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국무차관의 방한을 경계한다

부시 행정부 대표적 매파... "북한은 악의 축" 재생할 듯

등록 2002.08.27 17:34수정 2002.08.28 14:44
0
원고료로 응원
볼튼 미 국무차관
볼튼 미 국무차관연합뉴스
존 볼튼 미 국무부 군비통제 및 국제안보차관이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서울을 방문한다. 그는 우리에게 낯선 인물이지만, 부시 행정부 내의 실력자로 평가받고 있다.

부시 행정부 내에서 강경론을 주도하는 국방부의 쌍두마차격인 도날드 럼스펠드 장관과 폴 월포위츠 부장관이 콜린 파월 미 국무부 장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무부 차관으로 그를 발탁할 것을 부시 대통령에게 요구한 것도, 국무부에서 강경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볼튼의 인준 청문회 때 미국의 시민단체들은 그의 인준을 강력히 반대하기도 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볼튼 차관의 방한 목적은 대북정책 '조율'이다. 그러나 시기적으로나 부시 행정부 내에서의 그의 역할을 볼 때, 그의 방한을 통상적인 한미일 대북정책 조율로 볼 수는 없다. 특히 볼튼 차관은 얼마전 북한이 예멘에 미사일을 수출했다는 이유로 경제제재를 부과하는 것을 주도한 인물이고, 부시 행정부 내의 대표적인 '제네바 합의 파기 주창자'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악의 축' 발언 가능성

관심의 초점은 볼튼 차관이 서울에서 할 연설 내용에 모아지고 있다. 도쿄와 서울 방문에 앞서 <워싱턴포스트>가 입수한 연설문 초안 내용은 한마디로 강경일변도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 신문이 22일 보도한 것에 따르면, 볼튼 차관은 △북한이 핵, 생화학무기, 미사일 등을 개발해 수출하고 있다는 이유로 북한을 악의 축으로 재규정하고 △북한이 핵동결 프로그램 하에서도 플루토늄과 농축 우라늄을 생산했다는 증거가 발견될 경우 미국은 제네바 합의에서 탈퇴할 것이며 △ 북한이 수천명의 주민을 투옥하고 많은 주민들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중국과 한국으로 탈출하게 만드는 테러리스트 국가라고 비난하는 요지의 연설을 할 예정이다.

이를 놓고 미국 내의 온건파와 한국 정부에서 불만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미 국무부는 브리핑을 통해 "미국 정부관리들 특히 볼튼 차관같은 고위 관리들은 어떤 발언을 하든지 부시 대통령의 정책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혀 볼튼의 강경입장이 부시 행정부의 대북관을 반영한 것임을 인정하기도 했다.


서울에 앞서 도쿄를 방문 중인 볼튼 차관은 26일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및 수출을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서울 연설에서 '악의 축' 발언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의 고위 관리가 미국 대통령의 발언을 인용하는 것은 옳은 일(OK)라고 본다"고 말해 서울에서 '악의 축' 발언이 재생될 것임을 강하게 암시했다.

볼튼 차관을 통해 서울에서 미국의 대북강경책, 특히 '악의 축' 발언이 또 나올 경우 최근 대화와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한반도 정세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특히 워싱턴도 아닌 서울에서 강도 높은 대북 비난 발언이 나올 경우, 이를 조율하지 못한 남한 정부에 대한 북한의 불만도 터져 나올 가능성도 높다.


이밖에도 볼튼 차관은 방한시 미국 주도의 미사일방어체제(MD)에 한국이 참여하는 문제와 미군을 비롯한 미국시민에게 국제형사재판소(ICC) 체포영장에 대한 면책특권을 한국이 부여하는 문제 등을 협의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월 13일 탄도미사일방어(ABM) 조약이 사문화됨으로써, 부시 행정부는 동맹국을 MD에 참여시키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협의한다는 입장이다. 국제형사재판소와 관련해서도 미국은 지난 8월 1일 존 볼튼 차관을 루마니아에 보내 미국시민을 ICC에 인도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협정을 체결하게 한 바 있고, 이와 비슷한 협정을 다른 나라에도 강요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미국은 ICC에 미군의 신병을 인도하지 못하게 규정한 조항인 ICC협약 제98조에 각국이 서명하도록 압력을 넣고 있고, 이러한 미군 면책 조항에 서명하지 않은 국가들에게는 군사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현재까지는 루마니아와 이스라엘만이 이 조항에 서명한 상태이다.

한국의 경우, 2000년 3월 93번째로 ICC에 서명했으나, 아직 비준은 하지 않은 상태이다. 김대중 정부는 인권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기 위해 ICC 비준 및 발효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미군과 미국 시민을 국제법정에 세울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면서 면책특권을 한국에도 요구할 것으로 보여 볼튼 차관 방한시 이 문제가 논란거리로 부상할 가능성도 있다.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비해야

볼튼 차관의 방한은 9.11 테러이후 한층 강화되고 있는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가 한반도에 어떻게 적용될지를 가늠할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미국의 일방적인 요구와 태도에 치밀한 대응책을 세워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우선 중요한 문제는 한반도의 대화 분위기에 찬물을 붓는 강경 발언을 자제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위협만 한껏 부풀리는 발언만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미국의 구체적인 정책 대안이 무엇인지 밝힐 것을 요구하는 당당한 외교적 자세가 필요하다.

길게는 부시 행정부 출범이후, 짧게는 6.29 서해교전 사태이후 얼어붙었던 한반도 정세가 최근 해빙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동시에 핵, 미사일 등 북미간의 핵심적인 현안들은 양측의 시각 차이가 전혀 좁혀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서서히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해빙과 위기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 현재 한반도 정세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튼 차관의 방한은 우리의 외교 역량을 가늠해볼 중요한 시험대임이 틀림없다. 미국의 일방주의에 끌려다니는 '무늬만' 한미공조가 아닌, 한반도 평화의 관점에서 미국에게 항의할 것은 항의하고 요구할 것은 요구하는 당당한 한미공조를 기대해 본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2. 2 이런 곳에 '공항'이라니... 주민들이 경고하는 까닭 이런 곳에 '공항'이라니... 주민들이 경고하는 까닭
  3. 3 남자를 좋아해서, '아빠'는 한국을 떠났다 남자를 좋아해서, '아빠'는 한국을 떠났다
  4. 4 수렁에 빠진 삼성전자 구하기... 의외로 쉽고 간단한 방법 수렁에 빠진 삼성전자 구하기... 의외로 쉽고 간단한 방법
  5. 5 관광객 늘리기 위해 이렇게까지? 제주 사람들이 달라졌다 관광객 늘리기 위해 이렇게까지? 제주 사람들이 달라졌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