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어느 날, 아이들이 운동복 차림으로 등교한다. 그렇다고 운동회 날도 아니다. 신주머니만 털럭거리며 등교하는 아이들이 오늘따라 경쾌해 보인다. 몇 녀석은 아침부터 학교 앞 가게에 들러붙어 하드를 쭉쭉 빨고 있다. 시작 종이 길게 울리자 그제야 느릿느릿 제 교실로 들어가는 아이들은 수업 부담이 없는 탓인지 오히려 안정감 있어 보인다.
신체검사를 하는 날이다. 아침 조회시간, 체육부장이 이것저것 길게 설명을 해댔지만, 모두들 건성이다. 오전만 빨리 검사를 끝내면 오후는 자유로운 날이니 모두들 마음이 들떠 있을 법도 하다.
내가 맡은 검사 종목은 청력이다. 시력검사보다는 빨리 끝나겠구나하는 생각으로 첫 번째 교실로 향한다. 말발굽처럼 생긴 노리굽쇠와 그 굽쇠를 칠 수 있는 쇠막대기 하나가 내 장비다.
먼저 일반에 들어가니 교실이 난장판이다. 책상을 뒤로 밀어놓았고, 아이들은 대부분 밀어놓은 책상 위에 걸터앉아 있다. 아침에 사온 빵을 우물거리고 있는 녀석, 무슨 일인지 서로 멱살을 잡고 있는 녀석에, 그 와중에도 기특하게 책을 꺼내놓고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는 녀석도 있다.
선생이 들어온 것도 모르는 눈치다.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다.
"전체, 차렷."
나는 뱃속에서 솟아오르는 목소리로 냅다 한마디 내지른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교실을 쩌렁쩌렁 울리지 않는다. 억지로 세상에 나온 팔삭동이 울음마냥 목에 푹 잠겨 겨우 갈라터진 소리를 낼 뿐이다. 그런 내 목소리가 이상했는지, 앞자리의 몇 녀석이 키득거린다.
나는 다시 목을 가다듬고 소리친다.
"모두 제자리에."
그래도 아이들은 들은 체 만 체다. 그런 내가 안쓰러운지, 반장이 뒤편 책상 위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 지른다.
"차렷!"
목소리가 우렁우렁하다. 그제야 아이들이 소란을 멈춘다.
선생보다 반장이 낫다니까. 나는 씁쓸해 하며 입을 연다.
"번호순으로 나와 청력 검사를 받는다. 반장, 부반장은 나와서 건강기록부에 기록을 하도록. 나머지 학생들은 조용히 차례를 기다려라. 시끄럽게 하면 검사를 할 수가 없으니까 그만큼 늦게 끝나는 거다. 알았지?"
"예."
아이들이 입을 모아 대답한다. 그렇지만 잠시 후면 또 소란스러워질 게 뻔하다. 나는 우선 일 번부터 앞으로 불러낸다.
키가 작아 초등학교 삼 학년 정도 돼 보이는 일 번이 교탁 앞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교실 뒤쪽을 바라본다. 나는 녀석의 뒤에 서서 주의를 준다.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 그냥 들리는 쪽 손을 들어라."
나는 노리굽쇠를 막대기로 툭 쳐 녀석의 왼쪽 귀 가까이에 가져다 댄다. 녀석이 왼 손을 번쩍 든다.
이번에는 오른쪽에 댄다. 녀석이 오른쪽 손을 치켜든다.
"정상."
나는 반장과 부반장을 향해 소리친다. 내 말에 두 녀석은 군인이라도 된 듯 "정상"하고 복창을 하며 건강기록부에 적는다.
다음 번호가 나와 자리에 앉는다. 이번에는 오른쪽부터다. 역시 정상이다. 열 명 남짓 검사가 끝나자 교실이 조금씩 소란해지기 시작한다. 그 소음 때문인지 검사를 받으러 나온 녀석이 노리굽쇠를 가져다 대도 별 반응이 없다. 나는 할 수 없이 또 소리를 지른다.
"이 녀석들, 조용히 못해! 청력 검사는 시끄러우면 안되잖아."
다시 교실이 조용해진다. 또 여나믄 명 검사를 무사히 마친다. 잘 안 들리는 듯한 녀석에게는 조금 세게 노리굽쇠를 쳐댄다. 이게 무슨 청력 검사람, 하는 생각이 든다. 겨우 노리굽쇠 쳐서 소리를 듣게 하고 정상이니 비정상을 판별하다니. 치는 사람의 강도에 따라 소리의 크기가 달라질텐데, 요즘 아이들에게 흔하다는 가는 귀 먹은 것은 찾아낼 수도 없지 않은가.
워크맨을 끼고 사는 아이들이라 작은 소리는 잘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검사 받는 아이들은 모두 정상이다. 아무리 귀가 어두워도 노리굽쇠에서 나는 '웅'하는 소리 정도는 다 들을 줄 알기 때문이다. 그 정도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농아에 가깝지 않을까.
형식적인 검사가 절반 넘게 지나간다. 검사를 하는 나도, 받는 아이들도 모두 심드렁하다.
"다음 번호."
"예."
얼굴에 여드름이 덕지덕지 한 녀석이 변성기인지 쉰 목소리로 대답을 하며 튀어나온다. 그 목소리가 우스웠는지 몇 녀석이 킥킥댄다. 나는 으레 하던 대로 노리굽쇠를 쳐 녀석의 오른쪽 귀 가까이에 가져다댄다. 당연히 녀석이 오른 손을 번쩍 들리라 기대하고 있는데 녀석이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해댄다.
"안, 들려요."
'안'이라는 소리를 끊어서, '들려요'는 바짝 붙여서 이상한 소리를 낸 것이다. 오른 손을 귀에 가져다대며,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인 채 녀석이 갑자기 안 들린다는 게 아닌가. 게다가 목소리는 아까 대답할 때의 쉰 목소리가 아니라 일부러 꾸며 낸 듯 여자 목소리처럼 가늘고 길다.
나는 이번에는 왼쪽 귀에 노리굽쇠를 쳐 갖다 낸다.
그러자 이번에는 녀석이 왼손을 귀에 가져다 대며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입을 연다.
"안, 들려요."
역시 가늘고 긴 여자 목소리다. 아, 이 녀석 봐라. 안 들린다는 녀석이 내가 노리굽쇠를 가져다 댄 것은 어떻게 알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좀 세게 노리굽쇠를 쳐 녀석의 왼쪽 귀 가까이에 댄다. 그러자 녀석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역시 여자 목소리를 낸다.
"아, 아름다워라."
녀석의 말에 아이들 모두가 자지러진다. 책상을 부서져라 내리치며 웃고, 아예 데굴데굴 구르는 녀석도 있다. 교실에 서 있던 녀석들은 허리를 움켜쥔 채 겅중겅중 뛰기도 한다.
"?"
나는 어안이 벙벙하다.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묻자 반장이 아직도 웃음 끝을 맺지 못한 채 겨우겨우 대답한다.
보청기 광고란다. 귀가 어두운 아가씨가 자기 뒤로 지나가는 기차 소리를 듣지 못해서 귀에 손을 가져다 댄 채 "안 들려요.", "안 들려요"하다가 보청기를 끼고 나서는 얼굴을 환하게 빛내며 "아, 아름다워라"하는 광고를 녀석이 그대로 흉내낸 것이란다. 촌스러운 광고라 아이들이 대개 기억하고 있는 것인데, 검사를 받는 녀석이 그 흉내를 그대로 냈으니 자지러지는 것도 당연하리라.
그럭저럭 다섯 반 검사를 마치고 나니 오전이 훌떡 지나간다. 형식적인 검사로 하루를 소비해 버리면서, 아이들의 신체에 대한 통계는 또 신문에 영양 상태가 좋아졌느니 어쩌느니 하며 보도될 것이다. 형식적 검사의 통계를 보도자료로 돌릴 테고, 그 형식이 우리나라 중학교 아이들의 신체발달의 가시적 결과물로 나타날 테니, 첨단의 시설로 올바로 아이들의 신체를 검사할 날이 과연 우리에게 오기는 올 것인가.
그래도 지루한 검사를 '아, 아름다워라'하고 눙칠 수 있는 여유가 있으니 전혀 쓸데없는 일은 아니겠지, 하는 자조적인 웃음을 씹으며, 유월 어느 날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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