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와 '현실'이 뒤바뀐 교육 현장

학교를 진단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등록 2002.08.18 23:29수정 2002.08.19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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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과 을은 어느 소도시 인문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다. 두 인물이 등장하는 다음 이야기 중 어느 쪽이 현실이고 어느 쪽이 우화일까?

산과 산이 마주보듯, 도심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두 학교가 있었다. 갑과 을은 학교가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가 않았다.

특히 학생들의 하교시간이 문제였다. 저쪽 학교의 교실들이 아직 대낮같이 밝은데 먼저 불을 내린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자칫 교장으로서 직무를 게을리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쪽 학교보다 먼저 불이 꺼졌다고 다음날 교장실로 전화를 걸어 항의를 해온 학부형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갑과 을은 매일 밤 상대 학교의 불켜진 창을 바라보며 먼저 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과 을은 고민 끝에 서로 전화를 하여 시내 찻집에서 만났다.

갑: 우리 더 이상 이런 어리석은 짓은 그만 둡시다.
을: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이들이 무슨 볼모도 아니고….
갑: 맞습니다. 우리가 못나서 아이들 고생시키는 거 아닙니까?
을: 정말 그렇습니다. 교실을 돌아보면 아이들 거지반은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어요.

갑: 내일부터는 밤 아홉 시가 되면 똑같이 불을 내립시다.
을: 야간 자율학습을 희망하지 않는 학생은 자유롭게 돌려보내는 것은 어떨까요?
갑: 그럽시다. 위에서도 희망자에 한해서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을: 아이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가르치면서 우리가 법을 어기면 안되지요.


자, 이야기 속의 현실과 우화의 갈림길은 어디쯤일까? 그건 어렵지 않게 구별이 될 것 같다. 갑과 을이 서로 만나 대화를 나누는 그 지점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느 쪽이 현실이고 어느 쪽이 우화일까?

상식의 눈으로 보자면 앞부분의 상황은 허구이거나 코믹에 가깝다. 반면에 뒤의 상황은 현실 속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얘기다. 다만, 병이 들지 않은 건강한 사회라면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지금 수도권 지역을 제외한 전국 대다수 인문고등학교에서 실시되고 있는 방학중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의 실상은 한마디로 비상식적이고 병적이다.

냉방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찜통교실에서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오후 늦게까지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이 강행되고 있다. 심지어는 밤 11까지 아이들을 학교에 붙잡아 두고 있는 학교도 있다.

학생들은 방학을 이용하여 다양한 경험을 쌓거나 자신이 원하는 과목을 공부하고 싶어도 학교에서 획일적으로 짠 시간표에 의해서만 수업을 받아야 한다.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고등학생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 방학인데도 자기가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과목을 공부할 수 있는, 헌법이 보장한 자유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기막힌 일은 이런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자율학습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다 불법이다.

문제는 상급관청의 감사를 피하기 위해 교사와 학생이 공모하여 공문서를 위조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이에 대하여 '아니오'라는 말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자의식을 지닌 학생이나 교사들은 학교사회에서 '왕따'가 되기 십상이다.

같은 교단에서 입으로는 정직과 정의를 가르치고 행동으로는 부정과 부패의 모범을 미래의 주역인 어린 새싹들에게 선보이도록 강요받고 있는 셈이다. 이런 우화 같은 현실을 어쩔 것인가?

학교에서는 언어사용이 정직해야 한다. 아이들이 배우기 때문이다. 자율학습은 '자율'이라는 말에 걸맞게 자율적으로 운영되어야 하고, 희망자 조사를 할 때는 '희망'이란 단어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말과 행동이 다르면 지식은 죽은 지식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조건 전부 다' 라고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괜한 고집을 부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현실이 우화로, 우화가 현실로 뒤바뀌고 마는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갑과 을이 등장하는 현실과 우화가 섞인 이야기를 학교를 진단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사용해보면 어떨까? 학교의 구성원인 전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갑과 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답을 들어보는 것이다.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우화인지.

갑과 을이 만나 속내를 털어놓고 아이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뒤쪽의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교사나 학생들이 많다면 우리 교육은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반대라면 아이들은 어찌될까? 현실과 우화가 뒤바뀐 세상에 사는 그들의 의식은 온전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의 미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있다. 다름 아닌 학교의 민주화이다. 민주화의 근간인 선거제도의 도입이다. 대통령을 국민이 뽑듯이 학교장을 교사들이 뽑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공문서를 위조하도록 조장하거나 묵인하는 일이 씻을 수 없는 죄라는 사실을 아는 건전한 상식인을 교장으로 선출하는 것이다.

학생들을 밤늦게까지 학교에 붙잡아두지 않고도, 하늘과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인권을 침해하지 않고도,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참다운 동기를 부여해주는 능력과 성실함을 갖춘 열린 지식인에게 아이들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학교가 신명이 넘치는 곳이 되지 않겠는가. 아이들의 풀죽었던 안색이 환하게 살아나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로서, 지면관계로 생략한 부분을 그대로 살린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로서, 지면관계로 생략한 부분을 그대로 살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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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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