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봉(?)인가

<차이나소프트-정치>공자 딜레마 통해 중국 정치상황 파악

등록 2002.05.24 10:16수정 2002.05.30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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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그 사회의 가장 큰 동력이다. 공산 중국에서 정치는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가장 중요한 체계다. 아직 경제나 문화 부분 등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요소는 정치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머리에 둔다. 정치 부분의 작은 이야기는 '공자가 봉(?)' 등을 포함해 11개로 잡았다. 공자는 고대의 위인이자 정치사상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에서도 우리와 같이 유가(儒家)의 정치이념이 절대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은 것이 중국의 상황이다.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 정치이념을 살펴본다. 이후의 주제들도 모두 현대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는 정치요소를 재점검하는 것이다. 현대 정치에서 아이러니한 삶을 산 장궈다오(張國燾)나 린비아오(林彪) 등의 삶도 그런 의미에서 점검할 만하다. 최근에 화궈펑(華國峰) 등의 공산당 자진탈당으로 말해주는 중국 내 정치이념의 혼란까지도 다룬다.

공자가 봉(?)

산둥(山東)성 취푸(曲阜)는 공자(孔子)의 고향이자 공자가 죽어서 묻힌 곳이다. 공자가 묻힌 그곳은 거대한 성역이 되어 공림, 공묘, 공부 등으로 나누어져 공자가 영향력을 말해준다. 특히 공자의 사당인 대성전(大成殿)은 중국 타이산 대묘(岱廟), 고궁 태화전(太和殿)과 더불어 3대 전각중에 하나다.

10월 말이면 공자를 모신 축제가 벌어지는 이곳은 언제나 양지였던 것은 아니다. 중국 근대 사상의 아버지 루쉰(魯迅)은 공자를 혹독히 비판했다. 그는 역작 '광인일기'를 통해 "역사책에는 연대가 없고 어느 페이지에나 '인의도덕'(仁義道德)이라는 몇 글자가 비스듬하게 씌어 있었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고 해서, 한밤중까지 자세히 들여다보았는데, 그러자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또 다른 글자가 보였다. 책에 가득 씌어져 있는 두 글자는 '식인'(食人)이었다!"(전형준 역)라며 유교의 허위의식을 비꼰다.


루쉰은 또 노자(老子)의 한 순간을 담은 '관문 밖으로'를 통해 노자사상의 가치를 더 높게 산다. 바로 공자의 사상이 위정자들의 사상의 기초가 되어 백성들 앞에 군림하는 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공자는 이후에 다시 몇 차례의 위기를 맞는다. 물론 역사상 끊임없이 오간 논쟁은 배제한다. 바로 1966년부터 76년까지 10년간 중국 대륙을 휩쓴 문화대혁명도 공자에게는 큰 위기였다.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이 있기 때문이다.


초반기 문혁의 중심세력이었다가 자신의 정치적 세력이 무너지려하자 린비아오는 마오쩌둥을 암살하기 위해 세력을 모았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는 결국 군용제트기로 소련으로 망명하려 하지만 몽골에서 추락해 사망한다.

린비아오(林彪)의 사망후 유가의 대표인 공자는 같이 비판을 받는다. 공자의 주요 말씀 중에 하나인 '극기복례(克己復禮)'는 노예제도를 복귀시키려는 것으로 린비아오의 '반혁명수정주의 노선'과 핵을 같이 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린비아오의 철학 역시 '지주·자산계급의 전제(專制)'를 복귀시키려는 것이라고 공격하였던 운동이다.

이런 흔적은 공산 중국의 철학적 기초인 린제유(任繼愈) 편의 '중국철학사'에 간명하게 나타난다. 1973년에 펴낸 이 책에서 유물론적 체계를 세우기 좋은 도가(道家)와 달리 유가(儒家)는 유심론(唯心論)적인 요소가 풍부하다며 호되게 비판한다. 당시에 유가의 권위 자체는 인정되지만 공자, 맹자보다는 혁명의 정당성을 처음으로 표출한 동중서(董仲舒)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그리고 유가사상의 적통이라는 현대 한국에서도 호되게 비판받고 있다.

그렇다고 중국 역사에서 공자가 홀대받은 것은 아니다. 후한(後漢) 시대 이후 위정자들의 대다수는 유가이념을 통치의 중심으로 삼았다. 문혁 당시 비판받듯이 공자의 노선은 "노예소유주의 이익을 대변하여 노예제의 사상적 지주인 천명론(天命論 하늘이 왕을 내린다는 것)을 극력 옹호하고 노예소유주 계급의 '禮'와 '仁'을 선양"(린제유 판 '중국철학사' 일부)했기 때문이다.

이는 순자(筍子)나 한비자(韓非子)에게 비판을 받았다. 또 전제 왕권이 몰락하는 정권 말기에 봉기한 황건적의 난, 황소의 난, 태평천국의 난 등 도가(道家)사상을 토대로 한 체제 전복세력에게 문약한 유가는 항상 비판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의 전래는 유가에게도 힘이 됐다. 불교의 유심론을 수혈받은 유가는 남북조(南北朝) 수(隋), 당(唐)대에 중심사상이 됐다. 또 송(宋), 명(明)은 물론이고 주변 민족의 중원을 장악한 원(元), 청(淸)시대에도 유교는 중심이념이 됐다.

물론 각 시대 후반에 도가 사상이 부흥하기는 했지만 공자가 꼭 홀대받았던 것은 아니다. 공자가 가장 힘든 시기는 근대 이후다. 서구에 끊임없이 위협받던 당시 중국 내부에서도 약한 중국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고, 그것을 유학한 유가사상에서 찾았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루쉰이나 비린비공운동에서 표출된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사상 수용에 관해 이분법적인 사고는 위험하다. 톈진사회과학원에서 중국 문화와 기업관리를 연구하는 동쓰타이(董四代)는 "중국은 철저하게 유가, 불가, 도가의 사상을 결합하면서 살아왔지 결코 한 사상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당(唐)대에는 유가, 불가, 도가가 철저히 골고루 안배되면서 혼란한 시기지만 가장 아름다운 문화의 꽃이 피어났다고 말한다. 공자가 가장 비판받았던 '비린비공' 시대 역시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대여서 빚어진 복잡한 사태일 뿐, 결코 중국내부에서 유가를 일방적으로 매도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지금도 각 기업의 문화를 보면 불교를 기업문화로 한 슈앙싱(雙星)이나 유교를 기업문화로 삼은 창홍(長虹) 등이 각기 번성하듯이 중국 문화는 종교간에 배타적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유교는 우리 피속에 있는 하나의 중요한 성분인데 그것을 버릴 수도 없지만 버려할 이유도 없다"고 말한다.

중국 사상사에서 특징은 종교간의 철저한 융화다. 유가는 불교가 들어온 이후 내심수행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킴으로써 종교간에 융합을 꾀했다. 그러면서도 민중의 힘에 대한 인식도 강하게 했다. '水能載舟 水亦可覆舟(물은 배가 흘러가도록도 하지만, 또한 물은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라고 해서 물과 같은 백성의 힘을 중시했다.

중국인의 종교간에 융화는 어디서나 쉽게 느낄 수 있다. 공자의 고향인 취푸에서 한 시간 거리이자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로 우리에게 친숙한 타이산(泰山). 공자도 타이산을 수차례 올랐지만 타이산이 유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타이산의 입구에 있는 다이먀오(岱廟)는 중국 3대 전각중에 하나로, 이는 중국 5악(五岳)의 하나인 동악(東岳) 태산의 산에게 황제들이 제사지내는 곳이다. 황제들이 하던 봉선(封禪)은 도가 문화의 유산이다. 산신(山神)을 숭배하는 것은 도교에서만 있는 전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이산이 도가만의 유산은 아니다. 타이산을 걸어올라가다 보면 중국 사상의 총체를 만날 수 있다.

초입에서는 공자가 타이산에 오른 것을 기념하는 공자등림처(孔子登臨處)가 있고, 이후에 만나는 일천문(一天門), 중천문(中天門), 남천문(南天門)을 비롯해 타이산 정상에 있는 옥황정(玉皇頂)은 도가문화의 유산이다. 특히 옥황정은 옥황상제를 모신 곳으로 복을 기원하면서 향을 태우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타이산은 도가의 흔적이 많지만 유가나 불가의 흔적도 적지 않다. 정상 아래에는 공자묘(孔子廟)가 있어 유가의 침입을 무덤덤하게 생각한다. 또 중국에서 손꼽히는 사찰인 링옌스(靈岩寺)나 뽀자오스(普照寺)가 있어 불교에 배타적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흔적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서유기(西遊記) 등 중국 고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유기는 불가를 중심으로 도가, 유가가 모두 합치되어 있다. 명(明)대 오승은(吳承恩)의 작품인 서유기는 대당(大唐) 황제의 칙명으로 불전을 구하러 인도에 가는 현장삼장(玄裝三藏)과 일행의 이야기다.

서유기는 우선 불전을 구하러가는 현장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불가적인 색채를 띠지만 손오공으로 표출되는 이야기는 대부분 도가이야기다. 옥황상제는 도가의 절대신이고, 손오공이 먹는 천도 복숭아 등도 도가사상의 산물이다. 또 현장이 황제의 명을 받아 떠난다는 점에서 유가의 군신관계가 담겨져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이런 종교의 복합관계는 중국 문화 대부분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산사에 산신전(山神殿) 등 샤머니즘적 요소가 있다지만 중국 절이나 사당의 경우 그런 흔적이 더욱 짙다. 대부분의 사묘(寺廟에)에는 불가와 도가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근대 이후 공자의 사상은 몇 차례의 홍역을 치렀다. 하지만 이는 어떤 변화나 계몽운동과 더불어 구호화된 측면이 강하다. 중국 역사에서 어떤 사상이 절대적으로 득세한 것도 없고, 더욱이 배타적인 적도 드물다. 모든 사상을 결합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요소를 축출해 앞에 세우고 다른 것을 곁가지로 세우는 것이 중국 문화의 과정이다.

따라서 공자도 비판적인 입장에서 앞에 세워진 적이 있지만 그가 절대적으로 부정되지는 않았다. 현대에 들어 공자는 수십만에 달하는 취푸와 주변 지역을 먹여 살리는 역할을 한다. 공자의 유산이 바로 관광자원이기 때문이다. 2500년 전 태어난 공자가 이제 중국인들에게 돈을 벌어 주는 진짜 봉(?)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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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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