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황금 연못

영화 속의 노년(33) - <황금 연못>

등록 2002.06.18 13:44수정 2002.06.18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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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황금빛으로, 때론 짙은 물빛으로 반짝이는 호수에는 항상 같이 있는 물오리 한 쌍이 있다. 영화 <황금 연못>의 두 주인공 노먼 할아버지와 에텔 할머니도 늘 함께 있다. 소리 지르고, 화내고, 달래고, 웃고, 입씨름하면서 말이다.

은퇴 교수인 노먼은 퉁명스럽고 심술궂은 노인이다. 사람의 말에 있는 그대로 대답하는 법없이 늘 엇나가서, 본인은 농담이거나 반어법을 쓰는 것일지 몰라도 당하는 사람들은 고역이다. 그런 노먼에게 상처받지 않고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아내 에텔뿐이며, 딸 첼시도 이미 그런 아버지에게 일찌감치 등 돌리고 멀어져갔다.


노먼과 에텔은 여름을 나기 위해 '황금 연못'이라 불리는 호숫가 별장을 찾고, 노먼의 80회 생일을 맞아 오랫 동안 서로 오가지 않고 지내온 딸 첼시와 남자 친구 빌, 빌의 아들 빌리가 온다. 여전한 아버지를 보며 딸은 고개를 돌리고, 노먼과 처음 마주한 빌과 빌리 역시 마음이 불편하다.

그러나 솔직히 노먼은 지금 참 힘들다. 굽은 등에 불편한 다리는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 행동은 굼뜨고, 아내와 천 번도 더 걸었던 숲길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져, 딸기를 따기는커녕 땀을 뻘뻘 흘리며 도망쳐 나오기도 한다. 나이와 함께 육신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죽음에 대한 생각이 수시로 마음을 흔들어 놓아 참 힘들다. 속상한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밝고, 명랑하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아내뿐. 그런 아내가 고맙다.

딸과 딸의 남자 친구는 유럽으로 둘만의 여행을 떠나고, 두 노인 곁에는 열세 살짜리 빌리가 남겨진다. 빌리는 무섭고 괴팍한 할아버지가 싫고, 노먼은 예의 없이 건들거리는 빌리가 영 마음에 안들지만, 두 사람은 같이 한 달을 보내야만 한다. 이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것은 황금 연못이다. 연못에서 함께 배를 타고 낚시를 하고, 수영을 가르쳐주고 배우면서 조금씩 가까워져 간다.

자신이 낯선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쓰레기처럼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빌리. 노먼은 '인생 67년 선배'라고 하면서 그 빌리의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늘 큰 소리로 고함을 치는 노먼을 이상하게 여기는 빌리에게 에텔 할머니가 설명해준다. "너한테 소리 지르는 게 아니란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고함을 치는 거지. 아직도 포효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늙은 사자 같이…."

유럽 여행에서 돌아와 빌리를 데리러 온 딸 첼시에게 엄마 에텔은 간곡하게 아버지와의 화해를 권한다. 아버지는 딸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서운 사람, 알 수 없는 사람, 못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내색하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하면서.


누구나 가만히 들여다 보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이는 법이라며, 아버지에 대한 그런 감정으로 평생을 망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는 엄마의 말에 첼시는 아버지에게로 다가간다. 딸만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무서워하고 있었던 것. 딸이 먼저 말을 걸고 손을 내민다.

이제 노부부는 여름을 지낸 황금 연못 별장을 떠나야 한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노먼이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두 사람은 언젠가는 겪게될 죽음과 이별을 경험하게 되고, 새끼들을 다 키워 보내놓고 또 다시 둘만 남은 호수 위의 물오리를 바라본다. 여전히 호수는 황금빛 혹은 물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고집스럽고 심술궂은 노먼, 명랑하고 활기 있는 에텔, 아버지와의 불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딸 첼시, 부모의 이혼으로 상처를 받고 마음 붙일 곳 없는 소년 빌리, 이들 모두를 묵묵히 지켜보는 것은 다름 아닌 황금 연못이다.

물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주고, 그 안에서 물고기를 품어 길러내고, 사람들이 몸 기대어 살아갈 수 있게 자기를 내주는 황금 연못. 노먼과 에텔, 아니 첼시와 빌, 빌리가 언제라도 다시 찾아가면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황금 연못.

우리 인생 역시 그 모든 사랑과 아픔, 슬픔, 어려움, 기쁨 같은 것들을 다 품어안아 결국 스스로 황금 연못이 되는 것은 아닐까. 노먼은 황금 연못에서 자신의 삶 역시 그래야 한다는 것을 배웠기에 갈 곳 없는 어린 빌리를 품어줄 수 있었고, 딸 첼시를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노년에 느끼는 삶에 대한 기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살아온 세월에 대한 회한, 손상된 관계에 대한 후회와 안타까움, 참으로 당연한 일이며 인간적인 일이다. <황금 연못>은 이 모든 것을 황금 연못가의 노먼과 에텔을 통해 풀어 나가고 있다.

노년은 노년대로, 젊은 세대는 젊은 세대대로 노년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하는 영화, 역시 노년 영화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겠다.

(On Golden Pond 황금 연못 / 감독 마크 라이델 / 출연 캐서린 헵번, 헨리 폰다, 제인 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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