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 2일자 조선일보조선일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문부식씨와 ‘관련된’ 글을 다시 쓰고 있다. 그것은 내 관점에서는 도저히 ‘우리 안의 폭력’론을 전유하거나 언급조차 할 자격이 없는 조선일보의 한 논설위원이 이 문제에 관해 나의 글의 한 부분을 들면서까지 이 의제를 아전인수하는 작태를 목도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이른바 ‘논객’ 중의 한 사람인 류근일씨가 지난 8월 2일자 [트렌드&아젠다]라는 칼럼란에 쓴 글이 그것이다.
그는 그 글에서 “2000년대의 인간이 80년대의 인간을 비판하는 것은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일인가”라고 물으면서 ‘386세대’의 “이론, 그들의 근·현대사관, 그들의 정서와 마음, 그들의 행태, 그들의 문화”를 “21세기적 시각에서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고, 반드시 그래야만 발전이 있다”고 주장하고, 문부식의 메시지가 온갖 성현들이 설파해 온 ‘비폭력 저항의 철학’에 다름 아닌데 낡은 “80년대의 관성”이 그것을 비난하고 폄하한다는 것이다.
물론 21세기의 최선의 인간은 80년대의 인간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갖추지 못한 인간들은 결코 80년대의 인간들을, 그것도 자신의 삶과 죽음, 젊음과 미래를 모두 걸고 싸웠던 인간들을 비판할 수 없다. 문부식씨는 가능하다. 나는 지금 그가 이번에 저지른 명백한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분명히 그와 적지 않게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삶을 통해 80년대를 비판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선일보를 비롯한 저 질긴 수구반동세력들은 절대 이 비판에 무임승차해서는 안 된다. 단 한 사람의 무고한 희생자에 대한 성찰 과정에서 문부식씨는 ‘자기 안의 폭력’을 발견했다.
하지만 수십만의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몰고, 그들을 학살한 신군부세력의 절대적 원군이 됨으로써 ‘신문 그 이상의 신문’이라는 구역질나는 자리에 오른 조선일보는 한번도 자신들의 총칼보다 더 잔인한 펜과 똥 덩어리보다도 더 더러운 혀를 ‘폭력’이라 반성해 본 적이 없다. 그러기는커녕 그 사악한 펜과 더러운 혀를 놀려 지금도 끝없이 80년대의 민족 민주운동이 애써 이룬 것들을 무화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