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박물관, 상심의 역사

<실크로드 여행기 세 번째>사막의 오아시스도시 둔황(2)

등록 2002.08.06 18:17수정 2002.08.0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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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막고굴 전경

막고굴 전경 ⓒ 디바차이나

명사산의 ‘모래울음’은 끝내 카메라 한 대를 잡아먹고 말았다. 그것도 가장 작고 연약해 보이는 내 자동카메라가 최대 희생양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아예 작동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카메라의 구석구석에는 가느다란 모래알들이 촘촘히 박혀서 셔터를 눌러봤자 ‘사각사각’하는 모래소리만이 들리고 있다.

다른 일행들도 잔뜩 긴장해서 각자의 카메라들을 점검해 봤더니, 어딘가 한군데는 문제들이 발생했다. 다행히 내 카메라처럼 ‘작살’나지는 않아서 한동안 열심히 모래들을 긁어내고 요리조리 손질을 봤더니 그런대로 원상태를 회복했다. 전날, 다른 사람들은 카메라가 모래울음에 잡아먹힐까봐 신주단지 모시듯 품속에 꼭 품고 다녔었다. 망가진 카메라를 한동안 처량하게 보고 있자니, 그놈의 모래바람 소리가 다시 윙윙거리는 것 같은 환청이 들린다.


모조품을 그리는 둥바오더의 후예들

숙소근처에 있는 길가 식당에서 아침으로 국수 한그릇씩을 먹었다. 다들 반그릇도 채 비우질 못한다. 벌써부터, 느끼한 중국음식에 입맛들을 잃어가는 것 같다. 어제 차가운 모래바람을 오랫동안 맞은 탓인지 선배는 감기증상까지 보이고 있다. 우리중 가장 ‘쌩쌩한’ 사람은 역시(?) 서용화가다. 국수 한그릇을 거뜬히 다 비우고도, 우리는 너무 짜서 입에도 못대는 오리알까지 맛있게 ‘잡수신다’. 나이는 우리중 제일 많은데도, 체력은 가장 젊다.

뭔가 섭섭하고 허전한듯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오니 사람들이 분주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지나가는 길거리 곳곳에서 서용 화가에게 인사를 건네는 둔황의 토박이들이 제법 많다. 모두들 “쉬라오스”(서 선생님)라고 부르며 친근한 아침인사를 하고 있다. 그 때, 저만치서 감은 지 오래된 듯한 헝클어진 장발을 휘날리며, 뭔가 범상치 않은 느낌이 드는 남자 한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양고기 삶는 냄새가 퍼져가고 있는 둔황의 아침거리에 썩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그 남자를 유심히 관찰하는 나에게, 일행중 한 친구가 “관심있냐”고 농을 던진다. 사실 조금 관심이 있었다. 기름기 좔좔 흐르는 헝클어진 장발에, ‘왕서방’처럼 두 손목을 양복 소매사이에 찌르고 안그래도 겅충하게 짧은 양복 바지를 접어서 발목위까지 걷어올린 폼이 세상에 둘도없는 양아치의 폼새였던 것이다. 아래 위로 걸쳐입은 쥐색의 양복은, 양복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다 낡아빠진 인민복에 가깝다.

a 막고굴

막고굴 ⓒ 디바차이나

고개를 땅으로 처박고 걷고 있던 그 남자가 우리앞을 막 스쳐지나갈 무렵, 갑자기 서용화가가 그 남자의 어깨를 ‘툭’ 친다. 그 남자도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더니 둘은 이내 반가운 악수를 하며 아는 체를 한다. 알고봤더니, 그 헝클어진 장발의 남자는 둔황 막고굴 연구소의 동료 연구원이자 화가란다. 그 말을 듣자, 목구멍까지 웃음이 차올랐다. 영락없는 촌동네 양아치같은 사람이 연구원에 화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게 믿기질 않았다.


나의 덜떨어진 ‘한국적 사고방식’으로는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은 좀더 그럴듯한 권위가 느껴져야 정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장발의 남자에게서는 권위적인 냄새는 고사하고 마치 양고기 삶는 국물냄새처럼, 며칠째 안감은듯한 머리냄새만 풀풀 나는 것 같다. 그의 그런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해보여서 오히려 호감이 갔다.

그도 우리처럼, 누군가와 밤새도록 진탕 술을 마셨다며 죽겠다는 얼굴표정을 짓고 있다. 그래도 “언제 술이나 한번 마시자”는 말을 잊지 않는 걸 보면 꽤나 술을 좋아하는 양반인 듯 하다. 조금 뒤, 왕서방 자세로 소매부리에 팔을 넣은 그는 다시 장발의 헝클어진 머리를 휘날리며 우리 반대편 거리로 사라져 간다. 문득, 수잔 휫필드의 ‘실크로드 이야기’에 등장하는 10세기 무렵의 둔황 막고굴 화가 둥바오더(董保德)가 연상되었다.


막고굴이 조성된 4세기부터 11세기까지 이곳 둔황에서 석굴들의 벽화를 복원하고 새로운 굴의 벽화들을 그렸던 수많은 둥바오더들은 실크로드 문화예술을 꽃피웠던 실질적인 주인공들이었다. 둔황의 지배자들이 여러차례 바뀌면서, 둥바오더들이 그린 석굴벽화의 양식도 서역풍에서부터 중국적인 화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술양식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수잔횟필드는, 둔황의 이러한 불안정한 정치정세가 막고굴 벽화 조성에는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했다고도 해석하고 있다. 즉 각기 다른 지배자들의 후원을 입은 화가들이 다양한 표현양식을 선보임으로서 기존의 양식과 새로운 양식이 융합되고 흡수되어 막고굴 벽화만의 독특한 표현양식을 낳았다는 것이다.

a 막고굴벽화

막고굴벽화 ⓒ 디바차이나

그 헝클어진 장발의 화가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둥바오더들의 후예인 셈이다. 서용화가의 말을 빌자면 그 후예들은 지금 둔황 거리에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팔리고 있는 막고굴 모조벽화를 그려서 짭잘한 부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그 옛날 이 거리를 똑같이 활보했을 많은 둥바오더들은 세기의 벽화들을 남기고, 그들의 후예들은 모조품을 그려서 돈을 번다니 참으로 재미있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농담같은 대발견, 둔황학의 탄생

서기 366년. 둔황을 지나가던 낙준이라는 승려는 어느날 석양 무렵, 이 부근에서 반짝거리는 금빛을 보았다. 어떤 예감에 사로잡힌 그는 부근에 굴을 파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막고굴의 시초였다. 그뒤, 실크로드를 여행하던 많은 승려들과 부근 주민들까지 가세해 사막의 절벽위에는 하나둘씩 굴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임시 수행용 승방이던 것이 나중에는 점점 규모가 큰 동굴 사원이 되면서 그것을 장식하기 위한 벽화와 불상들이 생겨나고 점차 실크로드를 오고가는 사람들의 공동 사원이 되었던 것이다. 전성기때만해도 석굴사원의 수가 약 1000개에 달해 ‘천불동’(千佛洞)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지금 현재 남아있는 석굴은 그 절반정도인 492개라고 한다.

11세기 이후 잊혀진 동굴사원 막고굴이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약 9세기가 지난 20세기 벽두의 어느날 아침이었다. 1974년, 시안(西安)의 한 무지한 농부가 밭에서 우물을 파던중 우연히 진시황릉의 병마용을 발견했던 것처럼, 그날 아침의 ‘대발견’도 여느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아침, 역시 한 무지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 졌다. 역사란 때때로 이렇게 농담같은 구석이 있다.

1900년 5월26일, 막고굴에 살고 있던 왕위안루라는 한 도사(道師)가 당시 16호굴을 지나던중, 우연히 벽의 틈새들이 갈라진 것을 보고 무심결에 막대기로 찔렀보았다. 그것이 바로 11세기 중엽이후 밀봉된 채 숨겨져 있던 장경동(藏經洞)의 우연한 대발견이었다. 당시 발견된 장경동안에는 대량의 불교경전들과 불화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막고굴의 벽화와 당시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둔황학’이라는 학문을 낳은 토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 무지한 도사의 대발견은 당시 중국에서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일자무식이었던 왕도사는 막연히 그것이 중요한 보물이라는 것만 추측했지 얼마나 값어치가 나가는 유물인지 판단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둔황의 비극이자, 중국인들이 막고굴을 일컬어 ‘상심의 역사’라고 일컫는 이유이다. 그 값어치를 안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의 탐험가들과 고고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a 막고굴앞 송나라 시대 조각상

막고굴앞 송나라 시대 조각상 ⓒ 디바차이나

지금도 둔황학의 발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인 스타인, 펠리오, 오타니같은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찾아와 왕도사에게 단지 은전 몇잎만을 주고 그 귀중한 문서들을 영국과 프랑스, 일본 등지로 빼돌릴 수 있었다. 청조말기의 격변기에 휩싸여 있었던 중국정부가 서태후의 폭정과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 등으로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가는 동안, 조그만 사막의 도시 둔황의 보물들도 하나씩 하나씩 중국을 빠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빠져나간 둔황의 고문서들은 서양의 중국학자들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둔황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낳았다. 둔황은 중국에 있지만, 둔황학은 서양에 있는 모순을 연출한 셈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중국인들이 깊이 좌절하고 있는 ‘상심의 역사’이다.

사막의 박물관, 상심의 역사

막고굴에 대한 얘기는 오기전부터 여기저기서 심심찮게 많은 얘기들을 주워들은지라, 막상 실물을 대했을때는 별다른 감흥이 일어나질 않았다. 어차피, 나같은 비전문가들의 눈으로는 그 많은 굴안에 조성되어 있는 벽화들의 ‘진가’를 간파하기는 힘든 일이다. 어찌보면, 약 100년전 왕도사가 장경동안에 묻혀있던 둔황 고문서들을 발견했을때의 무지한 상태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속된말로, 내 눈으로 직접 봤다는 ‘역사적인 의미’외에, 막고굴안의 벽화가 개인적으로 주는 감동은 없었다.

서용화가가 느꼈다고 하는 가슴떨림같은 전율을 나같은 날날이 여행객이 느낄리는 만무한 법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헝클어진 장발의 둥바오더의 후예들이나, 막고굴 앞에 써있는 “(막고굴은)중국의 상심의 역사”라는 문구에 더 관심이 간다.

‘사막의 박물관’이라는 별칭답게 막고굴의 위용은 멀리서도 그 규모가 짐작될만큼 사막의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있다. 지금은 굴안의 벽화들을 보호하기 위해 굴마다 자물쇠를 채워놓고 안내하는 연구원들이 열어주는 굴만 관람할 수 있다. 그나마도 관람할 수 있는 굴들이 한정되어 있어서 그 외에 소위 ‘특굴’이라고 불리는 굴들을 보고 싶을 경우에는 아주 비싼 특별 관람료를 지불해야만 한다.

석굴안의 벽화 하나하나에는 모두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세시간여정도 막고굴을 관람하는동안 서용화가는 우리들에게 그 많은 벽화들에 담긴 이야기와 역사들을 아주 진지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그것들을 다 기억하고 기록하기란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막고굴 하나로 둔황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난 판인데, 그 학문의 내용을 어찌 세시간의 ‘눈구경’과 ‘귀동냥’만으로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옆에서 함께 관람을 한 스님한분과 미국에서 온 교포분의 눈빛은 설명하는 서용화가만큼이나 진지하고 경건하다. 이해의 깊이도 우리같은 ‘날조된 여행객’들과는 차원이 다른 듯 하다. 관람을 마치고, 나중에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들어보니 그분들은 그동안 죽 중국을 여행하면서 불교문화유산 답사를 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a 막고굴 앞 사막의 언덕에 있는 연구원들의 묘

막고굴 앞 사막의 언덕에 있는 연구원들의 묘 ⓒ 디바차이나

그 위대한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봤다는것만으로도 흡족해하고 있는 우리들과는 달리, 두분은 자못 침통한 표정이다. 하루종일 햇볕도 못보고 막고굴 안에 갇혀있는 부처님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절로 답답해진다는 말씀들이었다. 굴의 문을 활짝 열고 세상사람들에게 그 환한 부처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이냐면서. 그러나 그 문화유산의 영구적인 보존에 더 애착을 가지고 있는 서용화가는 생각이 다르다. 갈수록 원래의 빛깔이나 채색 정도가 바래져 가고 있는 벽화들을 몰려드는 관광객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부처님을 자물쇠로 채울 수밖에 없다고.

열린 부처님과 갇힌 부처님중 어느 부처님이 중생들을 위해서는 더 좋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둔황이 더 이상 ‘상심의 역사’로 남기를 바라지 않는 중국인들에게는 벽화 한 점, 불상 한 개라도 더 잘 보존하는 것이 ‘상심의 역사’를 최소화하는 방법이 아닐는지.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옆에서 한무리의 중국인 관광객들을 인솔하고 안내를 하던 막고굴 연구소의 한 연구원의 한탄 비숫한 말이 떠오른다.

“막고굴이 우리나라의 상심의 역사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당시에 스타인이나 펠리오같은 사람들이 둔황문서들을 서양으로 빼돌리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문서들이 지금 중국땅에 잘 보존되어 있으리라는 법도 없죠. 혼란했던 청조말기에 그것들을 누가 잘 보존했겠어요. 또 광란의 문화혁명 시기에 파괴되고 소실되었을 가능성도 많고. 한편으로는, 둔황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그 귀중한 문서들이 그나마 서양의 박물관에서 잘 보존되고 연구되었던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중국 근현대사에 저질러진 역사의 ‘농담’은 한 막고굴 연구원의 자조섞인 한탄처럼 아마도 두고두고 중국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심의 기억이 될 듯 하다. 갇힌 부처님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처럼, 작은 사막의 도시 둔황에 드리워진 역사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는 생각이 든다.

사막위에 뜨는 별

선배는 결국 ‘뻗었다’. 아침부터 가벼운 감기기운을 보이더니 막고굴 관람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뻗어버렸다. 막고굴 앞에 새로잡은 숙소에 선배를 눕히고, 우리는 저녁나절부터 막고굴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사산의 석양을 못본 대신 사막위에 뜨는 별이라도 보자며, 서용화가는 열심히 별이 뜨고 달이 뜨는 막고굴의 황홀한 밤을 선전하고 있다.

곳곳에서 아는 체를 해오는 사람들 때문에 그는 자리를 옮겨가며 여기저기서 거나하게 부어주는 술잔들을 받느라 정신이 없다. 재미있는 것은, 어떤 자리에 가더라도 그냥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먼저 ‘게임’을 하고 술을 마신다는 것이다. 둔황에 온 이후 이곳에서만 발견한 특이한 풍경이었는데, 언뜻 보면 우리나라의 ‘가위바위보’게임과 비슷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규칙과 방법들을 들으니 그보다는 훨씬 복잡하다. 둔황에서 저녁무렵이면 길거리건 식당이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재미있는 광경이다.

게임에서 진 사람은 무조건 술을 ‘원샷’해야 한다. 얼마나 재미있게 게임들을 하며 술을 마시는지 옆에서 보는 우리가 더 실감날 정도이다. 서용화가는 매번 게임에서 졌다며,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를 정도로 술을 연거푸 ‘원샷’하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또 각자 맥주 한병씩을 챙겨서 막고굴 앞 사막위로 올라가자고 한다. 사막위에 뜨는 별을 보는데, 어찌 맨정신으로 볼수 있겠느냐면서.

막고굴 입구를 벗어나, 바로 앞에 언덕처럼 생긴 조그만 사막위에는 몇 개의 돌무덤들이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다. 막고굴 연구를 위해 평생을 바치다 이곳에 뼈를 묻은 연구원들의 묘라고 한다. 우리는 그 옆의 조금 떨어진 사막의 언덕위에 앉아 각자의 맥주병을 들고 별이 뜨기를 기다린다.

저녁 9시 무렵, 막고굴에 일제히 불이 켜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동굴사원의 황홀한 야경이 밝혀진 것이다. 두눈들이 동그래진 우리들은, 그 숨막히는 광경앞에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눈앞에 펼쳐진 장관만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다. 서용화가는 아마도 사막에 뜨는 별보다는 막고굴의 이 기가막힌 야경을 더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감기로 뻗은 선배에게는 절대로 ‘아무것도 본 것 없다’라고 입을 맞추기로 했다. 명사산의 석양을 놓친 선배에게 이 황홀한 막고굴의 야경을 말했다간 상심으로 감기가 덧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막고굴에 불이 들어오면서, 하늘에도 하나둘 별이 뜨기 시작한다. 사막위에 뜨는 별이었다.

간간히 불어오는 부드러운 미풍을 맞으며 사막위로 뜨는 별을 보고 있자니 오만가지 어줍잖은 감상들이 되살아난다. 막고굴위에 드리워진 무거운 역사나 중국인들의 가슴에 새겨진 둔황의 상심의 역사도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우리들은 다시 각자의 ‘꿈’에 도취된 채로 말없이 ‘병나발’을 불고 있다.

황홀한 막고굴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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