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와티 집권 1년, 인니 정치 현황

등록 2002.07.26 05:43수정 2002.07.26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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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와히드와 메가와티 Foto:ilustrasi KCM(Kompas Cyber Media)

와히드와 메가와티 Foto:ilustrasi KCM(Kompas Cyber Media) ⓒ KCM

메가와티가 개혁에서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비판이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미 예상되었던 일이기도 하다.

1999년 총선과 대선을 거치고 나서, 2000년 메가와티의 투쟁민주당 전당대회의 당 개편 과정 중에 심각한 내분 양상이 벌어졌다. 구 여당 계열 인물들이 새로이 얼굴을 내밀고 메가와티를 둘러싸고 있다는 우려와 비난으로 논란이 치열해 질 때, 메가와티는 이 새로운 인물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반대편은 그들의 지도자인 메가와티의 뜻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와히드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구 여권 세력, 특히 군부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힘쓴 반면, 메가와티는 오히려 군부 세력의 입지를 세워주고 있다는 평가들이 나오고 있다. 와히드는 정치권내 자기 지분이 미약한 가운데, 개혁과 향후 정국 장악을 위한 힘을 얻기 위해 외국 순방을 통한 대외 지지를 확대해 통치력 안정을 추구했다고 생각된다.

그는 이슬람을 기치로 해 골카르까지 가세한 보수 연합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서서히 그 세력들을 몰아냈다. 지금은 부통령이 된 함자 하즈를 취임 후 한달 만에 장관직에서 몰아냈다. 이후 다음 그의 목표는 위란토 정치안보 조정장관이라는 소문이 돌더니 2000년 파푸아에서 있었던 신년행사에 위란토가 참석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채 못되어 그해 2월 위란토 역시 정계에서 물러났다. 이제 와히드의 다음 퇴출 세력은 군부임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을 때, 와히드의 행보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반대파의 여론이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와히드는 통합 군 사령관에 해군 출신의 위도도를 앉히는 등 특히 육군으로 대표되는 군부세력의 힘을 꺾어나가기 시작했다. 와히드 대 여타 정치세력들은 반발과 타협을 반복하며 팽팽한 긴장 상태를 고조시켜 나갔다. 와히드의 독선적인 행보는 결국 2001년에 접어들어서는 명백한 반 와히드 전선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반 와히드 진영은 와히드의 국민각성당 당내에서 마토리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여 완벽한 와히드의 패배를 준비한 후 2001년 7월 23일 메가와티를 대통령으로 옹립했다. 이 과정 중에 비상사태 선포로 국민협의회의 대통령 탄핵을 막으려고 했던 와히드의 명을 거부한 자카르타 경찰청장 등 군부 세력의 지원은 메가와티가 대통령이 되는 것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메가와티는 원내 다수당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헌법상 대통령을 선출하는 국민협의회의 지지로 대통령직을 위임받았다는 점에서 정통성을 가진 대통령이다. 또한 군부의 지원은 그에게 군부와 충돌 양상을 보였던 와히드 대통령 시절보다 안정적으로 통치를 해 나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군부의 지원을 통한 안정은 개혁 염원과 상충할 수 밖에 없다.


와히드를 몰아내는 결정적 이유였던 '블록게이트 I' 사건에 비교될 수 있는 '블록게이트 II' 사건에 연루된 악바르 탄중(골카르) 국회의장에 대한 국회 특위 구성 부결은, 인니 정계의 원칙없는 정치적 이해타산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에 대해 악바르 탄중 의장은 와히드의 블록게이트는 와히드 재임시 일어난 일로 와히드가 책임을 지는 게 당연했지만, 자신의 경우는 하비비 정권 하에서 연루된 것이기 때문에 하비비 대통령이 물러남과 더불어 더이상 책임소재를 추궁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런 국회 특위 부결은 메가와티의 투쟁민주당이 부결을 방임한 것에 크게 힘입었으며, 이 사실을 사전에 메가와티가 알고 있었다는 것 때문에 개혁에 대한 메가와티의 의지가 사라진 게 아니냐는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 (기사-인니 국회 불록게이트 II 특위 구성 부결 후유증 확산 참조)


이 뿐만이 아니라 부패 혐의가 짙으며, 부적절한 인물로 비난을 받고 있는 수띠요소 자카르타 시장의 2002-2007 임기 재연임 문제에 관해서도 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해 당내외로 부터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투쟁민주당 자카르타 지부에서 당내 인물을 시장후보로 추천하기로 의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철회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더욱 논란이 되고 있다.

군부 출신으로 군부 세력을 등에 업은 수띠요소 현 시장이 자카르타의 안정(?)이라는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지는 모르겠으나, 실제로 그것은 억압과 강제적인 안정이라는 수하르토 통치기의 수단을 반복하는 것일 뿐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실제 각종 범죄 수치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비난한다.

빈민계층은 오히려 늘어나 1억명에 육박하고 있고, 실업자수는 3천 800만명(자료 출처-메디아 인도네시아)에 이르고 있는데, 메가와티는 국가의 수장으로서 보다는 한 당의 당수인 정치가로서 역할을 하느라 국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돈다. 이는 비단 메가와티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정치 엘리트들이 현 국가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보다는 2004년 대선을 위한 행보에 더 힘을 쏟고 있다는 비난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인니 정치판은 메가와티의 투쟁민주당과 악바르 탄중의 골카르가 연대해 (두 당은 각각 제 1당과 2당으로서 국회내 500석의 의석 중 153석과 120석을 차지하고 있다.) 소위 민족주의 전선을 펴고 있는 반면, 나머지 각 당들은 이슬람이란 이름으로 연대해 대립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메가와티가 골카르와 손잡고 군부의 지원을 받는 한 개혁의 의지가 뒤로 밀려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1999년 당시 메가와티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때, 이미 개혁은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당시 자력으로 메가와티가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2001년 대통령이 되기 위해 힘을 실어준 세력들에 대한 배려를 할 필요없이 개혁을 수행해 나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정치인으로서의 메가와티 자체에도 질타를 하고 있다. 메가와티는 아버지의 '카리스마'를 유산으로 물려받았을 지는 몰라도, 그 지적인 능력까지 물려받지는 못한 것 같다는 의견도 있다.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남편 타우픽 끼에마스의 영향력과 그녀를 둘러싼 핵심참모들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은 그녀를 독립적이고 지도자다운 면모를 가졌다는 평가를 내리기 어렵게 만든다.

스스로의 힘으로 정계의 중심에 올라섰던 아버지와는 달리, 처음부터 아버지의 후광을 받아 성장해온 '귀족' 출신의 그녀는 애시당초 민초의 대표자이자 개혁의 중심에 서기에는 한계가 있는 지도 모른다. 아니면, 육군과 대립하다 쫓겨난 아버지를 생각하며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는 지도 모른다. 또한 주요 정치 엘리트들의 사당이나 다름없는 인니의 정당들은 아래로부터의 소리를 위로 밀어올려 실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메가와티 정부는 수하르토 정권의 잘못으로부터 배운 것이 없다"는 한 인니 신문의 기사 제목은 현 메가와티 정부의 모습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 한겨레 '하니리포터'에도 등록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터넷 한겨레 '하니리포터'에도 등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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