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가협 식구 두고가는 맘 편치않아"

서울로 이사가는 대전민가협 홍성순 회장

등록 2002.06.09 17:57수정 2002.06.13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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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딸이 구속됐다는 연락이 왔어. 우리 딸은 서울서 교편 잡고 있었는데. 사형시킬 거라고, 아마 그렇게 될 거라고들 얘기했지."

대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하 민가협) 홍성순(64) 회장은 민가협과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기 위해 딸이 구속되던 해의 상처를 다시 헤집어야 했다.

홍 회장의 큰 딸 현주씨는 87년 당시 불법 연행되어 물고문 끝에 숨을 거두어 민주화운동을 촉발시킨 박종철 열사의 애인과 친구사이였다.

딸이 수배 중이던 친구에게 신분증을 빌려주었다가 공범으로 구속되자 어머니 홍씨는 딸과 함께 고락을 같이 했다. 자식 눈에 눈물나면 어머니 눈에는 피눈물이 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마음 고스란히 옮긴 곳이 바로 민가협이라는 단체였다. 홍 회장은 87년 1월, 원용수 목사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 받아 민주화투쟁에 함께 하기로 결심한다.

입고 있던 가죽 치마가 형편없이 오그라졌을 정도로 지독한 고문을 당했을지언정 딸은 곧 석방되었다. 그러나 딸의 구속이 민가협 활동의 이유가 아니었던 만큼 딸의 석방 후에도 홍씨의 소박한 민주화 투쟁은 계속되었다. 92년 대전민가협 회장직을 맡아 민가협 어머니로 살아온 지 벌써 15년이 되었다.

그 '어머니'가 대전생활을 접고 서울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지난 5일 오후 7시 30분, 대전시 서구 둔산동의 한 식당에 서로 낯이 익은 사람들 100여명이 속속 모여들었다. 서울로 집을 옮기게 된 홍 회장의 송별식이 바로 이 자리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어머니, 저 왔어요."
이날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를 '어머니'라 불렀다. 그리고 그 중에는 홍성순 '어머니'를 친어머니 부르듯 하며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껄끄러운 감옥 밥을 삼켜야 했던 당시 김치며 밑반찬을 넣어주었던 때를 잊지 못해서이다. 설움과 원망을 안고 출감하는 이들을 데려다 더운밥을 먹여주었던 것도 바로 민가협 어머니들이었다.

노형일(27)씨는 "수배 중에 어머니가 고기를 싸다 주신 일이 기억에 남는다"며 마치 다 큰 막내아들이 새삼 어머니께 "감사하다"고 고백하듯 수줍게 말했다.


양심수와 수배자들을 돕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더러는 '정보요원'들이 들이닥쳐 집안을 온통 뒤집어 놓곤 했다. '빨갱이'라는 죄명을 씌워 꽃 같은 아들딸들을 줄줄이 잡아가는 그들과 때로는 몸싸움을 해가며 억척스러운 삶을 살았다.

대전교도소 앞에서 "양심수를 석방하라"며 시위를 벌이고, 재판에 참석해 양심수들을 위로했다. 한남대 활동가조직사건, 충남대 활동가조직사건 등 일이 터질 때마다 민가협 어머니들과 함께 아들딸들 배곯을까 매운 최루탄 가스 마셔가며 밥을 해 나르는가 하면, '애덜' 다칠까봐 시위대 선두에서 진압경찰과 맞서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홍 회장은 비전향 장기수들을 북으로 송환한 때를 잊지 못한다. "김선명 선생이며 모두들 북으로 보낼 때, 정이 많이 들어서 서운한 맘도 있었지마는 그래도 정말 기뻤지."

파란만장했던 지난 세월, 홍성순 회장은 송별회 행사장 한 켠에 기자와 마주 앉아 고생스럽던 일과 기뻤던 일들을 되새기고 있었다.

"갈 때가 되면 다 가는 거지, 뭐"하면서도 그 동안 동고동락했던 민가협 식구들을 두고 가는 맘이 편치 않은 모양이다. "내가 나이도 들고 해서 서울에 있는 아들네로 가게 됐지만, 맘은 항상 여기 있을 거야"라며 매달 몇 차례는 꼭 찾아올 것을 약속했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던 우울한 시대, 온 몸으로 대전의 아들딸들을 지켜온 우리 가슴 속의 '어머니'를 보내는 멀리 보내는 아쉬움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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