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공문서 위조를 배웠습니다"

존경하는 이상주 교육인적자원부 장관님께 올립니다

등록 2002.07.25 23:14수정 2002.07.2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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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저는 전남 순천시에 소재한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교사입니다. 오늘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고 장관님께 편지를 올리게 된 것은 방학중 일선 학교에서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특기적성교육과 자율학습에 관련하여 교육계의 으뜸이신 장관님께 답답한 속마음을 털어놓고자 해서입니다.

나라의 교육을 총괄하시는 장관님께 이런 편지를 올리는 것이 사실은 이치에 맞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특기적성교육과 자율학습에 대한 원칙이나 지침이 이미 각급 학교에 내려와 있기 때문에 그 지침에 따라 판단하여 실행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원칙이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는 점입니다. 더 큰 문제는 나라와 학교와 아이들의 장래를 염려하여 그 원칙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거나 심지어는 박해를 받게 되는 학교 현장의 모순된 모습입니다.

이곳 순천지역에서는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적인 상황이겠지만) 방학을 맞이하여 특기적성교육이란 이름으로 아이들의 특기적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인문과목을 중심으로 한 보충수업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학생들이 원하는 특정과목을 반별로 편성하여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수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 수급 상태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편의적으로 짠 시간표에 의해 획일적인 보충수업을 하고 있는 학교도 적지 않습니다. 학생들의 희망여부를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특기적성교육을 실시하는 것은 이미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관행이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게다가 하루 평균 5시간의 보충수업을 끝내고 그대로 교실(상당수의 학교는 냉방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찜통이나 다름이 없는)에 눌러 앉아 오후 6시까지 자율학습을 강요받는 학교가 대다수입니다. 심지어는 일부 실업고마저 그런 파행에 동조하고 있어서 그동안 특기적성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애를 써온 저희 학교도 2학기 이후 특기적성교육의 향방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기적성교육과 자율학습의 파행적 운영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에 대하여 제 소견을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문학적 재능이 있는 한 아이를 알고 있습니다. 언제가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버스 승강장에 기대어 서 있는 그 아이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는 가슴이 아팠던 적이 있습니다. 그 아이는 산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고, 무엇보다도 자유를 갈망하는 아이였습니다. 사회의식도 강하여 개인의 출세만을 위해서 공부하는 여느 아이들과는 사뭇 달라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나름대로의 계획도 세우고 있었던, 아름다운 아이였습니다.

고 1때였다고 합니다. 입학식 다음날 정상수업도 제대로 되지 않는 학기초의 어수선함 속에서 방과후 특기적성교육이 실시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내심 깜짝 놀랐습니다. 희망자를 조사를 하고, 반을 편성하고, 책을 구입하고 하는 여러 과정을 생략해 버린 것이 의아해서 담임 교사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희망자 조사는 안 합니까?"
"응, 그건 다음 주에 할거야."

그 아이가 학교에서 최초로 배운 것은 공문서 위조였습니다. 다음주 그 아이는 자기의 희망여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지금 받고 있는 수업과도 전혀 상관이 없는 과목에 동그라미를 쳐서 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해마다 거의 대다수의 학교에서 아무런 반성이나 아픔이 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괴로워한 것은 그때 담임 선생님에게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씀드리지 못한 점이었습니다.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말씀해주신 담임 선생님 앞에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해 그 아이는 윤리과목에서 '수'를 취득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또 하나의 괴로움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스스로는 그 점수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 아이는 지금 고3이 되었고, 작가가 되겠다던 자신의 꿈은 접은 상태입니다. 사회에 대하여 정당한 자기 발언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작가가 된다는 것이 스스로 용납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런 아름다운 자의식을 가진 아이들은 오늘날 학교 현장에서는 견디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건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인재의 손실입니까?

제가 그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지금 학교에 그런 아이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희소성의 원칙에 의한 것이기도 합니다. 공문서 위조를 강요하는 교사도, 강요받는 아이들도 이제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관행일 뿐입니다. 교육계획에 의해서 엄연히 정해진 여름 방학을 강요에 의해서 반납하고, 폭염 속에서 효과도 없는 자율학습을 그것도 수익자부담원칙에 의해 돈을 내면서 하고 있는 아이들도 이제는 불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아이들의 영혼과 정신 속에 패배의식이 심화되어 가고 있겠지요. 이것이 망국의 교육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방학중에 보충수업과 함께 자율학습을 강행하고 있는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냉방시설이 완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루 5시간의 보충수업만으로도 교사나 아이들은 파김치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학부형의 주머니를 털어 학교에 냉방시설을 갖추게 된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먼저 실시하게 되자, 다른 학교가 하는데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냉방시설을 갖추지 않은 학교조차도 수업효과가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율학습을 강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를 위한 자율학습이란 말입니까?

지금 세계 각국의 청소년들은 방학을 맞이하여 자연과 여행지 도서관 등을 찾아 폭넓은 경험들을 쌓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정부와 학교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나라도 많습니다. 얼마 전 인터넷 <즐거운 학교>에 이런 글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캐나다의 여름을 보내는 대부분의 청소년들의 모습은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준비하는 역동성과 다양한 활동과 자연 친애적인 시간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건전한 성장을 도모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생함을 바라보는 여름이 저는 무척 즐겁습니다.'

이런 나라들과는 달리 특기적성교육이란 이름으로 밀폐된 공간 속에서 주입식 입시교육만을 강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아이들이 방학을 통해 자신의 특기적성을 스스로 탐구하고 개발할 기회마저 앗아가 버리는 지금의 우리 교육을 정부에서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경쟁력 있는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배움의 기회를 더 가진 사람들이 사회에 대한 긍정적인 부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선진국의 경우처럼 학비부담을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여건 상 그것이 아직 불가능하다면, 학교에서의 경험들이 즐겁고 자유로워야 합니다. 적어도 개인의 영혼과 인권을 억압하는 형태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찜통 더위 속에서 비자발적으로 강행되는 괴롭고 불쾌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그 결과로 주어진 자신의 몫을 남들과 나누려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 주장을 현실을 모르는 지나친 이상주의자의 발언 정도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수십 조원에 달하는 사교육 시장과의 복잡한 함수관계로 인해 학교에서의 보충수업이나 자율학습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분도 있는 줄 압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묻고 싶습니까? 과연 무엇이 현실입니까? 우리의 청소년들이 사회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교사로부터 아무런 양심의 동요 없이 공문서를 위조하는 법을 배우고, 아니면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살든지, 그것도 아니면 아예 생각이 없는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이 끔직한 상황보다 더 비극적이고 암담한 현실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지금의 사회를 지식기반 사회라고들 합니다. 장관님의 홈페이지에도 그런 글귀가 적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지식이라는 말은 죽은 지식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아이들이 학교를 통해 얻고 있는 지식이 결코 살아 있는 지식이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누워서 침 뱉는 격이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지식이 참된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율학습은 '자율'이라는 말에 걸맞게 자율적으로 운영되어야 하고, 희망자 조사를 할 때는 '희망'이란 단어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면 지식은 죽은 지식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교사와 학생이 공조하여 공문서를 위조하는 관행은 하루라도 빨리 그 뿌리가 뽑혀지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현실을 내세워 그럴 듯한 변명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범죄임이 분명합니다. 특기적성교육이 현장의 현실에 맞지 않다면 과감하게 이름을 바꾸어 사용해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특기적성이든 보충수업이든 학생들의 개인의 의견과 인권을 침해하면서까지 강행하는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특기적성교육과 자율학습에 관한 사안은 시도 교육관청으로 일임하여 관장하되, 학교장에게 자율권을 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학교 현장에서의 현실은 암담하기만 합니다. 방학을 맞이하여 자연과 여행과 책을 통한 큰 교육의 기회를 갖도록 적극적으로 지도해주지는 못할 망정, 아이들을 학대하는 수준의 강제적인 특기적성교육이 행해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로 인해 학생 개개인의 영혼뿐만 아니라 국가의 장래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판단 속에서 감히 장관님께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이제 글을 마치면서 장관님께 한 가지 청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모시고 있는 교장선생님께 따뜻한 격려의 전화 한 통 부탁드리면 안될까요? 저는 교장선생님은 존경하고 있습니다. 저희 젊은 교사들에게 다른 어떤 요구나 충고보다도 아이들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자주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특기적성교육도 상급관청의 방침대로 학생들의 희망 의사를 존중하여 희망교사와 희망 학생이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효율적인 특기적성교육이 되도록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배려해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교장선생님의 심기가 많이 불편하신 것 같습니다. 인근 학교들의 파행적인 특기적성교육과 자율학습이 강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우리 학교가 마치 학생들을 위한 교육활동을 게을리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장선생님께 우리 학교가 정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린다고 교장선생님의 마음이 편안해지실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관님께 부탁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관님께 먼저 여쭙고 싶습니다. 상급관청의 지시와 방침에 따라 학생들의 자유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여 효과적인 특기적성교육을 하고 있는 저희 학교가 잘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이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공문서를 위조하면서까지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리하게 강행하고 있는 학교가 잘하고 있는 것입니까? 만약 저희 학교가 정상적으로 잘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순천 효산고 유재호 교장 선생님께 격려 전화 한 통 해주십시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저의 편지가 혹시라도 장관님께 결례가 되었다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교육계의 으뜸이시고 어른이신 장관님 앞에서 새캄한 후배교사가 귀여운 재롱을 떨었다고 여겨주시면 마음이 편하겠습니다. 그럼 장관님의 건강과 행운을 빌면서 이만 줄이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교육인적자원부 홈페이지에도 올려져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교육인적자원부 홈페이지에도 올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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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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