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조회 시간, 교감이 일어나더니 목소리를 높인다.
"요즘 전교조에서 서명을 받고 있답니다. 5.18 관련 서명이라는데, 교사가 정치적인 일에 휘말리면 안됩니다. 서명이야 개인이 하는 거지만, 그것 때문에 학교를 곤란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그 말을 듣고 나는 피식 웃는다. 그래도 많이 부드러워졌군. 옛날 같으면 은밀히 서명자를 내사하여 하나씩 교장실로 불러들이고, 서명 취소 각서를 받고, 그것도 안 되는 사람은 징계를 하고... 직원회의 시간에 엄포와 공갈을 일삼을텐데, 그런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도 기분은 찝찝하다.
4교시, 수업이 빈 시간에 교장이 부른단다. 교장실에 들어서자 자리를 권하고, 이런저런 말끝에 본론이 나온다.
"맹 선생, 이번에도 서명했지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피시식 웃는다.
"또 했군요. 그럴 줄 알았지. 맹 선생 서명하는 건 좋은데, 제발 다른 선생들은 끌어들이지 말아요. 괜히 곤란해지니까."
"글쎄요. 서명이야 개인이 의지를 가지고 하는 거지, 누가 권한다고 싫은 걸 할 수야 없는 것 아니겠어요.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닌데."
내가 토를 달자, 교장의 눈꼬리가 올라간다.
"인간적인 관계 때문에 억지로 서명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지난 번처럼 괜히 서명해서 징계 먹지 말고 몸 좀 사려요."
나는 교장실을 나오면서 또 한 번 피식 웃음을 머금고 만다. 세월이 지나도 관리자의 의식은 요지부동이다.
지난번 교육환경 개선 서명을 했다가 교육청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던 기억도 떠오른다. 교육환경을 개선하자는 말이야 누구든 할 수 있지만, 집단 행동은 불법이라며 경고장을 내밀기도 하고, 어떤 선생은 전교조 지회 주최 합창대회에, 그것도 학생이 아니라 교사 자신이, 참여했다는 이유로 경고처분을 받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교육 현실이다.
내 인사기록 카드에 적혀 있는 몇 건의 징계 기록이 어쩌면 내 교직 삶의 흔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기분도 영 찝찝하고 해서 퇴근 무렵 친한 몇몇을 선동(?)하여 소주집에 들른다. 단연 이야기의 주제는 서명 건이다. 모두들 이제는 서명 정도에 별 부담조차 없다는 투다. 술이 서너 순배 돌고, 술자리가 점점 무르익어 가는데, 말뚝이가 갑자기 문을 휙 열고 들어선다.
우리도 놀랐지만, 말뚝이도 깜짝 놀라는 것을 보아하니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들어오는 참인 것 같다.
"어, 여기 다들 웬일이야."
"부장님은 웬일이세요?"
"응, 이 선생이 여기 있는가 해서 와봤지."
이 선생과 늘 퇴근무렵이면 어울려 이 술집 저 술집을 순례하는 것이 말뚝이의 일과 중 하나라, 오늘도 서로 약속을 하지는 않았지만, 학교 근처 술집 중 한 군데 있으리라 짐작하고 찾아다니는 중인가보다.
"이왕 오신 거 여기서 한 잔 하시죠."
박 선생이 술잔을 건네자, 말뚝이 옳타꾸나 하는 표정으로 빈자리에 냉큼 앉는다.
소주잔을 받아 한 입에 톡톡톡 털어넣는다. 목울대가 움씰움씰댄다. 하, 저렇게 맛나게 술 먹는 것도 재주는 재주야, 그런 생각이 들 만큼 그는 입맛에 붙게 술을 마신다. 평소에도 붉으죽죽하던 얼굴이 소주 한 잔을 마시자 더 붉어지는 것 같다.
술잔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이야기는 점점 무르익어가는데, 평소에 얼굴 붉히며 아웅다웅하는 사이지만, 말뚝이는 한 마디도 빠지지 않고 잘 어울린다. 너무 잘 어울려서 더 얄밉게 보인다. 대단한 처세술이다. 나처럼 싫고 좋고가 얼굴에 금방 드러나는 사람은 속을 내보이기 쉽다. 하지만 그는 온갖 자리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속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또한 제 잇속은 분명하게 챙긴다.
아마 저 사람 선생이 아니라 장사나 사업 체질일 거야. 하지만 어디 선생이 사업가인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인데, 권모와 술수가 통해서는 안되지. 헌데 그게 또 통하는 게 교직이니 문제인 거야.
언젠가 원로교사인 사회과 임 선생님이 한 말이 귓가를 맴돈다.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술맛도 모르고 자꾸 잔을 입에 가져간다.
"맹 선생, 이번에 서명했지?"
몇 순배 술이 돌자 말뚝이가 불콰해진 얼굴을 내 가까이에 들이밀며 술 냄새 풍기는 입을 연다.
"서명이요? 무슨 서명이요?"
내가 시치미를 뗀다. 그러나 말뚝이는 빙그레 웃으며 내게 술잔을 내밀고는 또 한 마디 한다.
"다 아는데 뭘 그래. 광주사태 건 말야. 우리 학교에도 여러 명 있다면서."
"아 그런 걸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묻고 그럽니꺼. 서명이야 하고 싶으면 하고 아니면 마는 거지."
체육과 박 선생이 우렁우렁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자 말뚝이는 두 손을 내젓는다.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지난 번 맹 선생이 교육환경개선 서명을 했을 때야 그게 교육적인 문제고 또 교육청이나 교장선생도 관심이 지대해서 경고장을 받은 거지만..."
한참 말을 길게 늘어놓을 기세인지, 말뚝이가 그쯤에서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단숨에 쭈욱 들이마신다. 모두들 술잔을 들 생각도 않고 말뚝이의 입을 쳐다본다.
"이번에야 어디 교육하고 관계 있는 건가 뭐. 이번 서명은 광주사태 때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명예 회복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거잖아. 그러니 사회적인 문제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서명이야 별 일 있겠어?"
말뚝이가 진지하게 되묻는다. 그 바람에 우리는 그만 피식 웃고 만다.
"아니 그럼 사회적인 것은 되고 교육적인 것은 안 된다 이 말이요? 교사가 오히려 교육적인 것에 대해 더 서명하고 나서고 해야지,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박 선생이 다시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자 말뚝이 두 손을 내젓는다.
"그거야 교육청이나 교장이 난리니까 그런 거고, 사회적인 문제야 사회적인 차원에서 다 해결이 될 거다 그 말이지 뭐. 아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광주사태야 누가 뭐래도 정치권력을 지향하는 군인들이 멀쩡한 양민을 학살한 것 아냐? 그런데 희생자들 보상해주고 복권시키라는 것이 뭐 잘못됐다는 거야? 당연히 서명할 만 하지. 안 그래?"
당연히 보상받고 복권시켜야 한다면서도 말뚝이는 끝까지 광주 항쟁이 아니라 광주 사태다.
모두들 말도 안 되는 말뚝이의 논리에 어이가 없어 술잔만 들이키는데, 갑자기 이상해진 분위기가 스스로도 어색한지 말뚝이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 먼저 갈게. 천천히 마시고들 오라구. 술값은 내가 내고 갈게."
"아니 됐어요. 우리가 낼게요."
"그냥 가세요."
모두들 한마디씩했지만, 말뚝이는 못들은 체 아주머니를 불러 술값을 내고 문 밖으로 몇 걸음 내딛다가 다시 뚜벅뚜벅 우리 쪽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한 마디한다.
"실은 나도 서명했어. 지난 일요일날 고향에 갔다가 말야. 그러니 우린 한 편이라구."
그러고는 다시 뚜벅뚜벅 걸어 술집 밖으로 나가버린다. 우리는 모두 잠시 어안이 벙벙해진다.
그러다 나는 그만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안에 넣었던 소주를 털어낸다.
모두들 갑자기 무슨 일이냐는 표정이다. 나는 한동안 웃다가 숨을 고르고 설명을 한다.
"그러니까 말뚝이 말은 자기도 서명을 했다는 거 야냐. 그 사람 고향이 광주거든. 광주에서야 길거리 서명도 많이 받잖아. 그 사람 광주에 갔다가 길거리에서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서명을 한 거지 뭐. 교사 서명은 신분이 밝혀질테니까 안하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는 출신 지역상 그렇고 하니 길거리 서명으로 대신한 거 아냐."
"아니 그래 놓고 우리보고 같은 편이라고?"
"하긴 안한 것보다는 낫잖아."
"하여튼 대단한 사람이야."
"같은 편이라고 술값도 내고 갔잖아."
"그런데 그런 서명을 광주 영령들이 좋아하기는 할까?"
그날 우리의 술자리 화두는 광주항쟁의 역사의식이었다. 서로 술이 취해 무슨 말인가 떠들기는 했지만, 하여튼 서명도 중요하고, 시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오월 광주를 계기로 각자가 자기가 선 자리에서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문제라고, 그러니 교사인 우리에게는 진정한 광주의 의미를 교육하는 것이 바로 광주항쟁에 대한 우리 몫의 일이 아니겠냐고, 교술적인 말로 결론을 내린 것 같다.
그 뒤 서명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는 '교육적인 것은 안되고, 사회적인 것은 된다'라는 말을 금언처럼 입에 주워담으며 웃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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