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일람표 나오는 날

<교육 장편 소설> 그 집의 기억 21

등록 2002.05.13 10:23수정 2002.05.1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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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시간, 나른한 잠이 막 눈두덩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몸으로 퍼져간다. 천근만근의 무게로 내리누르는 눈꺼풀을 어쩌지 못해 나는 그만 책상에 엎드리고 만다. 대부분의 선생들이 수업중인 5교시라 교무실은 드문드문 앉아 있는 사람들뿐이다. 그들 모두도 나처럼 졸린 표정이 역력하다.

정신을 차려야 6교시 수업을 할 수 있을텐데... 나는 엎드렸던 고개를 쳐들고 시계를 본다. 5교시가 끝나기 10분 전이다. 가서 세수라도 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머리를 둘레둘레 흔들고 막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교무실 문이 벌컥 열리고, 전산 담당 최 선생이 무엇을 들고 들어선다.

"자, 자. 중간고사 성적 일람표 나왔습니다."
시험이 끝난 뒤 며칠 동안 퇴근시간도 넘겨가며 작업을 하더니 드디어 성적 일람표가 나온 모양이다. 성적 처리를 담당하는 전산실 선생은 시험 뒤가 더 바쁘다.

객관식 채점이 끝나면 함께 넘어온 주관식 점수를 합산하고, 개인별 가채점 성적을 학생별로 뽑아 배부해야 한다. 아이들의 성적 확인을 위해서다. 혹시 채점이 잘못된 것이 있으면 수정하라는 의미다. 아이들은 그렇게 가채점으로 나온 성적표를 꼬리표라고 부른다. 종례 시간, 담임들이 꼬리표를 나누어주면 교실은 한바탕 난장판이다.

서로 자기 성적을 보고, 다른 친구 성적은 얼마나 나왔는지 기웃거리거나 아예 꼬리표를 바꾸어 보기까지 한다. 여학생들은 몰래 자기 것만 감추어본다는데, 이 학교 남학생은 성적표에 네 것 내 것이 없다. 이 친구 저 친구 돌려가며 보다가 급기야는 제 것을 잃어버리는 일도 있다.

"내 꼬리표 내놔."
그런 소리가 나면 돌려보던 꼬리표가 분실된 것이 틀림없다. 꼬리표를 통해 성적 확인 및 정정 작업이 끝나면, 이번에는 반별 성적 일람표, 교과별 성적 일람표, 개인별 성적표 따위를 인쇄해야 한다. 그것도 일이 일사천리로 잘 되면 좋지만, 어떤 경우는 인쇄가 거의 끝났는데 그제야 정정을 하러 오는 아이나 선생도 있다. 그러면 아예 처음부터 다시 인쇄를 해야 한다. 과목별 석차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산 담당은 누구나 기피하는 업무였다. 최 선생도 억지로 떠맡아 전산 담당이 되었다. 그러나 늘 웃는 얼굴로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일을 처리했다. 아무리 늦게 성적을 정정하러 오는 아이에게도 그저 "좀 일찍 오지 그랬니?"하는 한 마디만 하면 끝이었다.

성적 일람표를 교무주임 책상에 올려놓는 최 선생의 얼굴이 환하다. 이제 무거운 짐을 벗었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기말고사가 닥칠테고, 또 최 선생의 고생이 눈앞에 선하지만, 사람 좋은 최 선생은 그저 싱글싱글 웃고만 있다.


잠결에 최 선생의 성적 일람표 나왔다는 소릴 들었는지, 몇 선생이 후다닥 일어선다. 의자 밀리는 소리가 울리고, 슬리퍼 소리를 급하게 내며 그 선생들이 교무주임 책상으로 달려든다. 그리고는 자기 반 성적을 찾아 뒤적이고, 다른 반 성적과 비교한다.

그때 수업 끝나는 종이 울린다. 잠시 후 수업에서 나온 선생들이 우르르 교무부장 책상으로 달려든다. 서로 성적 일람표를 뒤적이며 목청을 높인다.
"이거 우리 반 성적이 이게 뭐야. 이놈들을 그냥..."
성적이 좋지 않은 반 선생의 말이다.
"허, 이 녀석들 봐라. 그래도 담임 체면은 살려주네."
상위권에 속한 반의 담임.
"야, 오 선생 반이 일등이네, 일등. 한턱 내야겠는데."
"어, 그래. 오 선생 좋겠네. 우리 반은 영 글렀어. 학기초부터 분위기가 안 좋더니...."
"우리 반 영어 평균이 왜 이렇게 낮아?"
"그거야 다 담임이 빽빽이를 너무 시킨 탓이지. 애들이 질려서 시험 공부나 제대로 하겠어?"
말, 말, 말들이 성적 일람표에 집중된다. 그런 선생들의 표정이 꼬리표를 받고 떠드는 아이들과 비슷하다.


그리고 다음 날, 직원회의 시간, 교장은 학과에 따라 반별 평균 차이가 너무 난다며, 이십 점 이상 차이나는 과목은 교장실로 교사들을 부르겠다고 한다.
"치, 가르치기는 똑같이 가르쳤는데 애들이 공부를 안 하는 걸 어떻게 책임지란 말이야."
어느 선생이 그렇게 볼 멘 소리를 해보지만, 그저 입안에 맴도는 소리일 뿐이다.

그리고 성적 일람표로 일어난 말(言)들의 소동은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사라진다. 다시 수업 시간에 아이들은 졸기 시작하고, 선생은 몽둥이로 교탁을 탕탕 친다. 꼬리표를 받고 왁자지껄하던 교실의 아이들과 성적 일람표를 보고 난리던 선생들의 얼굴이 슬금슬금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대한민국 중학교 성적 소동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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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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