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행복할 수 있는 비법은?

<중국실크로드 여행기 여섯 번째> 불의 땅 투르판 (2)

등록 2002.08.18 03:51수정 2002.08.19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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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판 거리의 위구르인들
투르판 거리의 위구르인들김미선
투르판의 아침 거리에는 바쁜 사람들이 하나도 없다. 베이징 거리처럼 꽉 막힌 도로도 없고 미어터진 시내버스를 타고 출근길에 시달리는 피곤한 도시인들의 모습도 없다. 거리는 한산하기 그지없어서 그 넓은 도로위로는 당나귀가 끄는 느긋한 마차 몇 대와 꾸물거리는 낡은 시내버스들이 간간히 도로를 메우고 있을뿐이다.

머리에 '두어빠'(이슬람권 남자들이 흔히 쓰는 네모 납작한 모자)를 눌러쓴 위구르 남자들과 역시 형형색색의 두건을 쓰고 있는 위구르 여인네들이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서 아침부터 정겨운 수다를 떨고 있다. 아침거리 걱정도 없어 보인다. 뜨거운 밥과 국을 먹는 우리네와 달리 이들은 그저 '낭'이라고 불리는 밀가루빵과 양젖으로 만든 요구르트 한잔이면 가뿐히 아침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가만히 보면, 이들 위구르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중국인들의 아침식사는 참으로 간편하다. 나만해도 베이징 집에서 가끔 아침을 먹을 적에는 한국에서처럼 번거롭게 밥과 국을 만들어 먹지는 않는다. 집앞에 있는 식당에 가서 우리돈으로 300-400원하는 국수 한그릇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싼 요티아오(油條, 기름으로 튀긴 길죽한 빵모양의 밀가루식품)와 콩국물 한잔이면 배가 든든해 온다.

김치와 고추장, 된장에 길들여진 우리 혀가 이러한 중국식 아침식사를 받아들일려면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오래 살다보면 이런 아침식사가 모든 면에서 참 실용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용이나 시간, 영양등 모든 면에서 '강추'하고 싶은 아침식사이다. 중국의 이른 아침거리에는 늘 이렇게 간편한 아침을 먹는 중국인들의 모습과 아침 먹거리 시장이 거리 곳곳에 널려있다. 이것 역시 중국의 또다른 일상의 진풍경이다.

위구르인들의 주식중 하나인 라티아오즈를 만드는 모습.
위구르인들의 주식중 하나인 라티아오즈를 만드는 모습.김미선
투르판의 이른 아침 거리에도 위구르인들의 주식인 밀가루 빵 '낭'을 자전거뒤에 가득 싣고 달리는 어린 소년들과 소녀들의 모습이 제법 많다. 대부분 집안의 재래식 화덕에서 구워가지고 나오는 이 낭을 파는 모습은 위구르인들이 사는 신장의 어느 지역에서나 흔하게 볼수 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열 일곱 살의 한 위구르소녀도 막 집에서 만든 낭을 싣고서 아침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마침 우리앞에 멈춰선 그 소녀에게 다가가 하나에 얼마냐고 물었더니 '5마오'란다. 우유나 커피에 찍어먹어도 채 하나를 다 먹지 못할만큼 크고 넓적한 낭 하나가 우리돈으로 단돈 75원정도밖에 안한다. 얼마나 실용적이고 알찬 주식인가.

중국어를 나보다도 더 못하는 그 위구르소녀는 더듬더듬 단어 나열식의 몇마디 중국어로 겨우 자기 나이와 집에 몇식구가 살고 있다는 정도의 얘기를 들려준다. 자기보다 어린 동생까지 포함해서 모든 식구가 아침 저녁으로 낭을 만들어 판다고 한다. 학교는 다니고 있느냐는 질문에,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못 알아들은 것인지 그냥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있다. 아무래도 안다니고 있다는 뜻인 것 같다. 겨우 5마오짜리 낭 하나만 달랑 사면서 이것저것 귀찮게 물어대는 이방인 손님들 때문에 그 어린 소녀는 십여분이 넘는 긴 시간을 뺏겼다. 그래도 싫은 내색 한번 안하며 시종일관 환하게 웃고 있다. 역시 눈빛이 참 선량했다.


낭을 뜯어먹으며 이리저리 한가하게 투르판의 아침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기분은 한없이 자유롭고 편안하다. 카스에서 이른 아침거리를 거닐었을때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역시 뭐라고 설명할수 없는 특유의 평온함이 느껴진다. 한 위구르인의 말처럼 알라의 평화가 깃들어 있기 때문일까.

군대간 남편 기다리는 젊은 위구르 여인 샤리파


아이들
아이들김미선
젊은 위구르여인 샤리파의 집을 들어가게 된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세계에서 제일 큰 흙의 도시였던 쟈오허구청(交河故城, 중국의 당나라 시대 투르판에 있었던 옛 왕국)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잠시 골목길 민가를 돌아다니다 만나게 되었다.

투르판에 있는 보통 위구르인들의 민가는 낮이건 밤이건 항상 문이 열려있다. 그 열려진 문틈으로 낯선 이방인들이 집안 내부를 들여다 보거나 감히 문을 밀치고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신기하다는 듯이 또는 귀한 손님처럼 반갑게 맞아주기까지 한다.

샤리파도 그렇게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열려진 문 사이로 어린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잠시 기웃기웃 안을 '정탐'했더니, 그녀는 젖가슴을 내놓은게 부끄럽지도 않은 듯 싱긋 웃으며 환대를 해준다.

아이는 아직 채 한살도 안되어 보이는 예쁜 공주님이다. 화려한 무늬가 수놓아진, 아이를 감싼 작은 이불은 지금까지 한번도 빨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이의 옷도 여기저기 시커먼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있다. 그래도 방긋방긋 웃으면서 엄마젖을 맛있게 잘도 먹고 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상당한 미인형인 샤리파는 28살의 젊은 새댁이다. 그녀의 옆에서 언니인 누즈라티는 재봉틀을 돌리며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시장에 내다팔, 화려한 수가 놓아진 보자기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샤리파는 그 집에서 언니네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샤리파의 남편은 지금 우루무치에 있다. 군대에 자원입대한 군인이었던 것이다. 군인이라는 말에 처음에는 한족인가 했더니 같은 위구르인이란다. 샤리파의 중국어 솜씨는 다른 위구르인들과는 달리 보통수준은 넘는다. 아무래도 백화점에 근무하는 그녀의 직업이 많은 작용을 한 것 같기도 하다.

한 몇 년 그렇게 군인생활을 하고 오면 다른 위구르인들보다 좀더 좋은 직업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자원해서 입대했다고 한다. 소수민족인데다 학벌도 변변찮아서 대도시로 나가 좋은 직장 구하기도 힘들고, 투르판에서 먹고 살기도 빠듯해 군인을 자원했다는 얘기다. 주변 친척들이 군대를 갔다오면 정부에서 알아서 좋은 직장을 추천해줄 것이라고 부추겨서 그렇게 결정해 버렸다고 한다. 소수민족이 인민해방군을 자원하면 아무래도 대우가 달라지긴 하나보다. 그렇게 해서 샤리파의 남편은 결혼한 지 일년도 안되어 우루무치로 떠났다.

남편이 보고 싶지 않냐고 했더니 그녀는 아주 재미난 대답을 하고 있다. "보고싶어도 볼 수 없을땐 안보고 싶어하면 되는 거예요. 또 대신 우리 아기가 있으니까 별로 안보고 싶어요(웃음)." 젊은 위구르 새댁이 말을 참 잘한다.

젖을 다 먹인 샤리파는 아기를 평상위에 눕히더니 바삐 일어선다. 그러면서 부엌으로 들어가 그릇 두 개와 젓가락들을 챙겨 내오는 것이다. 손님대접을 해야 한단다. 그녀가 우리에게 대접한 음식은 위구르인들의 또다른 주식 쮸아판이다. 양고기를 넣어서 만든 일종의 볶음밥이다. 그녀의 정성을 생각해서 억지로 한그릇을 다 비우기는 했지만 먹는게 영 고역이었다. 다른 친구는 나보다 더 비위가 안맞는지 몇 젓가락 뜨다가 만다. 그래도 먹고 나서는 '참 맛있다'고 그녀의 음식솜씨를 칭찬한다. 그 말에 고무되었는지 샤리파는 또다시 한그릇을 더 퍼줄 생각이었다.

다시 일어서려는 그녀를 말리며, 우리는 '갈길이 바쁘다'는 핑계로 황급히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못내 아쉬운 듯, 샤리파는 나에게 자기집 주소를 적어준다. 돌아가면 꼭 편지하라고. 우루무치에서 남편이 휴가차 집에 오면, 자랑할 거란다.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고. 문밖까지 나와 오래도록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샤리파를 보니, 돌아가면 진짜로 꼭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녀에게 한통의 편지도 보내질 못했다. 샤리파가 아직도 내 편지를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나.

대를 이어 물려받은 쑤공타의 행복한 문지기

쑤공타 옆 이슬람 사원 문
쑤공타 옆 이슬람 사원 문김미선
투르판의 한낮은 말 그대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염이다. 마침 간 시기가 한여름이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오월초인데도 대낮 기온은 이미 베이징의 한여름 기온과 맞먹고 있었다. 건조한 사막 기후라서, 그늘로만 들어가면 시원함을 느낄수 있지만 그냥 맨 거리를 돌아다닐라치면 여간 고통스러운게 아니다. 온지 하루만에 얼굴이 온통 벌겋게 익었다.

어디 시원한 오아시스 같은 그늘속으로 들어가 한잠 자고 난뒤 조금씩 서늘해지는 저녁에 다시 어슬렁거리면 딱 좋으련만, 나의 부지런한 일행들은 지칠줄도 모르고 강행군을 한다. 짧은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들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한낮의 불같은 더위에 이미 의욕을 상실한 나는 '숙소에 들어가 잠시 쉬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일행들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행복하자고 떠나온 여행이 그 순간만큼은 불행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어쩌자고 오월의 대낮은 이렇게 뜨거운 것인지.

꾸역꾸역 발걸음을 옮기며 투르판에서의 '도장찍기' 관광길을 재촉한다. 전국 어디를 가나 유명 관광지라고 하는데가 다 그렇고 그래서, 이제는 그런 '도장찍기' 관광에 신물이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온 이상 안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가는 곳은 투르판시 동쪽에 있는 이슬람 고대탑 쑤공타(蘇公塔)이다. 청나라때 지어진 이 탑은 당시 투르판의 한 지배자가 청나라에 대한 충성과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지은 탑이다. 탑의 높이만 무려 44미터가 넘는다.

고대 이슬람 탑 쑤공타
고대 이슬람 탑 쑤공타박현숙
하늘을 찌를 듯이 장대처럼 높이 솟아있는 쑤공타안에는 관광객이라고는 우리밖에 없다. 아직 본격적인 여행철이 아니라서 그런지 투르판 시내에도 외국인 관광객이 그다지 많이 눈에 띄지는 않았다. 쑤공타에서 볼거라고는 하나도 없다. '눈도장'이나마 찍으려고 온 무거운 발걸음이 몹시도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이라도 찍고, 역사나 유적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나마 감회가 새로울지 모르겠지만 이도 저도 아닌 나같은 맹탕 관광객은 도무지 재미를 찾을수가 없다.

여기저기 사진들을 찍고 있는 다른 일행들을 놔두고 쑤공타 바로 옆에 이웃해 있는 규모가 제법 있는 이슬람 사원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거기가면 뭐좀 재미있는게 있을까 하고.

사원안에는 중년의 한 아저씨가 우두커니 앉아 있다. 처음에는 발견을 못했다가 흥얼거리는 노래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그 아저씨가 그렇게 혼자 앉아 있는 것이다. 누가 들어오는지 신경도 안쓰는 얼굴이다. 그래도 나를 보더니 한번 씨익 하고 웃어주기는 한다. 그리고는 계속 혼자서 무슨 노래인가를 흥얼거린다. 갑자기 흥미가 '동'하기 시작한다.

"아저씨, 여기서 뭐하세요?"
"나? 이렇게 노래부르고 있잖아. 랄라라"
"아니, 여기서 왜 이렇게 앉아 있는 거냐구요. 기도시간을 기다리고 있나요?
"난 이 사원의 문지기라구. 여기가 나의 직장이야."
그때, 나의 일행중 한명이 카메라를 들고 들어왔다. 그러자 그 문지기 아저씨가 당장 소리친다, "이 안에서는 절대로 사진은 못찍어!"

재미도 없던 차에 이 문지기 아저씨의 사연이나 한번 들어볼 생각이었다. 역시 더듬더듬하기는 하지만, 그 위구르 아저씨는 기본적인 중국어를 어느정도 구사하고 있었다.

"어디서 왔어? 한족인가?"
"아뇨. 한국에서 왔어요. 한국 알아요?"
"몰라. 그게 어디 붙어있는 나라야?"
"...."

"왜 일은 안하시고 혼자서 노래만 부르고 있나요?"
"이게 일인걸. 하루 다섯 번씩 정해진 기도시간이 아니면 난 할 일이 없어. 노래라도 부르지 않으면 심심해서 어떻게 지내. 랄라라."
"언제부터 이 일을 하기 시작했나요?"
"우리 아버지가 먼저 시작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내가 이 일을 물려받았지. 이 사원은 아주 어렸을때부터 나의 놀이터이기도 했다고. 벌써 십오년째 문지기를 하고 있지."

말을 하는 중간 중간에도, 문지기 아저씨는 계속 노래를 흥얼거린다. 노래는 이미 그의 주요 '업무'가 되어버린 듯 하다. 둘러보니, 아저씨 말대로 문지기라고 해도 딱히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기도시간이 끝날때마다 바닥의 방석들을 정리하고 관광객들의 '몰래카메라'를 단속하는 것 외는 세상에 일이라는게 없다. 그래도 하루종일 사원안에 앉아서 '근무'를 해야 한단다.

모욕당하지 않은 '행복'

포도밭 옆에서 낙타를 타고 있는 위구르청년.
포도밭 옆에서 낙타를 타고 있는 위구르청년.김미선
갑갑했던지 그 문지기 아저씨가 밖으로 나간다. 나보고도 나가라는 시늉을 한다. 문지기가 자리를 비우니 관광객도 나가야 하나보다. 그는 또 사원앞에 있는 계단중간에 우두커니 앉는다. 턱을 괴고 사원앞에서 놀고 있는 두 아이들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래도 얼굴은 연신 싱글벙글이다. 할 일없는 나도 그 아저씨 옆에 앉아서 계속 '새살'을 떨어볼까 폼을 잡았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재미없을게 또 뭐람! 난 매일매일이 너무 즐겁다고. 가끔 심심하기도 하지만. 쟤네들 귀엽지 않아?"
손으로 계단아래서 놀고 있는 두 아이들을 가리킨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다.
"귀엽네요"
"우리 애들이야. 히히."

조금뒤, 머리에 비닐을 뒤집어 쓴 웬 위구르아줌마 한명이 우리쪽으로 걸어오는게 보인다. 파마라도 한 것인지 머리위로 파마할때나 뒤집어쓰는 비닐모자를 쓰고 있다. 그 아저씨의 부인이었다. 아줌마는 밖에서 놀다가 이제 집에 들어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 위구르 아줌마의 머리에 뒤집어쓴 비닐모자가 무슨 용도냐고 물으니, 아줌마가 대뜸 비닐모자를 벗어서 직접 보여준다. 머리위로는 온통 빻은 봉숭아잎이 올려져 있다. 염색을 하기 위해서란다. 그러고 보니 투르판 시내 곳곳에서 가끔 그렇게 머리에 비닐을 뒤집어 쓴 여인네들을 봤었는데 그게 다 봉숭아 머리 염색이었나보다. 도저히 웃지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세상에 봉숭아잎을 빻아서 그걸로 손톱염색을 하는게 아니라 머리염색을 하다니!

그 문지기 아저씨와 아줌마는 내가 맘에 들었는지 자기집으로 가자고 '초대'제안을 해온다. 얼씨구나 하며, 집이 사원에서 멀리 있냐고 물으니 손가락으로 바로 옆을 가리킨다. 계단과 이어져있는 작은 동굴이 바로 그들의 집이었다. 세상에.

동굴안 집은 일단 덥지 않아서 좋을 것 같았다. 긴 침대위에 그들 전가족이 함께 기거를 하고 있었다. 부엌이라고 부를만한 공간도 따로 없고 그저 작은 동굴이 방이자 부엌이자 아이들 공부방이었던 셈이다. 그들은 또 손님대접을 한다며, 점심에 먹다 남은듯한 낭 몇조각과 차를 내온다. 낭은 따로 접시에 담는 것이 아니라 침대위의 시커먼 이불을 접시 삼아 놓고 찻잔도 여기저기 입술지문들이 가득하다. 그래도 그다지 더럽다는 생각이 안든다. 그들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놀던 아이들이 들어오자 일렬로 세워놓고 소개를 시켜준다. 큰아이는 아직 안 돌아왔고 사원앞에서 놀던 둘째와 셋째다. 낯선 외국인 손님앞에서 키득키득 웃기만 하는 그 아이들은 잠시뒤 어디선가 또래의 친구들을 또 데리고 왔다. 귀한 외국인 손님이 우리집에 왔다고 구경시켜 주려는 게다. 따라들어온 아이들과 그들 가족 모두가 나를 둘러싸고 싱긍벙글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내가 아니라 아무래도 그들이 날 구경하는 재미가 더 큰 것 같다.

동굴 한구석으로 얼마 안되는 살림살이들이 이사라도 할 모양으로 따로 꾸려져 있는게 눈에 띈다. 왜 저렇게 쌓아두었냐고 물었더니 그 문지기 아저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또 싱긍벙글하며 대답을 한다.

"우리 곧 이사 갈거야. 아까 사원옆에 한참 새로 짓고 있는 공동주택들 봤어? 그중에 우리집도 있어. 사원측에서, 아버지의 대를 이어 문지기를 했다고 그 공으로 새집을 지어주는 거라고. 그래서 이사갈 준비를 미리 해놓는거야."
"언제 이사가는데요?"
"한 시월쯤에."

시월이면 아직도 몇 달은 더 기다려야 하는데 그들은 벌써부터 새집으로 이사갈 준비에 부풀어 있었다. 아버지때부터 줄곧 그 작은 동굴에서만 살아왔다는 문지기 아저씨의 '집'에 대한 소박한 소망이 드디어 올 시월이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동굴집에서 지상의 번듯한 새집으로 이사간다며 어린아이처럼 마냥 행복해하는 그들 부부를 보니 가슴이 울렁거리는게 마음 한구석이 싸아해져 온다. 아저씨는 그 행복한 표정으로 마치 혼자말처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두가 다 알라의 보살핌 덕이지".

어린 막내 아들 녀석만큼은 제발 공부를 잘해서 자기처럼 또 사원 문지기를 안했으면 좋겠단다. 어렸을 때, 아저씨의 아버지도 그렇게 사원문지기 하는걸 싫어해서 매일 '공부하라'고 다그쳤지만 워낙에 노는걸 좋아하다보니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아버지 뒤를 이어 사원 문지기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문지기 아저씨의 말을 빌자면, 그 막내 아들녀석도 어찌나 공부를 싫어하고 못하는지 꼭 자기 어렸을때를 보는 것 같단다. 그래서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 한다. 또 자기대를 이어 삼대째 문지기 가문이 탄생할까봐.

그래도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모두가 다 '알라의 보살핌 덕'이라고 말하는 그 아저씨네 가족은 우리가 영원히 알지 못하는 '행복의 비법'을 이미 오래전에 체득한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것은 누구에게 물려받은 것일까.

이방인들에게 따뜻한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비법'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땅이 관광객들에게 한없이 모욕을 당해도, 그리고 예전에 잃어버린 그들의 왕국이 지금까지 모욕을 당해 왔어도 그들은 절대로 행복할수 있는 비법만큼은 모욕당하지 않은 것이다.

쑤공타를 나오면서 돌아보니 그들 문지기 아저씨네 가족도, 샤리파처럼 오랫동안 우리가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여전히 얼굴들은 싱글벙글한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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