했다. 그때부터 도로 한가운데서 정 씨와의 차량 추격전이 시작됐다.

미군 차량이 해밀턴 호텔 인근 사거리에 이르러 신호관계로 정차하자 정 씨는 차에서 내려 미군 차량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미군은 그에 개의치 않고 그대로 진행했다. 엉겁결에 차량 본네트에 올라탄 정씨는 만일 차량에서 떨어지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서 결사적으로 차량에 매달렸다.

그리고 차 앞유리를 두드리며 차량을 멈추라고 소리쳤지만 미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위험한 곡예운전은 마침 당시 상황을 목격한 한 운전자가 비상등을 켜며 사고 차량 앞을 가로질러 막고서야 끝날 수 있었다. 피해자 정씨를 매단 채 200m나 달린 뒤였다. 하지만 정씨는 당시 도로에 차가 밀려 차량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았던 까닭에 차량 파손 외에 전치 2주의 부상에 그쳤다.

범죄를 저질러도 '위대한' 미국 군인

이후 이들은 조사를 받기 위해 인근 이태원 파출소로 향했고, 곧 이어 통고를 받은 미 헌병들도 파출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미군이 워낙 계급이 높다보니 정말 웃지못할 진풍경이 벌어졌다. 의자에 앉아 있는 가해미군 옆으로 미 헌병이 쪼그리고 앉아 미군이 헌병 어깨에 팔을 걸친 채 무어라 계속 말을 건네면 헌병은 "Yes, Sir!"만 반복하고 있던 것이다. 범죄를 저질렀어도 그는 여전히 위대한 미국 군대의 중령이었다.


그리고 사고 당시 걸음도 제대로 못걸을 정도로 만취상태였던 미군은 마침 파출소에 음주측정기가 없어 용산경찰서로 옮겨간 뒤에야 음주측정을 할 수 있었다. 그것도 미군이 계속해서 음주측정을 거부하는 바람에 약 30여 분간의 힘겨운 실랑이 끝에 겨우 측정이 가능했다. 측정 결과는 혈중 알콜농도 0.129%. 하지만 그때는 이미 사고 후 약 두시간 정도 흘러버린 때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사고 당시 혈중농도는 훨씬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당시 미군은 무면허 상태였다는 것이다. 가해미군은 주한미군이 아니라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위해 임시 방한한 자로 미국면허 외에 한국에서 운전할 수 있는 적법한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미국정부의 보증을 내세워 렌트카를 빌려 운전하다 사고를 낸 것이다.


미군측에서 재판권 포기 요청

이번 사건은 비록 피해 정도가 크지 않다고 해도 음주운전에 무면허, 뺑소니 등 범행내용이 매우 중한 점에 비추어 형사처벌을 면할 수 없다. 특정범죄가중처벌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피해자를 치상한 후 도주한 경우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재판권 행사마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가해자가 미군이기 때문이다.

현행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에 의하면, 한국이 1차적 재판권을 가지는 범죄라 하더라도 미군측에서 재판권 포기 요청을 해오면 특히 중요한 경우를 빼고는 재판권을 포기해야 한다.(합의의사록 제22조 제3항 (나)에 관하여) 그리고 그러한 결정은 법무부에서 담당 검사의 재판권 행사 의견을 검토, 결정하여 통상 28일 내에 미군당국에 통보하게 된다.(양해사항 제22조 제3항 (다))

이에 따라 사건이 발생하면 바로 미군측에서 한국 법무부에 재판권 포기요청서를 보내오고, 한국측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사건에 대해 재판권을 포기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왔다. 미군인 범죄에 대한 재판권 행사율이 매우 낮은 것도 이때문이다. (미군인 범죄에 대한 재판권 행사율 : '99 3.6% '00 7.4% '01(1-7) 7.6%, 미군인 교통사고에 대한 재판권 행사율 '99 0.9% '00 5.3% '01(1-10) 4.7%) 이번 사건 역시 사건 발생 직후인 3월 말 미군측에서 법무부에 재판권 포기요청서를 보내온 것으로 확인됐다.

울며 겨자먹기식 합의

한편, 검찰측에서는 재판권 행사 결정에서 피해자가 가해미군과 형사합의한 점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해미군이 처음에 형사합의를 하자면서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도 이것밖에는 없다며 제시한 것이 단돈 50만 원이었다. 이에 피해자가 합의를 거부하였고, 결국 두 번째 만남에서 1천 달러(한화로 약 130만 원)에 합의를 보게 되었다. '만족하냐'는 물음에 정 씨는,

"물론 만족하지야 못하죠... 저도 처음엔 합의를 안해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막 가려던 저를 미군이 부여잡으며 'Please, Please...'하며 애원하더라구요. 그래서 귀찮고 짜증도 나서 그냥 'Ok'하고는 합의를 해줘버렸죠. 합의를 안해주면 또 몇 번 불려다녀야 하는데 일도 바쁘고... 주변에서는 하나같이 그거 받은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라고 하더라구요. 옆가게도 이전에 미군 지프차에 크게 사고난 적 있는데 치료비도 못받고 차량 파손된 거 실비만 받았다고 그래요."

이렇듯 문제는 피해자가 형사합의에 이르게 된 것이 가해미군을 형사처벌할 의사가 전혀 없어서라기보다는 미군 교통사고의 경우 보험처리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형사합의말고는 실질적으로 보상받을 방도가 마땅치 않은 데다, 형사합의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가해미군이 반드시 형사처벌을 받으리라는 보장도 없는 현실적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 있다.

형사처벌의 어려움은 앞서 살펴본 낮은 재판권 행사율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민사상 손해배상도 녹록치 않다.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에 따르면 이번 사건과 같이 비공무중 발생한 미군범죄의 경우 국가배상 신청을 통해 미배상사무소로부터 직접 배상금을 받아내거나 가해미군 개인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국가배상의 경우 배상금이 충분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고 민사소송은 설사 재판을 통해 배상 결정이 났다 하더라도 실제 집행에 어려움이 많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다.

특히 이번 사건처럼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는 것도 아니고, 가진 재산이 없다고 우기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다보니 미군 피해자들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형사합의를 통해서라도 부족하나마 배상금을 대신하려는 경우가 많다.

가해미군의 눈에 비친 한국은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안다면 사법당국은 보다 적극적으로 가해미군에 대한 형사처벌에 나서야 한다.

특히, 현재 가해미군은 주한미군이 아닌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위해 잠시 한국에 방문해 4월 초에 본국으로 귀환 예정이었다가 이번 사건으로 잠시 귀국이 늦추어진지라 언제 미국으로 가버릴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결국 한국에서 재판권조차 포기하고 미군을 그대로 본국으로 돌려보낸다면 그는 한국을 어떻게 기억할까.

사실상 '살인 미수'의 범죄를 저지르고도 구속은커녕 어떠한 형사처벌도 받지 않고 유유히 본국에 돌아오게 된 것을 한국 민족의 넓은 아량이라 생각하고 감사해할까. 오히려 그는 한국에서 미군이 갖는 그 엄청난 힘과 권위를 몸으로 느끼고, 보다 오만해진 자세로 동료 미군들에게 무용담처럼 자랑할 것이다.

훈련기간 중에도 술먹고 운전하는 미군을 상전받들 듯하며 그 나라의 안보를 지켜주고 있다며 감사해하는 나라. 부끄러운 한국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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