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 인간의 부친 또한 집념이라는 면에서 보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이라고 나는 기꺼이 진술할 수가 있다.
인류의 건강을 지켜줄 식품 개발에 20년 세월을 바친 그의 아들과는 또다른 방면에서 그 분은 오늘도 법정에서 여든 살 넘은 노익장을 과시하고 계시다.
그 분의 며느리, 그러니까 실험실 인간의 아내가 삶의 신산스러움을 골고루 맛보다 뜻하지 않게 세상을 하직하였을 때 나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 가운데 하나였기에 3일장이 치러지는 과정을 줄곧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러모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아들 부부와는 떨어져 살고 계시던 시아버지는 리어카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골목 어귀에서부터 대성통곡으로 며느리의 운명을 슬퍼하여 마지 않았다.
"아이구 원통허다, 쪼금만 참으면 될 것을, 고생만 하다가, 아이구 원통하다, 인자 다 됐는디, 쪼금만 참으면 재판 이기구, 땅도 찾구, 한데 모여서 살 수가 있는디, 아이구 절통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아이구 며늘아 불쌍해서 어떡허냐……"
지금도 그 광경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허리가 굽어 꼬부랑 할머니가 된 동갑내기 아내와는 달리 190센티미터나 되는 키에 대꼬챙이처럼 깡마르면서도 정정한 그 분이 좁은 골목 어귀를 울부짖으며 달려 들어와 평생 착하디 착하였으되 고생을 면할 수 없었던 며느리를 애통해 하던 장면들….
녹슨 철대문을 밀쳐버리고 대문에 붙어 있다시피 한 좁은 현관을 신발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들어와 병풍에 가려진 며느리를 향해 무뤂을 치며 두 눈에 굵은 눈물을 비오듯 쏟아내던 광경이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의 마음을 아리게 만들고 있다.
그로부터 7년여가 지나버렸다. 그러나 땅을 찾기 위한 그 분의 법정 투쟁은 줄잡아 17년이 지난 오늘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변호사도 없이 수원지방법원의 명물 아닌 명물이 되어 오늘도 그 분은 법전과 판례문을 샅샅이 검토하면서 양심을 속이고 돈의 노예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는 판사와 변호사들을 향해 법정 일갈을 서슴지 않으면서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 분을 이름하여 법정 인간이라고 했다. 실험실 인간과 법정 인간, 이 기막힌 인간극 앞에서 나는 내가 살아가는 한국이라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날마다 눈부신 체험을 하고 있다. 돈이 없어 변호사를 댈 수 없으면 두 눈 다 뜨고도 땅을 빼앗기고 되찾을 수도 없다. 천신만고 끝에 승소를 해도 그 사이에 땅은 또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 버리고 이제 또다른 기나긴 법정 투쟁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 실제로 그 법정 인간께 그런 일이 일어났음을 나는 보았다.
'왜정(倭政)'때 받은 보통학교 교육밖에는 달리 제도교육을 받은 일이 없으신 우리의 법정인간께서 나와의 대화 때마다 습관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다.
"왜놈 판사는 말여, 자기는 천황을 대신해서 판결을 내린다고 생각한단 말여, 그러니 한 치도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생길 래야 생길 수가 읎지, 암 읎구 말구."
그럴 리가 있나. 일본도 사람 사는 세상인데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을 수가 있나. 그러나 내가 지켜 본 법정 인간의 기나긴 싸움은 한국이라는 곳이 법률적 정의를 쉽게 따질 수 없는 곳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주었다.
이제 그 분은 여든을 훌쩍 지나 연세 아흔에 이르고 있다. 승소를 하여 땅을 되찾는다고 해도 그 분이 누릴 지복은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그 분은 당신의 피붙이들을 이하여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실로 그분들의 자식들은 재판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지 오래이다.
문학을 한다는 핑계로서 나 역시 우리의 법정인간의 싸움을 먼 발치서 지켜보기나 할 뿐 이렇다 하게 관여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소송을 처리하는 법원의 방식에 대해서는 이제 알 만큼 안 것 같다.
순진한 젊은이들과 소수의 어른들은 그래도 정의라든가 개혁이라든가 하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나의 경우라면 어떨까. 나 역시 그런 것들은 실현되어야 하고 추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이 쉽게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은 오래 전에 버렸다. 나는 스스로도 한 구성부분이 되어 있는 이 세상을 견디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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