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담

<교육장편소설> 그 집의 기억 23

등록 2002.05.20 10:49수정 2002.05.20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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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가까워지자 아이들이 자주 담을 넘기 시작한다. 점심시간, 떢볶이를 사먹기 위해 담을 넘는다. 학교 담장 위 철망이 처진 곳을 아슬아슬하게 뛰어넘어 아이들은 학교 근처 분식집에서 떢볶이를 먹고 들어온다. 김밥에 맛을 들이기도 하고 몇몇 녀석들은 아예 당구장에 가서 한 게임 하고 들어오기도 한다.

오동나무 잎은 점점 손바닥을 넓혀가고, 화단 가득 여름이 다가오고 있는데, 아이들은 담을 넘는다. 마치 거기 넘지 않으면 안될 무엇이라도 있는 것처럼 뛰어넘는다.

아무리 학생부 교사가 지키고 있어도 아이들에게 그런 감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감시하는 교사 수보다 넘으려는 아이들이 더 많으므로. 담장은 길고 교사는 적으므로.

아이들이 담을 넘어가는 곳은 분식집이나 당구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쩌면 답답한 일상의 벽을 뛰어넘어 세상 속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맑은 날이나 흐린 날이나, 심지어 비오는 날까지도 아이들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학교라는 억압의 울타리를 넘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둘러보고 온다.

월담하는 아이들이 많다고, 담임 선생님들께서 제발 지도 좀 해달라고, 앞으로는 걸리면 유기정학에 처하겠다고 학생부장은 입에 침을 튀기며 열을 올리지만 그래도 날마다 아이들은 담을 넘는다.

나는 계단 귀퉁이 창에 기대어 아이들이 넘어가는 통로를 내려다본다. 막 점심시간이 시작되었고,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내려가다 문득 날마다 반복되는 이 길고 지루한 삶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자, 갑자기 발걸음이 천근보다 무거워진다. 가슴도 턱 막혀온다.


창에 기대어 한숨을 훅 내쉬는데, 한 녀석이 미끄러지듯 담에 붙어서는 게 보인다. 녀석은 사방을 둘레둘레 살펴보더니 익숙한 몸짓으로 담 윗부분에 손을 턱 올려놓는다. 발을 한 번 굴렀다 싶은데 어느새 녀석의 몸은 담 위로 솟구쳐 있다. 겨우 몸이 하나 빠져나갈 듯싶은 담장 위 철망으로 스스르 빠져나간 녀석은 유유히 바깥쪽으로 내려선다. 얼굴에 씨익 웃음까지 머금고 있다.

갑자기 내 마음 한 구석이 환하게 밝아온다. 저렇게 아름답게 세상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다니. 그 아이가 학교 밖의 어디에 가더라도 나는 그 길이 밝고 넓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지 못한 세상의 길을 아이는 새의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가 버린 것이다. 답답한 일상에 갇혀 한숨만 내쉬고 있는 내게, 세상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다가설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가 사라진 담장 위로 구름 그림자가 슬쩍 지나친다. 나도 문득 저 담을 넘어 세상 속으로 스며들고 싶다. 물 흐르듯, 햇살 비치듯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저 담을 넘어 아이처럼 떡볶이집이나 김밥집에 찾아가 해맑은 얼굴로 세상의 점심을 한 끼 먹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처럼 날렵하지 못하고, 그 아이처럼 순수하지도 못하다. 세상으로 스며들기에는 발목을 잡는 것들이 많다. 다시는 그 아이와 같은 시절로 돌아갈 수 없으니, 당연히 이것저것 재지 않고 세상에 섞여들 수도 없으리라.

망연한 심정으로 담장만 바라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대여섯 녀석이 담장에 들러붙는다. 막 몸을 솟구치려는데 갑자기 벽력같은 소리가 들린다.

"이 녀석들 거기 못서!"
학생부장 목소리다. 이어 아이들 팔뚝만한 몽둥이가 담장에 거의 올라간 아이들의 엉덩이를 향해 날아든다. 못다 핀 꽃 지듯 아이들 후둑후둑 담장에서 떨어진다. 학생부장이 그런 아이들을 담장 밑에 꿇어앉힌다.

이제 운동장 쪽에서 날아온 먼지로 학교 전체가 자욱해진다. 점심시간이 한 십분 남짓 흐른 것이다. 교실에서 달려나온 아이들이 운동장을 가득 채우고, 그 아이들이 일으키는 먼지로 학교가 소란해지는 것이다. 담 밑에 손들고 일렬 횡대로 꿇어앉은 아이들 머리 위로도 먼지가 자욱하다.

나는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계단을 내려가는 대로 아이들이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아이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손들고 꿇어앉아 있는데 내 시야에서는 없어진 것이다. 그런 것이리라, 학교는. 있는 것도 보아야 보이고, 보지 않으면 있어도 없는 것이 된다. 나는 아까 유유하게 세상으로 빠져나간 녀석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마음 구석에 접어둔다. 보아도 못본 체 하는 것이 아름다울 때도 있는 법이다.

교무실에 들어서자 학생부장이 한바탕 소란이다. 아이들이 또 월담을 하는데 담임은 제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어쩌냐고, 담임 업무 태만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아이들이 왜 담을 뛰어넘겠어? 학교가 교도소 같으니까 탈출하는 거라구. 갇혀 있으면 탈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 탈출할 꿈도 꾸지 않는 사람한테 자유는 없는 거야.

나는 그런 말을 속에만 담아둔 채 자리에 풀썩 주저앉는다. 유월 어느 하루 점심시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한 영혼이 세상 속으로 슬며시 자리잡은 줄도 모른 채.

그 아이는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학교로 돌아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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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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