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벅스, 네가 '학림'을 알아?

'다방'에서 '브랜드'로 차별화 정책 추진중인 학림다방

등록 2002.07.30 11:06수정 2002.08.05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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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한국인가요, 미국인가요?

서울을 방문했던 한 호주인은 "서울은 호주보다 더 서구적이고 더 미국화되었다"면서 "맥도날드, KFC, 던킨도너츠, 스타벅스가 코너마다 가득해서 어디가 어디인지 도통 모르겠다"고 길찾기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는 "내가 알기로 시드니에는 대략 10개 정도의 스타벅스가 있는데 서울에는 30개가 넘게 있다"며, "홍콩에는 공항점을 포함해 2개의 스타벅스 매장을 보았다"고 덧붙였다. 한국에는 김포공항에만 2개의 스타벅스가 있다.


a 대학로 학림다방 맞은편에 위치한 스타벅스와 자바커피

대학로 학림다방 맞은편에 위치한 스타벅스와 자바커피 ⓒ 배을선

기자가 일하고 있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조금 멀리는 충무로, 가깝게는 문화일보 사옥까지 7개 점포의 스타벅스가 있으니 외국인인 그가 느끼는 한국의 서구화는 현지인인 우리가 느끼는 그것보다 더 충격적일 수 있다.

하물며 미술과 전통의 거리라는 인사동에도 스타벅스를 비롯한 외국계 커피체인점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으니, 서울 중심가에 퍼진 국적 모를 수백개의 커피체인점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새로운 유행이 분명하다.

외국생활을 했던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에게 그곳은 분명 과거를 추억하는 장소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은 단연코 미국문화의 부산물이다. 아무렇지 않게 미국문화를 소비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꽤나 키치적이지만 그 곳에는 영혼이 없다. 한국적인 정서나 향수가 없는 것이다.

a 학림다방 내부의 모습

학림다방 내부의 모습 ⓒ 배을선

학림다방을 빼고 대학로문화를 논하지 말라!

스타벅스? 스타퍽스?

시애틀에서 시애틀즈베스트커피(SBC)가 런칭된 후 1년 후 생긴 브랜드지만 상업적으로는 매우 성공해 마케팅의 신화로 불리고 있다. 영화 <유브 갓 메일>에서 맥 라이언과 톰 행크스가 매일 아침 마시던 커피가 바로 스타벅스 커피.

세계화에 반대하는 NGO와 안티스타벅스 참여자들은 스타벅스를 스타퍽스로 부르며 이디오피아, 콜럼비아 등 제 3국의 커피 생산지에서 원주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구매대금을 제대로 치르지 않는다며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또한 커피 및 푸라푸치노라는 스타벅스 히트상품 등에 유전자 조작성분 및 호르몬 성장 유제품이 사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 FAO 및 WHO 등은 스타벅스 등에서 커피에 첨가하는 몇가지 성분에 대해 규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현지에서는 인기상품이더라도 수입이 안 되는 커피와 음료수 등이 있다.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영혼 운운한다지만, 당신이 새로움과 유행에 흠뻑 빠져 있을 때, 마케팅의 성공으로 세계가 상업화의 열병을 앓고 있을 때, 어딘가에서는 과거의 향수나 느림의 철학을 그리워하며 "나 돌아갈래..."하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푹신한 소파와 모던한 테이블, CD로 흘러나오는 스윙재즈와 멋진 그림이 걸려 있는 커피체인점과는 달리, 빛이 바랜 벨벳 의자와 낡은 나무 테이블, LP판에서 흘러나오는 고전음악과 유명한 작곡가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 대학로의 학림다방에 가면 사라져가는 것들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을 꽤 만날 수 있다.

이제는 '다방'에서 '커피샵'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지만, 학림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영원한 '다방'이며, 이곳을 빼놓고는 대학로문화를 논할 수 없다는 사람들도 많다.


a 학림 방명록에 남아있는 김지하의 글

학림 방명록에 남아있는 김지하의 글 ⓒ 배을선

학림다방이 어떤 곳인가. 1956년 개업해 작가 전혜린의 에세이에 자주 등장하던 곳이며, 김지하 시인이 즐겨찾던 곳이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회와 문화를 논하던 곳이며, 예술가를 꿈꾸는 젊은이들의 쉼터였고, 그 시절 젊은이들이 연애의 장소로 꼽았던 이곳은 마로니에 공원과 함께 대학로의 역사를 대변해오고 있다.

학림과 함께 대학로의 문화를 꽃피우던 다른 장소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대학다방, 샘터사 지하의 밀다원 다방은 몇 년 전에 문을 닫았으며, 20년 넘게 자리를 지켰던 클래식 카페인 '오감도'도 사라졌다. 뿐만 아니다. 79년 간판을 걸고 84년부터 학림다방 건물 바로 1층으로 이사와 학림과 함께 대학로의 문화를 꿋꿋이 지켜왔던 '바로크레코드'점도 현란한 간판을 내건 설렁탕집으로 변신했다.

"창 밖을 보세요. 맥도날드, 스타벅스, KFC, 베스킨 라빈스, 자바커피…. 대학로에 문화가 있나요? 상업적 냄새가 짙게 풍기는 다국적 기업의 체인점과 술집이 작금의 대학로문화입니다. 몇 개 남은 소극장을 제외한다면, 이제 대학로에 남은 것은 학림뿐입니다"라고 학림다방의 4대 사장 이충열씨가 말한다.

창 밖의 풍경에 비하면 학림의 모습은 꼭 타임머신을 타고 7,80년대로 돌아온 것만 같다. 창 밖의 풍경은 산만하고 화려하며 소란스럽고 시끄럽지만, 이곳은 클래식 음악의 선율과 함께 흐르는 커피향기가 시간을 잊게 해준다.

a 학림의 방명록은 그야말로 역사다

학림의 방명록은 그야말로 역사다 ⓒ 배을선

옛 추억의 향기와 분위기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장소로서 학림다방은 여러 영화의 촬영장소로도 사용되었다. 곽경택 감독의 영화 <챔피언>에서 김득구(유오성)와 경미(채민서)가 운세를 뽑아보며 연애를 하던 곳이 바로 학림이며, <강원도의 힘>과 <번지점프를 하다>, 6월에 방송되었던 MBC의 특집드라마 <순수청년 박종철>도 학림에서 촬영되었다.

또한 김지하, 홍세화, 노무현 등의 예술인, 교수, 정치인들을 비롯 무엇보다 학림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남긴 메모와 글들은 여전히 학림에 남아 이곳을 들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읽을 거리를 제공하며 읽을 거리를 생산하게 한다.

a 전혜린이 죽기전날 앉았던 테이블이 쓸쓸히 남아있다 / 영화 <챔피언>에서 김득구가 경미와 연애했던 테이블

전혜린이 죽기전날 앉았던 테이블이 쓸쓸히 남아있다 / 영화 <챔피언>에서 김득구가 경미와 연애했던 테이블 ⓒ 배을선

전혜린이 자살하기 전날 앉았던 테이블은,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기라도 하는 듯 조용하고 그윽한 모습 그대로 남아 그녀와 그녀의 문학을 추억하는 많은 이들에게 삶이 무엇인지, 문학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주는 것만 같다. 세월은 가고 오고, 그녀도 떠났지만, 학림은 여전히 남아 있다.

다방에서 브랜드로 차별화 선언하는 학림

대학로에서 약속을 하는 10대는 마로니에 공원에서 만나며, 20대는 맥도날드에서 KFC까지의 체인점 앞에서 만나며, 30~40대는 학림다방에서 주로 만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3년 후면 개업 50주년을 맞는 학림다방은 사실 많이 낡고 늙었다. 옛것이 좋아 찾아온다는 손님들도 알고 보면 대부분 나이든 옛 손님들이다. 상업화의 물결이 거세게 들어오는 대학로, 아니 한국에서 전통과 향수라는 정체성만을 가지고서는 학림도 오래 버틸 수 없다. 그래서 학림이 선택한 길은 바로 변화다.

이충열 사장은 "스타벅스, 자바커피 등의 외국계 커피 재벌들과 싸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현대적인 로고와 홈페이지를 만들어 체인점으로 학림을 확장시키는 구상을 가지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자본이 부족합니다. 학림을 프랜차이즈하는 것은 전문대행업체에게 맡기고 저는 커피공부에 더 열중할 셈입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커피의 맛이거든요"라며 "학림의 커피 맛은 커피매니아들에게 이미 인정을 받았다"고 덧붙인다.

a 이 사장이 수입한 원두가 방안 가득이다

이 사장이 수입한 원두가 방안 가득이다 ⓒ 배을선

이충열 사장은 현대적인 분위기의 학림 커피체인점이 전국 주요 대학가에 들어서는 것을 계획중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스타벅스 같은 거물커피기업에 도전하는 상업적인 싸움이 아니라 더 맛있는 커피 맛을 손님들에게 제공하기 위한 예술적 도전이다.

학림다방 옆의 골목으로 한 20여미터 들어가면, 옛 한옥을 개조한 작은 집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커피를 로스팅하는 이충열 사장의 작은 커피공장이다.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커피로스터기가 육중한 덩치를 자랑하며 기자를 맞이한다. 그곳에서 또 한 10여미터를 더 들어가면, 조그만 전셋집의 방 2개가 커피원두자루로 가득 차 있는데 이 두 장소가 이충열 사장이 커피를 공부하는 은밀한 장소다.

a 그의 집이며 작은 공장에 우뚝 자리잡은 로스터기 - 커피의 생명은 로스팅이다

그의 집이며 작은 공장에 우뚝 자리잡은 로스터기 - 커피의 생명은 로스팅이다 ⓒ 배을선

이 사장의 말에 따르면, 미국이나 유럽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커피가 생산되지 않으니, 이디오피아나 콜럼비아 등의 제 3국에서 커피를 수입하는 것은 학림이나 스타벅스나 마찬가지. 커피는 원두의 종류에 따라서 등급이 나눠지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맛은 원두를 로스팅한 뒤 2주 안으로 끓여마셔야 가장 신선하고 훌륭한 맛을 낸다는 것이다.

"스타벅스 등의 외국계기업의 커피는 자국에서 로스팅한 뒤 몇 달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신선한 맛을 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너무 '브랜드'에 매달려요. 유명하면 맛있다고 생각하는데, 로스팅후 2주가 지난 커피의 맛은 이미 변질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학림의 커피는 제가 직접 로스팅해 2주 안으로 소비하기 때문에 언제나 커피의 풍부한 맛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학림의 커피맛을 인정하는 커피매니아들 중에는 주한 미국대사관 등에 근무하는 미국인 등, 외국인들도 많습니다."

이 씨가 하루에 20잔 이상 마셔대며 몇 년 간 공부하고 연구한 학림의 커피는 이미 브랜드 '학림'으로 판매중이다. 학림의 매니아인 한 교수가 디자인해주었다는 학림의 로고와 봉투에는 'Women's Petition'이라는 재미있는 영국의 커피이야기도 적혀 있다.

브랜드 학림. 누군가는 학림의 다방에서 브랜드로의 변신을 탐탁치 않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학로의 학림다방이 뿌리를 내리고 존재하는 한 브랜드 학림은 그 존재에 이름을 부여하는 꽃이며 열매다.

a 학림의 이충열 사장

학림의 이충열 사장 ⓒ 배을선


이충열 사장, 그는 누구인가?

▲ 전시중인 이충열 사장의 갯벌 사진
ⓒ이충열
학림다방의 제 4대 주인으로 17년간 학림을 맡아온 학림지기.

현재 광화문의 성곡미술관에서는 8월 4일까지 그를 포함한 9인의 단체사진전시회 '반(反)풍경'전이 열리고 있다. 75년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한 아마추어 사진가인 그는 사진이 커피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설명한다.

"커피 원두를 로스팅하는 작업은 사진의 현상작업과 비슷합니다. 좋은 커피와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시간과 온도 등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주어야 하거든요."

그는 사진도 흑백사진만 찍는다. 특별히 흑백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이 씨는 "흑백을 좋아하기보다는 아날로그의 감성을 좋아합니다. 흑백에는 아날로그의 감성이 묻어나오죠."

매일 학림다방을 지키는 그가 언제 옥구의 만경강 갯벌까지 내려가 작품 사진을 찍었을까? 오프더레코드로 해달라는 사연을 공개하자면,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밤을 새서 김제에 도착한 후 서울로 올라오기 전 새벽에 만경강 갯벌을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을 전시하게 된 거라고.

그가 학림지기를 하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어느 날 한 가족이 다방에 들어오더군요. '이 곳이 엄마 아빠가 연애하던 곳이야'라며 아이들에게 설명해주는 부모의 이야기를 듣고 학림이 존재해야할 이유를 찾은 것 같았습니다."

둘러보니 학림에는 여성손님이 별로 없다?

"요즘엔 전혜린의 글을 별로 안읽나봐요. 예전에는 전혜린을 좋아하는 여성손님들이 정말 많이 찾아왔었는데…. "

이름 모를 누군가, 학림의 방명록에 이렇게 적었다. 세월은 가고 추억은 남는다고…. 이충열 사장은 학림에서 커피에 추억을 끼워 판다. / 배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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