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 정보고속도로

등록 2002.05.05 23:41수정 2002.05.06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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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국의 고속인터넷 업계는 죽을 맛이다. 가입자가 당초 예상했던 것처럼 늘지 않는데다 경기회복의 기대마저 빗나가자 심지어 해약을 통보해 오는 사람들도 많다. 언제 직장을 잃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 달 최고 70여 달러에 이르는 사용료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의 소비자들이 정작 고속인터넷 가입을 망설이게 하는 더 큰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다. 막상 오랜 고생 끝에 고속인터넷에 가입하더라도 비싼 사용료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멀티미디어 컨텐츠가 절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컨텐츠 업계는 나름대로 또 이유가 있다. 대다수의 인터넷 사용자가 56K 전화모뎀을 통해 접속을 하는데 대용량의 멀티미디어 컨텐츠로 웹사이트를 꾸밀 경우 다운로드 시간이 한 없이 늘어나 애써 끌어 모은 방문객을 쫓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초기화면 다운로드에 3초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경우 대다수의 접속자가 재방문을 꺼린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결국 미국의 인터넷 업계는 텍스트와 단순그래픽 위주로 웹사이트를 꾸밀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마치 닭과 달걀의 딜레마에 빠진 형국인데 이로 인해 초고속정보고속도로 개념을 제일 먼저 주창한 미국이지만 지금은 한국에 비해 형편 없이 떨어지는 보급률을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무수히 많은 군소 업체들이 줄줄이 파산하고 있으며 지난 해 연말에는 업계 선도 기업 중 하나인 '익사이트@홈'이 파산을 신청하기도 했다.

아우토반과 프리웨이

첨단기술 강박증에 걸린 한국 관료들 사이에서는 BT, NT가 유행어가 되다시피했지만 사실 초고속인터넷 기술 자체는 그다지 첨단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원천기술은 대부분 미국에서 개발되었으며 우리는 단지 정부와 민간이 합심해 불도저처럼 밀어붙인 덕에 지금처럼 세계 최고의 보급률을 달성하게 됐다.

따지고 보면 미국과 독일이 20세기 산업시대의 강국으로 군림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프리웨이와 아우토반 역시 당시에도 첨단기술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보급이 되면 한 나라의 경제발전과 사회변혁에 결정적 촉매가 된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어떤 기술보다도 더 큰 파급력을 발휘했다.


우리의 경부고속도로 역시 마찬가지다. 울산의 대규모 화학단지, 포항제철 등은 고속의 대량수송수단이라는 전제가 없이는 아예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것들이다. 경부고속도로는 또 산업화를 촉진하고 도시화를 부추겨 도시중산층이라는 사회집단을 만들어냈다. 박정희 대통령이 밀어붙인 경부고속도로가 결국 그의 집권기반을 무너뜨린 원인이 된 도시 중산층 시민을 대량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아이러니다.

30여 년이 흘러 전국을 정보고속도로로 엮어낸 한국은 또 다시 비슷한 사회혁명을 경험하고 있다. 벤처 열풍으로 재벌경제를 뒤흔들고 온라인 뉴스와 게시판 문화로 인터넷 여론폭발을 이루었으며 드디어 금년에는 인터넷의 마지막 무풍 지대인 정치권에 일대 변혁의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노풍의 진상이다. 기자가 언젠가 주장한 것처럼 모든 테크놀로지에는 반드시 정치적 함의가 있다는 것이 또 한번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70년대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이 이후 30여 년간 이루어진 광범위한 산업발전과 사회변화의 시작에 불과했듯이 우리의 정보통신혁명 역시 이제 겨우 출발점에 서 있을 뿐이다. 노풍은 끝이 아니라 아주 작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인프라의 힘이다.

한국의 경제력이 현실세계에서는 아직도 10위 권 밖이지만 glreach.com에 따르면 인터넷 상에서 한국어의 위상은 올해 3월 이미 세계 6위를 넘어섰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한국인의 사이버 세계가 발전해간다면 머지 않아 4강에 드는 것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인프라를 선택하고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미래는 결정이 된다. 그런 면에서 이제 막 우리 손에 쥔 정보고속도로의 운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경부고속도로의 운용방식이 적절한 선례가 될 수 있다.

인터넷 프로토콜

고속도로는 통행료를 내기만 하면 누구든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고속인터넷 역시 접속자의 신분이나 경제력으로 접속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는 제한속도를 지키고 갓길 운행을 하지 않는 등 정해진 통행규칙, 즉 프로토콜을 따라야 한다. 인터넷의 프로토콜은 TCP-IP다.

인터넷을 흐르는 모든 정보는 반드시 이 프로토콜을 따라야 하지만 거꾸로 이 규칙만 따르면 어떤 컨텐츠도 자유롭게 유통될 수 있다. 인터넷의 교통경찰, 즉 정보통신부는 바로 이 기술적 운용과 컨텐츠 유통의 감시자 역할만 하면 될 것이다. 마치 교통경찰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모든 차량을 일일이 감시하는 포지티브 방식을 택하지 않고 사고가 나거나 교통체증이 일어날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개입하듯이 정보통신부 역시 네거티브 접근에 치중하는 것이 인터넷의 정신과도 부합한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모든 차량에 등급을 매기고 감시하는 것이 불가능 하듯 모든 인터넷 사이트에 일일이 등급을 매기고 감시해 보겠다는 정부 일각의 발상 역시 어이없기는 마찬가지다. 더구나 인터넷이란 말 자체에서 드러나듯 국경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정보교류를 통제할 수단은 애초에 없다. 유일한 통제방법은 아예 인터넷을 다른 나라와 차단하는 것인데 그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인터넷이 아니다. 경부고속도로를 그런 식으로 통제했다면 지금과 같은 산업발전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의 정치·사회적 함의는 이미 정보통신부의 통제범위를 한참 넘어선 지 오래다. 현실의 대한민국에 국회와 정부가 있어 사회적 규칙과 법규를 합의해내듯이 사이버 코리아에도 그에 걸맞는 네티즌 사이의 조정과 합의를 위한 기구가 필요할 것이다. 한국이 고속인터넷 보급에 있어 세계 최고를 자랑하듯 그 사회적 운용에 있어서도 세계가 보고 따를 만한 전범을 창출해내야 할 것이다.

jean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버스 안에 무선인터넷이 없어 정보고속도로에 접속하지는 못했지만 몇 년 후에는 그것도 가능해지겠지요?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버스 안에 무선인터넷이 없어 정보고속도로에 접속하지는 못했지만 몇 년 후에는 그것도 가능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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