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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종씨는 결혼식 준비 때문에 무척 바쁜 기색이었습니다. 주말이나 금요일 저녁이면 광주를 가곤 했습니다. 서해안고속도로 덕분에 태안에서 광주까지의 거리가 3시간 정도로 단축된 것이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다행일 터였습니다. 비록 광주에서는 결혼식이며 피로연 같은 것을 하지 않을 지라도, 여러 가족과 친지들이 필리핀에 가야 할 터인즉, 그 일을 주선하는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니리라는 것을 나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주말마다 광주를 오가며 바쁘게 살면서도 백남종씨는 매주 화요일 저녁에는 꼭꼭 성당에 오곤 했습니다. 저녁미사에 참례하고, 미사 후의 레지오 모임에도 참석을 하곤 했지요. 내가 단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쁘레시디움 모임에….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레지오 모임 후에 나는 그에게 넌지시 물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피로연두 허질 않으니 축의금두 들어오지 않을 테구…. 지출만 허게 되니께 아무래두 비용 부담이 클 것 같은디…?"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평소처럼 간단 명료한 투로 말한 그는 다음 순간 왠지 조심스러운 기색을 보였습니다. 성당 건물 밖의 어둠 속에서도 나는 그의 그런 기색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께 한가지 고백할 게 있습니다."
내가 한때 지방대학의 문예창작과에 출강했던 이력을 알고 있는 그는 나를 꼭꼭 '교수'라는 호칭으로 불렀습니다. 거기에는 자신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에 대한 예우의 뜻도 포함되어 있을 터였습니다. 나는 또 한번 고마움을 느끼는 가운데서도 '고백'이라는 단어에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저, 사실은 처음 결혼이 아닙니다."
"그려…?"
"그리고 아이도 하나 있습니다."
"그려이잉…?"
"많이 망설이고 갈등하면서도, 교수님께서 필리핀에 가시지 않는다면 이런 실토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필리핀에 가시겠다고 하니…. 교수님께서 필리핀에 가시게 되면 공항에서부터 제 딸아이를 보시겠기에 제가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께 아이는 딸이구먼?"
"예, 그렇습니다."
"그럼, 그 아이가 올해 몇 살이랴?"
"열 한 살, 초등학교 4학년입니다."
"그럼, 초혼을 무척 빨리 혔네잉?"
"예. 좀 철이 없을 때 했습니다."
"철이야 나이허구 꼭 상관이 있는 게 아니지…."
"충격을 드려서 죄송스럽습니다."
"충격은 무슨…."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기도 해서 말의 갈피를 적절히 잡기가 조금은 어려운 상황이었지요. 아빠의 재혼을 열 한 살 딸아이가 어떻게 이해할 지, 아빠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필리핀에 가는 그 아이의 심정은 어떤 것일지, 조금은 난삽하기도 한 궁금증 때문에 나는 괜히 마른침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지요.
"교수님께 이런 실토를 하고 나니, 제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 같습니다."
"나루서는 고마운 마음두 드네. 그건 그렇구, 자네 딸아이가 아빠의 재혼을 좋아허남?"
"예. 아주 좋아합니다. 새엄마를 빨리 보고 싶다고 하면서…."
"그려…? 그럼, 그 아이헌테 제 생모에 대헌 기억은 읎남?"
"다섯 살 때 제 생모와 헤어졌으니까 아마 기억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겄지…. 생모의 모습을 전혀 기억허지 뭇허더라두, 생모 생각을 전혀 안 허구 살 수는 읎을 겨잉?"
"그거야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말인디, 딸아이헌티 미안헌 마음 같은 건 읎남?"
"그런 마음은 기본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흠…!"
"그렇지만, 제가 재혼을 하는 것은 제 딸아이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새엄마가 될 그 필리핀 아가씨는 올해 몇 살이라나?"
"스물 일곱입니다."
"괜찮은 나이구먼."
"저를 비롯해서 세 사람이 모두, 좋은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서로 노력을 해야겠지요."
"하느님께서 잘 돌보아 주실 겨."
"그것을 위해서 제가 오늘도 여기에 있는 거구요."
"좋은 말이구먼. 허허허!"
나는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고, 그와 나의 대화는 좀더 이어졌습니다.
"제가 영세를 받은 날부터 제 딸아이도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려…?"
"지금 열심히 성당에 다니면서 교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저번에 교수님이 제게 주신 성경책도 지금 제 딸아이 손에 있고요."
"그려이잉…? 자네의 신부가 될 그 필리핀 아가씨가 나루서두 되게 고마워지는구먼. 허허허!"
나는 또 한번 유쾌하게 웃고 나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내가 자네의 결혼식 때문에 필리핀에 가기로 헌 것, 증말 잘헌 것 같네. 나두 자네의 새 가정을 위헤 진심으루 열심히 기도허겠네. 늘 지켜보는 마음으루…. 우리 서루 잘헤 보세!"
그는 내 손을 굳게 잡았고, 우리는 다시 한번 뜨겁게 악수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나는 백남종씨로부터 그의 초혼 실패와 관련하는 이야기들을 좀더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가 자진해서 내게 말을 해 준 것은 아니랍니다. 평소 남의 일에도 지나치게 관심하며 궁금증을 안고 살기 좋아하는 내 소갈머리가 미안함을 무릅쓰고 그에게 질문을 하도록 만든 탓이지요.
"결혼 실패의 경우, 원인이나 이유 같은 게 분명히 있을 겨잉? 어떤 잘못이 쌍방에 똑같이 있을 수두 있겄구, 어느 한쪽이 더 클 수두 있겄구…."
"그렇지만 지난 후에 잘잘못을 따진다는 건 무의미한 일이겠지요."
"그럴라나?"
"저의 경우는 양쪽의 잘못이 똑같을 것 같습니다."
"워떻게?"
"저는 직장 관계로 신혼 때부터 여러 객지를 떠돌며 사는 처지였습니다. 그런 관계로 제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이 큽니다."
백남종씨는 고급 엔지니어였고, 그가 종사하는 회사는 발전소의 발전 설비 전문업체였습니다. 즉 발전소의 기계 조립과 설치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의 전문 엔지니어이니, 그는 발전업계의 고급 인력인 셈이었습니다.
화력발전소의 경우, 쉽게 말해 굴뚝 하나에 딸린 발전 기기들을 조립 설치하는 작업은 그 기간만도 1년 6개월이 걸린답니다. 부품의 거개가 수입품들인데, 따로따로 분해되어 오는 그 기기들을 도면을 보면서 하나하나 조립을 해 가지고 자리를 잡아 전체적인 설치를 한답니다. 발전소에 가서 굴뚝 하나에 딸린 그 기기들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참으로 웅장하고도 정교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요. 많은 발전 기기들의 곳곳에 엔지니어 백남종씨의 체취가 어려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백남종씨는 한 발전소 건설 현장에서의 작업이 끝나면 다른 작업 현장으로 삶의 자리를 옮겨야 하는, 말하자면 뜨내기 팔자를 안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회사가 대개는 발전소의 굴뚝을 두 개 정도 맡아 작업을 하므로, 대략 2, 3년 동안을 한 곳에 머문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런 사정에 연유하여 백남종씨는 광주 고향에다가 신혼집을 두고 자신만 홀로 객지 생활을 했답니다. 자주 이사를 다니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거지요. 그러니 주말마다 광주까지 먼길을 다녀야 하는 노고도 크지 않을 수 없었지요.
백남종 씨는 첫 부인과의 이혼이 딸아이를 위해서는 참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말을 내게 했습니다.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잘 가르치기 위해서 이혼을 했노라는 얘기였습니다. 그 한마디 속에 모든 상황이나 사정이 함축되어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지요.
그리고 그는 주변의 친구들이 참으로 중요한 존재라는 평범한 사실을 내게 말해 주었습니다. 어떤 부류의 친구들과 사귀고 교류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질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그때 절실히 체득했다는 것이지요. 이혼한 첫 부인에 관한 말이므로, 그 말에서도 나는 여러 가지 정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가 이혼하기 전부터 할머니 손에서 크다시피 한 백남종씨의 딸 은주는 누가 말해 주지 않았어도 모든 정황을 아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 애 자신도 저 나름대로 사리 판단을 하는 것 같았지요. 일찌감치 스스로 마음의 정리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제게 한 번도 엄마 얘기를 하지 않았지요. 의식적으로 엄마 얘기를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그 아이의 마음과 머리에서 생모라는 존재가 거의 지워진 것 같습니다."
"아이는 그렇다 쳐도, 엄마 쪽엔 아직 문제가 남아 있을 지두 물르는디…."
"서로 소식을 모르고 산 세월이 벌써 오래 돼서, 저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은주가 유치원에 다닐 때 그 사람이 한 번 유치원에 찾아온 적이 있었답니다. 그걸 제 아버지가 보셨지요. 손녀 돌보는 일의 의미를 크게 확대시키고 있는 제 아버지께서 가만히 계셨겠습니까. 크게 야단을 치셨다더군요. 그 후로는 완전히 소식이 끊겼습니다."
나는 그 후 인천공항에서 처음 뵌 백남종씨 아버지의 헌걸스러운 모습에서, 그리고 3박4일 동안 함께 하며 접한 확실하고 과단성 있는 행동들에서 은주의 유치원 시절의 그 일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었지요.
인천공항에서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나는 은주의 모습을 관심 어린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와 만나는 것이 무척 반가웠지요. 은주는 키가 큰 편이었고, 안경을 쓰고 있었고, 몸매는 토실토실한 편이었습니다. 광주에서 올라온 일행 중에서 유일한 어린이인 은주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로부터 귀염도 많이 받는 것 같았습니다.
은주는 무척 밝은 표정이었고, 미구에 만나게 될 새엄마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부풀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런 은주로 하여 백남종씨의 재혼이 그에게 한결 행복감을 안겨 줄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딸 은주로 말미암아 아빠 백남종씨의 재혼이, 그 결혼식 풍경이 한결 아름다워지리라는 확신을 내 가슴에 새길 수 있었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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