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의 새 책 <슬픈 나막신> 출간

- 서른 해만에 다시 빛을 봅니다

등록 2002.08.09 20:06수정 2002.08.10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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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슬픈 나막신> 겉장 왜 슬프고, 무엇이 슬플까요? 그리고 왜 나막신일까요?

<슬픈 나막신> 겉장 왜 슬프고, 무엇이 슬플까요? 그리고 왜 나막신일까요? ⓒ 우리교육

요즈음 새로 나온 책 가운데 어른아이 할 것 없이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을 찾으러 큰 책방에 나가 봅니다. 이런저런 책을 둘러보다가 깜짝 놀랍니다. 권정생 할아버지 새 책이 눈에 띄었거든요. 책이름은 <슬픈 나막신>. 권정생 할아버지가 쓴 머릿말을 보니 무려 서른 해 앞서 써둔 글이라는군요. <강아지똥>을 내놓은 뒤 썼다는데 다시 내자는 말을 듣고 다시 읽어 보니 너무도 못나 보여서 얼굴이 달아올랐다지요.

그 말씀을 듣고 책장을 천천히 넘겨 봅니다. 아. 그런데. 글쎄. 권정생 할아버지 말씀처럼 "너무 예쁘게만 쓰려는 낱말"이 많기는 하지만 오히려 지나치게 예쁘게 쓰려 한 말이 자기 부끄러움을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으로도 다가오며 참 애틋해요. 읽는데 걸리적거리지 않습니다. 없는 말을 꾸민 예쁜 말이 아니거든요. 어쩌면 우리들이 잊고 지낸 말. 어쩌면 우리가 다 알기는 하지만 미국말 큰물에 휩쓸려 잃어버린 그런 말이었거든요.


그러나 중요한 건 그런 말 몇 마디가 아닙니다. <슬픈 나막신>이 담은 줄거리가 참 가슴을 적셔요. 그냥저냥 가볍게 읽을거리는 대충 슥슥 읽힙니다. 그런데 <슬픈 나막신>은 안 그래요. 빨리 읽지 못하겠어요. 한 쪽을 읽고 또 한 쪽을 읽은 다음에 쉬 다음 쪽으로 넘기지 못합니다. 숨 한 번 돌리고 넘기지요.

. . 하나꼬가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가서 와악,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주춤 놀라며, 소리나는 쪽을 돌아다 보았다. 깨끗한 노랑 통옷을 차려입은 하나꼬가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넌 누구냐?" 그러나 할아버지는 이내 얼굴빛이 달라졌다. "하나꼬예요" 하나꼬는 할아버지의 주름 잡힌 손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오, 하나꼬!" 할아버지는 반가움에 목소리가 떨렸다. 모여선 아이들이 이상히 여기고 두 사람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스즈꼬, 잘 있어요?" 할아버지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고는 하나꼬의 어깨를 한쪽 팔로 끌어안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 눈에 이슬방울이 맺혔다. "나, 지금 스즈꼬가 보고 싶어요. 할아버지, 따라가 볼까요?" 하나꼬는 뺨으로 흐르는 눈물을 할아버지의 옷소매에 문지르며 물었다. "안 돼. 하나꼬는 착한 아이지 않어? 나중에 크거든 만나 보기로 하자" <14~15쪽>


무슨 대목일까요? 하나꼬는 고아랍니다. 그래서 고아원에서 자랐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부잣집에 수양딸로 들어갔어요. 그래서 자기 아우 스즈꼬와 헤어졌답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있던 고아원에서 청소부로 일한 분이고요. 고아원 살림이 좋지 못해 청소부 일을 하는 틈틈이 금붕어를 길러서 내다 팔아서 돈을 모아 고아원 살림에 쓴다지요.

.. 용이는 갑자기 큰소리로 섧게 흐느껴 울었다. "흐윽... 앙! 카즈오네 형이 때렸다, 뭐", "카즈오네 형이 뭣 때문에 때리니? 네가 맞을 짓을 했으니까 때렸겠지" 상주댁은 역시 용이가 못 난 탓으로만 여긴다. "손바닥을 요렇게 하고서..." 용이는 제
손바닥을 쫙 펴 보이며, "마구 때렸어. 그러고는 조선놈이라 욕했어, 흑흑...", "뭐라고?" 상주댁은 그제야 얼굴빛이 달라졌다. "카즈오네 형이 나한테 조선놈의 자식이래... 흑흑..." 상주댁은 용이의 얼룩진 얼굴을 행주치마로 닦아 주고 나서, 잠시 동안 품에다 꼭 안았다. 먼 곳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층계 아래에 서 있는 준이와 하나꼬를 내려다보고 쓸쓸하게 웃었다. "준이는 큰애야. 저렇게 언제나 얌전하게 놀고 있으니까 누가 때리지도 않고 말썽도 일으키지 않잖니?" <39~40쪽>


<슬픈 나막신>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서 있던 이야기를 꾸민 책이에요. 일본으로 건너가서 살아가는 많은 조선인들. 그리고 일본 땅에서 태어나 일본말을 하면서 자라는 용이, 준이 같은 아이들. 하지만 조선인 어머니들은 일본말을 못하고 조선말만 하지요. 나아가 관동대지진으로 조선사람들은 숱하게 학살을 당했고, 조선사람이라는 까닭 하나로 어린아이까지도 툭하면 두들겨 맞지요. 용이는 바로 `조선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동네에서 구박을 받는 아이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 분이는 비죽이 나오는 콧물을, 이번에는 소맷자락으로 문질러 닦았다. 음악책과 고무공을 제 소꿉이 든 종이상자에 고이 넣었다. 뚜껑을 꼬옥 닫으며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 수세미처럼 엉클어진 노랑머리가 아래로 떨구어졌다. 때가 반질반질 눌어붙은 통옷은 반 누더기가 되어 있다. 빨간 빛깔이 거의 까망으로 더럽혀져 있다. 분이네 어머니 호남댁은 세 끼 밥 먹는 시간 외엔 거의 아이들을 잊고 산다. 분이의 동생 순아와 금식이도 누더기를 입고 있다. 부엌방에 셋을 밀어 넣고는 호남댁은 술을 팔았다. 밤늦도록 손님들이 떠들다가 돌아간 뒤에는 다시 남편과 싸움이 벌어진다. 분이는 동생들과 부엌방 구석에서 바들바들 떨다가 저녁밥도 굶은 채 잠이 들 때가 많았다. 타고날 때부터 둔한 머리에다 이런 집안 사정 때문에 분이는 점점 멍청이가 되어갔다 <43~44쪽>

.. "엄마, 분이 더러워" 준이는 좀 볼멘 목소리로 말하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무엇이 더럽니?" "손에 새까맣게 때가 묻은걸. 그러면서 나한테 부채과자를 주려고 하잖어" 청송댁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더라도 받아먹어야지" "......" "분이가 고맙지 않니? 저도 안 먹고 널 주려는 건데" 준이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나니, 왠지 자기가 너무했던 것 같다. 분이는 자기가 먹고 싶은 것도 참고 과자를 가지고 왔을 게다. 분이네 집안이 준이네보다 훨씬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빠도 언니도 없는 분이는 저희 어머니한테 자주 두들겨맞기만 한다. 빗자루로 종아리가 퍼렇게 멍이 들도록 맞아도 누가 말려 주지도 않는다. 캄캄한 밤중까지 현관문 앞에 쫓겨 나와 발발 떨며 앉아 있는 것을 종종 보았다. 쭈그리고 앉아서, 분이는 훌쩍거리며 울었다. 그럴 때면 준이네 어머니가 데려다 따뜻한 국물에 밥을 말아 주기도 했다. 분이는 씹을 사이도 없이 홀딱 먹어 버린다. 청송댁이 손을 잡고 저희 집에 데려다 주면 손님들과 술을 마시던 호남댁은 벌겋게 된 얼굴로 "어서 들어와 자빠져 자" 하고 모질게 내뱉는 것이었다 <47~48쪽>



아. 이 대목을 지하철 안에서 읽다가 책을 덮었습니다. <슬픈 나막신>을 읽던 제 눈에 이슬이 맺혔거든요. 사람들 많이 타며 오가는 전철 안에서 책을 읽다가 눈물을 똑똑 떨어뜨리면 남 보고 부끄러우니까요. 그래, 책을 덮고 가만히 창 밖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 우리 나라 땅도 아닌 일본땅에서 어렵사리 살아가고 서로서로 아등바등 살며 욕하고 욕먹고 때리고 맞는 사람들, 그렇게 애먹고 힘든 사람들 처지이지만 그래도 서로 등을 쓰다듬거나 보듬는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이미 저승사람이 된 분들도 많겠지요.

분이, 준이, 하나꼬, 스즈꼬, 청소부 할아버지... 이 사람들은 지금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요. 일본 어린아이들은 왜 조선 어린아이들을 괴롭히고 놀려야 했을까요.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준이와 하나꼬는 피가 다른 사람이지만 그 둘은 스스럼없이 지내기도 합니다. 왜 우리 어른들은 이렇게 스스럼없이 서로를 아끼고 생각해 주지 못할까요.

조선에 살면 조선사람이고, 일본에 살면 일본사람입니다. 하지만 조선에 살든 일본에 살든 똑같은 사람이지요. 똑같이 누구에게나 소중한 아버지 어머니입니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딸이고 아들이에요. 그런데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에서 졌으며 전쟁통에 수많은 아버지 어머니 딸 아들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조선사람은 식민지 백성이 되어 친일부역도 하고 가난 속에서 뒹굴다 못 견뎌 일본으로 건너가 끼니라도 때우고자 애쓰기도 하지요. 일본으로 건너가서 죽을 고생만 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날마다 눈물로 멍든 얼굴을 문지르면서 살아가기도 하고요.

<슬픈 나막신>이라는 책. 저는 이제 겨우 1/5밖에 못 읽었습니다. 아니 쉽게 다 읽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터를 오가며 전철 안에서 이 책을 읽다가 또 눈물이 글썽해지는 대목이 있으면 책을 덮어야 하니까요. 한 쪽 한 쪽 가슴을 적시는 이야기들을 쉽게 읽기 어렵고 빨리 읽어버릴 수도 없고요.

아직 미처 다 읽지 못한 책이지만 그 느낌을, 이야기를, 가슴 적시는 사람들 삶을 함께 나누고픈 마음에 소개해 봅니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보통 어린아이들이 읽으면 좋을 글을 쓰시지만 그 글은 아이들에게만 좋은 글이 아니거든요. 어른도 읽고 아이도 읽으며 웃고 웁니다. <몽실언니>가 처음 나왔을 때 경북 안동에 있는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책을 읽다 눈물을 흘리며 `바로 자기들 이야기'라고 했듯 어른에게도 자기 삶을 돌아보게 해 주고, 그런 삶을 겪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자기 아버지 어머니'가 이런 삶을 살아오셨구나 하는 걸 보여 주거든요.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은 전쟁도 싸움도 미움도 사랑도 눈물도 웃음도 지금 삶과는 아주 동떨어진 다른 나라 이야기 같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느낌과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 작품도 좋은 작품은 우리 아이들에게 감동을 주듯, 전쟁통 이야기, 옛날 이야기, 철지난 어렵던 때 이야기도 좋은 작품은 아이들 모두에게 감동을 주거든요.

그래서 참된 이야기는 이처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일고여덟 꼬맹이까지도 가슴 벅차게 읽을 수 있다고 보아요. <슬픈 나막신>은 중고등학교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지은 책이라지요. 그러나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도, 대학교를 다니는 사람들도, 사회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어른들도,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짧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참 애틋하면서 눈물겹게 다가오는 <슬픈 나막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여름에, 이 더운 여름에 조용히 <슬픈 나막신> 한 권을 함께 읽어 보면 좋겠습니다.

- 책이름 : 슬픈 나막신
- 지은이 : 권정생
- 펴낸곳 : 우리교육(2002년 8월 10일)
- 책값 : 7000원

덧붙이는 글 | <슬픈 나막신>을 읽고 가슴에 따뜻하게 다가오는 무엇을 느낀 분이라면 권정생 할아버지가 쓴 다른 작품들도 읽어 보세요. <몽실언니> <점득이네> <바닷가 아이들> <짱구네 고추밭 소동> <비나리 달이네 집> <한티재 하늘> <깜둥 바가지 아줌마> <팔푼돌이네 삼형제>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사과나무밭 달님> <하느님의 눈물>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먹구렁이 기차>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 모두모두 따뜻하답니다.

덧붙이는 글 <슬픈 나막신>을 읽고 가슴에 따뜻하게 다가오는 무엇을 느낀 분이라면 권정생 할아버지가 쓴 다른 작품들도 읽어 보세요. <몽실언니> <점득이네> <바닷가 아이들> <짱구네 고추밭 소동> <비나리 달이네 집> <한티재 하늘> <깜둥 바가지 아줌마> <팔푼돌이네 삼형제>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사과나무밭 달님> <하느님의 눈물>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먹구렁이 기차>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 모두모두 따뜻하답니다.

슬픈 나막신 - 우리문고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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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육,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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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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