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짝꾼, 자카르타 시장에 출마하다 1

<인도네시아의 창> 베짝을 통해 보는 인도네시아 민주주의

등록 2002.08.23 16:12수정 2002.09.02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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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클로라는 게 있다. 동남아 여러 국가들에서 발견되는 이 운송수단은 자전거 앞에 좌석을 마련해 뒤에서 페달을 밟아 움직인다. 인도네시아에도 씨클로가 있는데, 이를 '베짝'이라고 부른다. 베짝을 모는 베짝꾼들은 대표적인 서민이자 빈민이다. 먹고 사는 것만으로 빠듯한 벌이가 일반적인 인니 서민들의 모습이 그들 속에 있으며, 동시에 도시 빈민계층으로 분류된다.

자카르타에는 해마다 인력들이 대거 상경해 소위 '몸으로 때우는' 각종 일거리를 도맡아 하고 있다. 한국의 6-70년대를 생각하면 될 듯싶다. 대부분이 학력도 낮고 가진 기술도 없다. 주소지는 원 고향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보니 주거도 노동 환경도 모두 불안한 상태이기 일쑤다. 그런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주된 직업 중에 하나가 베짝꾼이다.

베짝꾼이 되어 사는 사람들은 그래도 자기 힘으로 성실하게 살아보려는 사람들이다. 범죄율이 높기로 악명을 떨치고 있고, 길거리 돌아다니기가 무서운 자카르타에서 남을 위협하는 생활보다 떳떳한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자카르타시가 이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자카르타시에서는 베짝 영업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현재 일부 외진 변두리 지역에서는 운행을 허용하지만, 언제 다시 철거반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 속에 살고 있다.

라스둘라씨. 그가 이번 자카르타 시장선거에 출마했던 베짝꾼이다. 그의 시장 출마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소위 배우고 가진 자들의 독무대였던 정치판에 한낱 베짝꾼이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각종 언론에서 앞다투어 그를 취재해서 방송하고 그를 통해 서민들의 소리를 듣고자 했다. 그는 태국의 엔지오 회의에도 참석하고, 월드컵 후에는 브라질에 초청받아 서민들의 영웅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면 그는 시장에 출마할 정도로 대단하고 특별한 사람인가? 그는 국졸의 학력으로 판자집에서 산다. 그는 매일밤 어시장에 나가 사람들을 태워 돈을 벌고 새벽에 들어와 눈을 붙인 다음 낮에 각종 활동을 하러 다닌다. 자카르타에 주소지를 두지 않은 그는 온갖 사안에서 '주민도 아닌 사람이'라는 대우를 받는다. 빈민촌 철거가 한창인 요즘 언제 자신의 지역도 거기에 포함될지 모르는 불안한 생활을 한다. 게다가 베짝영업에 대한 위협은 더 심각한 수준이다.

수하르토 때부터 시장이 된 군 출신의 수띠요소 시장은 자카르타에서 베짝꾼을 몰아낸 깨끗한 도시를 만들겠다는 '베짝과의 전쟁'에 대한 의지를 천명한 사람이다. 수띠요소 시장은 도시질서 유지를 그 이유로 꼽는다.

베짝이 그렇게 도시 거리의 정체를 가중시키고, 질서없는 무분별한 영업으로 폐해가 큰가? 도심의 대로에서는 베짝을 볼 수가 없다. 타려는 사람도 태우려는 사람도 없다. 서로에게 불편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곽지역에는 골목도 많고, 베짝만이 영업을 하고, 베짝이 필요한 지역이 분명히 있다. 베짝을 타는 사람도 대부분이 서민들이며, 영화에서처럼 우아하게 앉아 베짝을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장을 봤을 법한 쌀뭉치, 물통 등을 안고 타거나 아이들이 올망졸망 따라붙은 부인네들이 고객인 경우가 가장 많다. 저 구석진 집까지 짐을 싸매고 가는 것은 고통임에 틀림없다. 차도 없고 비싼 택시비를 낼 수도 없는 그들이 베짝꾼들의 고객이며, 서로 사정봐가며 적당한 가격에 사람을 태워주는 것이 대부분 베짝영업의 모습이다. 시장통이나 골목에서 줄을 지어 서 있는 베짝꾼들이 질서없이 무분별하다는 느낌은 결코 주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질서와 룰이 있다.

모든 것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그들 중의 한 사람 라스둘라씨. 그의 삶은 많은 도시빈민들의 삶을 대변해준다. 그런 그가 복잡다단한 시장 입후보 절차를 챙겨가며 출마할 수 있었던 데는 또 다른 도움이 있었다. 몇 년 전 베짝꾼들에 대한 위협이 시작될 무렵 고민이 많던 어느날, 한 동료가 너덜너덜 찢어진 신문을 들고 왔다고 한다. 우리 같은 빈민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기사가 실린 파지조각이었다. 글을 잘 아는 동네 어른을 찾아가 정말 맞는지 확인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동네 베짝꾼들의 대장격이었던 그는 동료들을 데리고 그 단체로 찾아갔다.


그 단체가 UPC(=Urban Poor Consortium)이었다. 도시 빈민 문제에 관심을 가진 단체나 개인들이 연합해 1997년에 하나의 통합된 조직으로 태어난 시민단체이다. 그곳에 참석하면서 라스둘라씨는 다른 지역의 베짝꾼들과도 만나 연대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많은 활동들을 해나갔다. 그곳의 지원과 도움 아래 라스둘라씨와 그의 동료들은 자카르타 중부 지방법원에서 베짝 운행 금지가 불법이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또한 많은 베짝꾼들이 참여해 베짝을 앞세운 대규모 시위 등에도 동참했다.

그러나 자카르타 시정부는 항소를 하고, 동시에 베짝 단속도 멈추지 않았다. 자신들의 의지를 표명하고, 동시에 도시 빈민들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가는 행정을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그 운영체계 속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는 동료 베짝꾼들을 위해, 그리고 수많은 도시 빈민들을 위해 자카르타 시장에 출마했다. 하지만 자카르타 시장이 되기 위한 선거시스템은 철저하게 '그들만의 리그'로 짜여져 있었다.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통해 그 모순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나아가 그것은 국정운영에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는 대다수 인니 국민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도네시아에는 국민협의회라는 것이 있다. 헌법 아래 최상위 기관으로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기관이다. 소위 국민의 대표가 대통령을 대신 뽑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지방정부에도 해당되어, 지방의회가 지방정부의 장을 뽑는다. 그런데 자카르타 시장 선거 제도를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일단 입후보자의 자격은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져야 한다. 아직도 인니 국민 대부분의 학력이 국졸이나 중졸이다. 그러니 라스둘라씨는 애시당초 탈락이 예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시장 선거라는 것이 무슨 입사시험 단계별로 보듯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일단 규정에 맞춰 서류를 등록받은 다음 단계별로 걸러내 숫자를 줄여낸다. 그런데 그 단계별 통과자들이란 것이 지방의회 내에 등록되어 있는 정당 정파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즉 정파의 할당대로 후보자를 지명하면 그들이 다음 단계로 올라간다. 결국 정파들의 선택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정파라는 것이 중앙 의회에 등장하는 정파들과 그대로이다 보니, 당수의 생각이 명령으로 떨어지면 따를 수밖에 없고, 또한 정파들을 회유하기 위한 'money politic'이 가능해진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보통의 서민'이 시장이 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최근에 있었던 국민협의회 연례 회의가 대통령 직선제를 의결했다고 한다. 그에 따라 하위정부인 지방정부들도 향후부터는 직선제로 실시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직선제가 된다한들 입후보 자격부터 이렇게 미리 가이드라인을 정해 놓는다면, 그 직선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국은 정치 엘리트들이 골라놓은 후보들 속에서 고를 수밖에 없는 허수아비 권리가 아닌가? 어쩌면 그래서 요즘 인니가 200개에 가까운 정당 설립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지 모르겠다.

설령 향후에는 직선제가 실시된다고 하더라도 당장 이번 10월초에 새롭게 부임할 시장자리에 현 시장이 연임된다면, 임기 5년 동안의 고통은 불을 보듯 훤하다. 이전보다 더 강력하게 도시 정화 사업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기존의 체제의 벽은 높은 것이라 결국 라스둘라씨는 22명을 뽑는 정파 지명전에서 탈락했다. 애시당초 후보 탈락을 예상했던 것이기 때문에 놀랄 것은 없다. 하지만 이것이 그에게, 그리고 그의 동료들에게 결코 실패로 와닿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베짝꾼이라는 흥미로운 인물의 자카르타 시장 입후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주목을 받았다. 그를 바라본 사람들의 시선은 다양할 것이다. 그저 흥미거리로 보거나, 민주주의의 발전의 한 양상 정도로만 인식하거나, 혹은 정말로 애타게 그와 같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자신들을 대변해주길 바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두에게 공통된 것은 인도네시아 국민들이 어떻게 의사결정 과정에서 차단되고, 불합리한 선거 시스템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미토스, 정치권에 나서는 선택받은 그들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부류라는 환상깨기가 시작된 것이다.

입으로는 언제나 국민들에 대한 관심과 자애를 외치면서, 국민들은 당연히 내가 베푸는 은덕에나 감사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라는 생각이 깨어지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국민은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집권자가 봉사를 맹세해야 할 '주인들'이다. 베짝꾼이 명문 출신 정치가들과 나란히 선 입후보자가 될 수 있을 때 인도네시아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작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KBS '세계는 지금'의 '피플 아시아'란 코너에 출연했던 라스둘라씨 취재 과정에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라스둘라씨가 출연했던 회는 지난 주 수요일에 방영되었다고 합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인터넷 등을 통해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 한겨레 하니리포터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KBS '세계는 지금'의 '피플 아시아'란 코너에 출연했던 라스둘라씨 취재 과정에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라스둘라씨가 출연했던 회는 지난 주 수요일에 방영되었다고 합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인터넷 등을 통해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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