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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 갈 준비를 할 때 내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 나라 풍습이 워떤 지는 물르지먼, 신부집에서 마련헌 피로연에 참석허게 되면 축의금을 내야 헐 지두 물러. 신랑 체면을 생각헤서 축의금을 내는 게 좋을 거구…. 그러구 신랑집에두 부조를 좀 허얄 겨. 내 비용 들여서 필리핀까지 가주는 걸루 다 된다구 생각허지 말구, 축의금을 따루 준비헤 갖구 가두룩 혀."
나는 어머니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지요. 봉투 두 개를 준비했습니다. 한자로 '祝 華婚'이라는 글자들이 씌어져 있는 봉투들이었지요. 봉투 하나에는 'KOREA, JIYOHA'라는 영문도 적어놓았지요.
그런데 나는 그 봉투들을 가방 안에 넣는 것을 깜빡 잊고 말았습니다. 그 봉투들을 골방 책상 위에 놓고 온 것을 필리핀에 도착해서야 알았고, 점점 심해지는 내 건망증의 명확한 실체에 그만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필리핀에 도착했을 때 내 수중에는 정확히 미화 100달러와 한화 10만원이 있었습니다. 나는 애초부터 미화는 100달러만 소지하기로 작정을 했었지요. 3박4일 동안 돈 쓸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았고, 기념품 같은 것도 전혀 사지 않을 마음이었습니다. 아무튼 100달러와 10만원이면 충분할 것 같았지요.
그런데 결혼식 후 피로연장에서 하객들이 신부에게 축의금 봉투를 주는 것을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군요. 비록 신부집과 친분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랑을 수행한 한국 사람으로서 신부에게 부조를 해 주는 것은 여러 가지로 좋은 일일 것 같았습니다. 기회를 틈타 신랑에게 내 뜻을 말하고 얼마면 적당하겠느냐고 물으니, 신랑은 고맙고도 미안한 표정으로 한국에서처럼 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그럼, 20달러면 괜찮겠느냐고 하니 신랑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축의금을 알돈으로 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봉투를 구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음식점의 주인에게 봉투를 부탁하니 잠시 찾아보는 듯하더니 없다고 손을 젓더군요. 나는 집에서 봉투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하면서 렌트카 기사에게 부탁을 했더니 자신의 가방 속에서 하나 꺼내 주는데, 은행 이름과 안내 문구가 적힌 봉투였습니다. 그거라도 감지덕지할 수밖에. 간단히 'KOREA, JIYOHA'라고만 쓴 다음 30달러를 넣었지요. 다시 홀 안으로 들어가서 신부에게 봉투를 내미니, 신부는 깜짝 놀라며 "땡큐" 소리를 연발하더군요. 그녀의 고마워하는 표정이란…! 그녀에게 30달러 축의금 봉투를 건네 준 일이 지금 생각해도 되게 기분이 좋습니다.
피로연이 진행되는 동안 음식점의 바깥 한 켠에서는 초청을 받아 온 가수들이 노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수들은 모두 젊은 아가씨들이었고 3명이었습니다. 그 외 키보드와 기타를 연주하는 남자가 셋이었습니다. 그들은 계속적으로 아주 열심히 노래를 했고, 결혼 잔치의 분위기를 한껏 흥겹게 고조시켜 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도 팁을 주고 싶었습니다. 신랑을 수행해 온 한국 사람이 팁을 주면 여러 가지로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랑이 팁을 준비했는지도 모르지만, 내가 그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먼저 신랑에게 가서 가수들이 노래를 모두 마친 후에 팁을 줄 의향을 말하고 얼마면 적당하겠느냐고 물으니, 신랑은 역시 고맙고 미안한 표정으로 2, 30불이면 충분하다고 하더군요.
나는 가수들이 노래를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에게 30달러를 주었습니다. 한국 사람에게서 팁을 받는 그들은 더없이 고마운 표정이었습니다. 세 아가씨가 차례로 내게 악수를 청했고, 잠시 후 돌아갈 때도 내게 와서 인사를 하더군요. 진심으로 고마워하던 그들의 표정이 지금도 내 눈에 선합니다. 그들의 순박한 표정이….
나는 그 아가씨들의 모습을 보면서 1999년 2월말 제주도에서의 일을 떠올렸습니다. 어머니와 아이들에게 비행기를 태워주고 싶은 마음에, 어떤 특별한 사연으로 부모와 헤어져 살고 있는 두 생질아이들까지 포함하여 온 가족의 제주도 여행을 실행하였지요. 관광 코스 중에 몽골 사람들의 말타기 묘기를 관람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비가 좀 내려서 드문드문 진흙탕도 있는 마당에서 네 명의 몽골 청년들이 다양한 말타기 묘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청년들 중에는 아가씨도 한 명 있었습니다. 참 예쁘게 생긴 아가씨였지요.
그런데 내 어머니는 몽골 청년들의 말타기 묘기를 즐기며 박수를 치기보다는, 그저 안쓰러워하는 기색이었습니다. 몽골이 가난한 나라라는 것을 아신 어머니는 그 몽골 청년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인솔 책임자 분께 1, 2천 원 씩이라도 모금을 해서 저 몽골 청년들에게 팁을 주자고 제의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인솔 책임자 분은 관람료 속에 팁도 다 포함되어 있다며 얼굴을 저었습니다.
이윽고 말타기 묘기 공연이 끝나고 관광객들이 돌아갈 때, 어머니는 길옆에 나란히 서서 말 위에서 인사를 하는 몽골 청년들에게 만원 한 장이라도 주는 사람이 있나, 유심히 살폈습니다. 팁을 주는 사람들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었지요.
하지만 그 날 몽골 청년들에게 팁을 준 사람은 내 어머니뿐이었습니다. 고작 만원 짜리 한 장을 아가씨에게 주었지만, 몽골 청년들의 고마워하는 표정이란…! 한국 돈 만원이 몽골에서는 몇 배로 큰돈이라는 걸 아신 어머니는 흐뭇한 마음이었지요.
언걸 먹은 죄로 인한 매월의 빚잔치를 아직 끝내지 못한 상황에서 넉넉지 못한 비용으로 제주도 가족 관광을 시도한 나는 그저 어머니의 마음이 내 마음이라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변명하며 위안할 수밖에 없었지요.
피로연이 끝난 후에 우리 일행은 항구로 가서 배를 타고 민도르 섬의 유명한 휴양지 PUERTO GALLERA로 향했습니다. 예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신랑 신부도 동행을 했고…. 이때부터 신부 러마씨와 백남종씨의 딸 은주는 더없이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어서 일행 모두를 기쁘게 했습니다. 그들은 손을 잡고 함께 걸었고, 배 안에서도 서로 몸을 붙이고 앉아 있곤 했지요. 이미 그들은 모녀 사이였습니다. 서로에게 아주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좋은 엄마와 좋은 딸로 이 세상을 즐겁고 보람되게 살아가리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푸에르토 갈레라에 가던 날은 저녁 때여서 그랬는지 특산품을 파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는데, 다음날 오전에 아름다운 해변을 산책하자니 옥돌과 모조 진주로 만든 목걸이 따위를 팔려는 사람들이 여러 명씩 달라붙어 보통 성가신 게 아니더군요. 처음에는 그들의 집요한 공세에 눈조차 주지 않고, 강력하게 도리질을 하곤 했지요.
그러나 대개 젊은 남자들인 그들의 얼굴과 행색과 행동거지들을 보자니 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처럼 그을린 얼굴, 마른 몸, 꾀죄죄한 입성은 어느새 내 마음에 연민을 불어넣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펼쳐 보이는 옥돌 목걸이 따위를 보자니 괜찮은 물건 같았습니다. 필리핀 전역을 통틀어 이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물건이라고 했습니다. 바다에서 채취한 돌을 가지고 만든 100% 수공예품이라고 했습니다. 그 물건들을 팔러 다니는 사람들의 수고도 수고지만, 그 수공예품을 만드는 사람들의 공력과 노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것을 하나라도 팔려고 애쓰는 그들의 집요함이 애처럽게도 느껴져서, 하나도 사지를 않는다면 그것 역시 죄를 짓는 일일 거라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더군요.
더욱이 애써 흥정을 하고서도 끝내 물건을 팔지 못하고 돌아서면서도 전혀 노여운 기색을 보이지 않는 그들의 순박한 표정을 보고서는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악의 같은 게 없는 것 같았습니다. 돌아서면서 저희들끼리 한국 사람을 욕하고 조롱하는 은어 같은 것을 주고받을 법한데도, 그들에게는 그런 것도 전혀 없다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순박성에 어느덧 매료되는 나 자신을 느꼈고, 그들이 한국의 라면과 김을 찾는 것을 보고, 이담에 또 한번 이곳에 오게 된다면 그때는 꼭 라면과 김을 많이 가지고 와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지요.
어제 혼배 미사 때 나와 아들이 각 1달러씩 헌금을 해서 내 수중에는 미화 38달러와 한화 10만원이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결국 옥돌 목걸이를 여러 개 샀고, 미화 20불과 한화 2만원을 지출했지요. 수중에 돈이 넉넉지를 않아서 좀더 많이 사주지 못하는 것을 내심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오전에 우리 일행은 다시 바탄가스 시로 돌아와 일식 집에서 백남종씨의 직장 상사인 소장님이 내는 점심을 먹은 다음 오후에는 대성당 한 곳과 시내 일원을 구경하고 백화점에 가서 쇼핑도 했지요. 나는 8달러를 필리핀 돈 페소로 바꾼 다음 그 돈으로 망고 열매 말린 것을 열 봉지 샀고….
다음날 아침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나는 백남종씨의 어머니께 집에다 축의금 봉투를 놓고 온 사정을 얘기하고 호텔 카운터에게서 구한 봉투에다가 3만원을 넣어 드렸지요. 그리고 6월 1일 영세를 받는다는 은주에게 적당한 성물을 사라며 1만원을 주었지요. 그러며 슬몃 신부 러마씨를 보니 누구보다도 고마운 표정을 짓는 것 같더군요.
우리는 오전 10시경 마닐라의 아키노 공항으로 향했고, 공항에서 두 대의 렌트카 기사들과 헤어질 때 나는 다시 한번 지갑을 꺼내 들었지요. 지갑 속에는 처음부터 렌트카 기사들에게 주려고 아껴두었던 5달러 짜리 두 장과 3만 몇 천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백남종씨는 5달러씩 주면 충분하다고 했지만, 나는 한국 돈 만원 짜리도 두 장 꺼내어 렌트카 기사들에게 5달러와 1만원씩을 주었습니다.
필리핀에 온 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그들이 우리 일행에게 보여 준 친절과 서비스는 내가 오래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팁을 준 것은 내 진심 어린 감사의 표시였지요. 그들은 러마씨와도 잘 아는 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그것은 러마씨에 대한 일종의 배려이기도 할 터였습니다. 내가 렌트카 기사들에게 팁을 주고 나자 러마씨는 내게 "땡큐"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하더군요.
새엄마 러마씨와 헤어지면서 은주는 눈물을 흘리더군요. 은주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고 뺨에 입을 맞춰 주면서 러마씨는 사뭇 안타까운 표정이었고…. 나는 은주의 눈물을 보면서 기억도 흐릿할 다섯 살 때 생모와 헤어지고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면서 속으로 은밀히 엄마를 그리워하기도 했을 은주의 그 허전한 세월이 훤히 감지되는 듯하더군요. 은주의 그 허전한 공간을 어서 빨리 새엄마 러마씨가 채워 주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고….
내 지갑에는 만원짜리 한 장과 천원짜리 석 장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녁 7시경 인천공항에서 가족들과 헤어지고 백남종씨는 인천공항 주차장에다 5일 동안이나 맡겨 두었던 차를 찾아 가지고 태안으로 향했습니다. 회사 직원들은 따로 내려가고, 백남종 씨의 차에는 나와 아들이 동승을 했는데, 5일 동안의 주차요금 4만원을 백남종씨 혼자 물게 하는 것이 영 미안하더군요.
서해안고속도로 화성휴게소에서 우리는 우동과 어묵으로 요기를 했는데, 내 지갑 속에 마지막 남은 만원 짜리 한 장도 떠남으로써, 나는 이제 백수인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필리핀에 갈 때 지녔던 미화 100달러와 한화 10만원을 아주 깔끔하게 모두 지출한 것이 내게 이상한 기쁨을 안겨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일행이 이틀 밤을 묵었던 필리핀 바탄가스 시 외곽의 호텔 여종업원에게 물었지요. 한 달 월급이 얼마냐고. 3천페소(우리 나라 돈으로 7만5000원)라고 하더군요. 필리핀의 일반 서민 가정은 우리 돈으로 20만원 정도면 한 달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했고…. 내가 매월 고정적으로 내고 있는 여러 가지 이름의 '자선 회비'들도 합 20만원은 되는데….
집에 온 나는 어머니와 아내에게 필리핀에서의 내 '지출 명세'를 상세히 보고했지요. 미화 100달러와 한화 10만원이 크다면 크고 적다면 적은 돈이지만, 나의 그런 식의 돈 쓰는 법에 대해 어머니와 아내는 흐뭇한 표정을 짓더군요. 내일부터는 다시 쪼들리는 생활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
필리핀은 여러 가지 풍경이 우리 나라의 60년대 풍경과 비슷하더군요. 생활 수준도 전반적으로 우리 나라의 60년대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젊은 사람들이야 우리의 60년대 풍경을 알 턱이 없겠지만,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 내게는 소중한 것이기도 하지요. 나는 필리핀이 잘 발전하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루빨리 '가난'을 극복하는 나라가 되기를…. 그러나, 경제 발전을 이루더라도 국민들의 착한 심성은 그대로 유지되기를…!
이 긴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와 축복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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