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밟힌 선거연락사무소 짓밟힌 발전산업노동자

등록 2002.05.30 17:50수정 2002.05.30 18:47
0
원고료로 응원
월드컵이 만들어낸 준비된 폭력

월드컵에는 축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월드컵 뒤에는 가려진 우리의 일상이 있다. 어찌 보면 월드컵이란 공차기 이상의 더 큰 환각작용이 있다. 소위 국가적 대사인 월드컵을 잘 치르기 위해서라면 모두가 불편을 감수해야 하고 노점상은 단속되어야 한다. 상암동의 그 많던 판잣집들은 이미 웅장한 메인스타디움으로 변해버렸다. 그래서 월드컵의 이면에는 가려진 우리의 일상이 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사계절 잔디 구장에서 현란한 드리블과 총알 같은 슈팅이 난무할 때 눈물 떨구며 길바닥을 전전하는 사람도 있다.

지난 3월과 4월을 뜨겁게 달구었던 발전노동자들이 무기력한 합의로 직장으로 복귀했지만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엄청난 해고통지서, 재산 차압, 그리고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분열과 투쟁에 대한 회의였다. 그래도 그들 중의 일부는 다시 일어나서 해고를 딛고 발전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이하 발해투)를 결성하고 한국전력과 언제 끝날지 모를 민영화 반대 싸움을 다시 시작했다.

한가지 아이러니는 그 '발해투' 사람들이 농성을 하고자 했던 한국전력의 맞은편에는 바로 IMC(International Media Center)가 있다. 월드컵에 관한 방송, 미디어를 총괄하는 곳이다. '발해투'에게 월드컵은 무슨 의미일까? 아니 월드컵에 가려진 발해투의 일상이 있었고, 그 일상을 침범해 온 것이 월드컵이었다. 한국전력의 맞은편에 있는 IMC가 발해투를 슬프게 만든 하루였다. 월드컵이 만들어낸 준비된 폭력이 있었던 하루였다.

발해투의 기발한 선거운동

그들은 왜 5월 29일 강남구 삼성동 167번지 한국전력본사 앞에 있었을까? 5월 28일 사회당 원용수 선거운동본부 앞으로 한 장의 팩스가 수신되었다. 내용인 즉 5월 29일부터 한국전력 앞에서 천막농성을 할 터인데, 사회당의 강남구 선거연락소가 그 천막이 되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발해투의 기발한 이 선거운동 제안은 사회당 원용수 후보측에 의해서 받아 들여졌고 사회당은 그 즉시 강남구 선거관리위원회에 선거사무소 신청을 냈다. 그리고 강남구 선거관리위원회는 한국전력 앞 그 땅을 선거연락소로 인정해 주었다.

5월 29일 한낮의 긴장 저녁의 폭력


5월 29일 한낮 반대쪽 코엑스(COEX) 건물 앞에는 붉은 악마가 "대·한·민·국"을 외치며 내·외신의 작렬하는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었다. 그 반대편 한국전력 앞에는 발해투와 사회당 원용수 후보가 정부의 말도 안 되는 민영화 정책을 규탄하고 한국전력의 무능한 경영진을 통박하고 있었다. 월드컵이 연출한 이 아이러니는 결국 '재앙'을 부르는 악연이 되고 말았다.

무자비한 폭력 대책 없는 선관위


한국전력 앞마당에 천막이 들어선 시간은 오후 4시, 그 때부터 짧은 하루 긴 폭력이 시작되었다. 전투경찰-한국전력 청원경찰-용역깡패들이 합세한 이 폭력집단은 이날 선거운동에 참가한 50여명이 모두 다치고 1명이 119 구급대에 병원에 실려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후 4시에서부터 밤 12시까지 장장 8시간 한국전력 앞마당은 월드컵 개막을 사흘 앞둔 16강 코리아의 치부로 기억될 것이다. 사회당의 서울시의회 비례대표 후보인 정회진씨는 전투경찰에 의해 목에 심각한 타박상을 입었다. 폭력은 후보자, 여성 누구든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이어졌다.

이날 선거관리위원회는 자신이 허락해준 선거연락사무소에 대해서 무책임으로 일관했다. 선관위의 태도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우리는 책임이 없다' 였다. 경찰이 폭력을 휘두를 때가 되면 선관위 직원은 사라지고 한바탕의 소란이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다시 나타나 "사유지를 점거해서는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5월 30일 이어지는 폭력, 선거법은 왜 있는 것인가?

사회당 원용수 서울시장 후보와 발해투 노동자들은 이날 뜬눈으로 한국전력 앞 인도에서 밤을 세웠다. 아침이 되자 원용수 운동원들과 발해투 노동자들은 한국전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도에 사회당 강남연락사무소 천막을 치려고 시도했다. 경찰은 이번에는 더욱 강력한 폭력으로 나왔고 또 많은 사람들이 병원으로 실려 가야 했다.

경찰과 충돌이 있은 후 경찰관계자는 경찰이 공권력을 투입한 이유는 '도로(인도)를 점유하면 안 된다'는 것이라고 한다. 강남구청에서 이에 대한 협조요청이 왔고 그래서 경찰은 공권력을 투입한 것이라고 했다.

원용수 선거운동본부 집행위원장(허용만)은 이에 대한 사실확인을 위해 강남구청 건설관리과를 찾아가서 담당자에게 '도로 시설 관리과 관련하여 경찰에 공권력 투입을 요청한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으나, 강남구청 건설관리과에서는 '요청한 적 없다'고 대답했다. 결국 경찰은 노골적으로 사회당의 선거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한편 강남구청 건설관리과는 인도에 천막을 설치하는 것과 관련해 '그것과 관련된 권한은 우리에게 있으며, 협의 후 회신 주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경찰은 공권력을 투입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한국전력 내부도 아니고 한국전력 앞 도로를 점유하고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선거연락사무소를 인도에 개설하는 문제는 한국전력과 경찰 누구도 권한이 없는 상황이었다.

경찰, 위법한 공권력행사 밝혀져

결국, 사회당과 발전노동자의 정당한 선거운동을 경찰-한국전력이 짜고 공권력을 투입하여 선거운동을 폭력적으로 저지한 것이다. 사회당은 이미 오늘 오전에 철거된 천막에 개의치 않고 다시 천막을 설치할 것이라고 했다. 이번 사태는 선관위의 선거관리 방기도 한몫했다. 도로위에서 후보자와 선거운동원들이 경찰의 폭력 앞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는데도 그들은 "선관위는 어떠한 책임도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앞으로 사회당과 발해투는 선거기간 내내 노숙투쟁을 할 것이라고 한다. 서울의 가장 부유한 중심에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폭력 사태, 그리고 선거방해 행위는 이 나라가 누구를 위한 나라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선관위가 '합법'이라고 하는 선거운동을 경찰이 나서서 폭력진압하는 나라에 월드컵 가당키나 한 말인가? 월드컵에 가려진 소외된 이들의 일상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할 때다.

덧붙이는 글 | sp.or.kr

덧붙이는 글 sp.or.kr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2. 2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3. 3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4. 4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5. 5 "한달이면 하야" 언급한 명태균에 민주당 "탄핵 폭탄 터졌다" "한달이면 하야" 언급한 명태균에 민주당 "탄핵 폭탄 터졌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