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향공작 과정 비전향자 3명 사망
"고문할때 교도소는 모니터로 관찰"

의문사위원회, "70년대 법무부와 중앙정보부가 함께 추진"

등록 2002.08.29 19:00수정 2004.06.15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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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형장'이라고 불리던 격리 1방에 들어가자 수형자 2명이 있었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들어왔다'고 말하자 그중 한 명이 '야, 이 새끼 빨갱이가 왔네. 우리 삼촌이 빨갱이한테 맞아 죽었다. 너 개새끼 잘 걸렸다. 너도 매를 맞아야 한다'며 저를 눕혀 놓고 마구 폭행했습니다.

처음에는 빨갱이라는 이유로 때렸는데, 며칠 지나면서 '살고 싶으면 전향하라', '전향하지 않으면 뒷문으로(죽어서) 나간다'며 폭행을 가했습니다. 열흘간 폭행 당하고 전향서를 쓰겠다 하니 폭행이 멈추었습니다."(70년대 대전교도소 수감 장기수 이모씨의 진술)


a 의문사위원회가 공개한 74년6월5일자 중앙일보 2면에 실린 법무장관 명의의 '공무원 공채 공고'.

의문사위원회가 공개한 74년6월5일자 중앙일보 2면에 실린 법무장관 명의의 '공무원 공채 공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www.truthfinder.go.kr, 이하 의문사위원회)는 29일 "70년대 법무부와 중앙정보부(이하 중정)가 함께 추진한 '전향 공작' 과정에서 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발표했다.

그 동안 "박정희 정권이 전향 공작의 일환으로 일반 재소자들에게 장기수 폭행을 사주했다"는 주장은 출소 장기수들과 사망자 유족들을 통해 꾸준히 제기됐지만, 국가기관이 이같은 전향공작의 실체를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의문사위원회에 따르면, 중정은 "50년대부터 수감된 비전향 장기수들이 대거 출옥할 경우 사회 혼란이 예상된다"는 명분으로 법무부와 공조, 73년 비전향 장기수 500여명이 수감된 광주, 대전, 대구, 전주 등 전국 4개 교도소에 '전향전담 공작반' 50명을 선발, 같은 해 8월 각 교도소에 배치했다.

의문사위원회 특수조사과의 관계자는 "좌익사범들이 집중 검거된 시기가 53∼55년 사이인데, 무기징역을 살던 상당수 좌익수들이 60년 4.19 혁명 이후 20년형으로 감형을 받았다. 전향공작은 70년대 중반 이들의 출감을 앞두고 시행됐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74년 6월5일 중앙일보에 실린 신직수 법무부장관 명의의 '공무원 공채시험 공고'가 표면상 '재소자 교화-교육 담당'을 모집하고 있지만, 이는 전향공작 전담요원들을 선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이미 작고한 신 장관은 전향공작 초기 중정부장을 지낸 이후락씨에 이어 1973년 12월 부장직을 승계, 이 시기의 전향공작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법무부와 중정은 장기수들을 '좌익 사상'의 충성도에 따라 A, B, C 3등급으로 분류했고, 이들 장기수들은 같은 교도소에 수감된 일반 폭력재소자(일명: 떡봉이)들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문사위원회는 "대전교도소의 경우 격리방에 들어갔다가 전향을 하지 않고 나온 사람은 없었고, 방 안의 상황은 감시카메라로 교도소에 의해 모니터되고 있었다"고 밝혀 교도소가 재소자들의 비전향수 폭행을 묵인하는 것을 넘어 전향 공작을 조직적으로 감시, 통제했음을 시사했다.

의문사위원회로부터 당시 전향공작 관련 중정 직원들의 인사기록카드와 사망자의 인물존안카드 제출을 요청받은 국가정보원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74년∼80년 사이 교도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비전향 장기수 5명의 사인을 조사해온 의문사위원회는 이날 남아 있는 교정기록들과 관련자들의 진술을 근거로 최석기, 박융서, 손윤규 사건의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의문사위원회가 발표한 이들의 사망 경위는 다음과 같다.

1. 최석기 사건 (74년 폭행 사망)

북한 정치공작원으로 53년 검거돼 55년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68년부터 대전교도소에서 수형 생활을 해온 최씨는 74년 4월4일 독거방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발표됐다.

그러나 당시 대전교도소 교도관 전모씨는 의문사위원회에 "격리된 방에서 2명의 수감자가 최석기를 마구 폭행하는 것을 보고했으나 상급자는 '그 방에서 일어나는 일은 네가 신경쓸 것 없다'고 대답했다"고 진술했고, 또 다른 교도관 김모씨도 "일반수형자가 좌익수를 '보리타작'으로 전향시키려다가 좌익수가 사망했다"고 밝혔다.

같은 기간 폭력 및 사기죄로 징역형을 살고 있던 조모씨와 한 방에 수감됐던 탁모씨는 "어느 날 조씨가 다른 방에 다녀와서 '오늘도 한 건했다',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교도소에서 시켜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의문사위원회는 "이 같은 상황을 종합할 때, 최씨는 격리된 방에서 조씨 등으로부터 전향을 강요받으며 입에 수건을 물리고 바닥에 눕혀 몸 전체를 구타당하는 등 항거불능 상태에서 극심한 폭행 및 가혹행위를 당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최씨는 74년 4월4일 저녁 극심한 폭행 끝에 사망했지만, 보안과장 박모씨는 유족에게 "최석기는 잠만 자는 병에 걸려 죽었다"고 둘러댔고, 사인도 '심장마비'로 처리됐다. 대전교도소는 2명의 교도관에게 감봉과 견책이라는 '솜방망이 징계'를 했다.

최석기 사건 이후에도 전향공작에서 '공'을 많이 세웠던 조씨는 그러나 의문사위원회의 소환 요구에 응하지 않아 과태료 1천만원이 부과됐다.

2. 박융서 사건(74년 전향공작에 항거 자살)

a 74년 대전교도소에서 '바늘 고문' 등에 시달리다가 '전향 강요 말라'는 혈서를 남기고 자살한 박융서 씨.

74년 대전교도소에서 '바늘 고문' 등에 시달리다가 '전향 강요 말라'는 혈서를 남기고 자살한 박융서 씨.

57년 남한으로 침투, 서울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체포된 박융서씨는 59년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1961년 대전교도소로 이감됐다.

대전교도소 특별사동(좌익수형자 수용사동)의 사방청소부 직책을 부여받은 이모씨는 74년 7월19일 박씨의 약품 개수가 장부상에 기재된 것보다 적다는 점을 빌미로 박씨를 추궁했다. 이 과정에서 이씨는 박씨의 전신을 발로 차거나 바늘로 찌르면서 답변을 강요했고, 교도관 김모씨도 폭행에 가담한 것으로 전해졌다. 의문사위원회는 이 과정에서 박씨에 대한 전향 강요도 함께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날 저녁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박씨는 옆방 수감자 양모씨에게 "바늘로 온몸이 찔렸다. 정말 이렇게 살아 있으면 무엇하나"라고 한탄했고, 이튿날 새벽 '전향 강요 말라'는 혈서를 남기고 유리창 창살에 끼어있는 작은 유리파편으로 자신의 동맥을 절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전교도소는 박융서의 죽음이 정부시책으로 진행된 좌익수 전향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인 점을 감안, 이 사건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관련자들 역시 가벼운 징계만을 받았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박씨는 체포된 후 1년간 당국에 협조하는 등 사실상 전향자와 다름없는 태도를 보였으나 70년대 전향공작에는 순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향을 거부하다가 '바늘고문'까지 감수해야 했던 박씨는 동료 장기수들에게 "북에 처자식이 있어서 전향 못하겠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3. 손윤규 사건 (76년 강제급식으로 사망)

1973년말부터 1974년 중순까지 대구교도소에서는 교무과의 묵인하에 전향공작전담반이 창설돼 비전향 장기수들에 대한 폭행과 가혹행위, 폭언을 동원한 전향공작이 시행됐다.

1955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대구교도소에서 무기징역형을 살고 있던 손윤규씨는 평소 건강이 안 좋았으나 74년 자신과 동료 장기수들에게 가해지는 전향공작에 항의, 그해 3월24일부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손씨가 물 한 모금, 영양제 투여도 거부하자 교도소는 3월27일, 30일 등 3차에 걸쳐 강제급식을 했다.

그해 4월1일 급격히 건강상태가 급격히 악화된 손씨가 사망했지만, 교도소측은 유족에게 "손씨가 빈혈과 전신쇠약으로 사망했다"고 알리고 '단식과 강제급식' 부분은 은폐했다.


a 의문사위원회 특별조사과 관계자들이 29일 기자회견에서 '당시 대전교도소 사동배치도'를 설명하고 있다.

의문사위원회 특별조사과 관계자들이 29일 기자회견에서 '당시 대전교도소 사동배치도'를 설명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손병관

의문사위원회가 29일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한 '전향 공작의 실체'를 확인했지만, 이는 또 다른 논란의 불씨가 될 전망이다.

생존 장기수들과 인권단체들이 "전향공작을 당한 장기수들을 민주화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문사위원회는 "아직 최종 발표가 아니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 관련성'은 좀더 내부 검토가 필요하다"고 즉답을 피했다. 의문사위원회는 80년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옥사한 김용성, 변형만 사건의 발표도 추후로 미뤘다.

권오헌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장은 "의문사위원회가 공권력의 불법 행사에 의한 일부 장기수들의 사망과 전향제도 자체의 부당성을 밝혀내는 성과를 거뒀다"며 "사상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비전향수들이 투쟁을 민주화 투쟁의 일환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향공작 가담자들, 왜 말이 없나?"
기자회견장 찾은 두 명의 출소 장기수들

▲ 29일 의문사위원회를 찾은 김영승(왼쪽), 박종린씨.
"아직도 비인간적인 전향공작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동안 숱한 증언으로 전향공작의 불법성이 알려진 지는 오래다. 전향공작 희생자들의 항거는 반독재투쟁의 일환이었으니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해야 한다"

빨치산 활동중 54년 체포돼 36년간 옥살이를 한 김영승(68· 월간 '민족21' 고문)씨는 '0.75평의 방에 10여명이 단체로 수용돼있다가 갖가지 구실로 불려나와 폭행을 당해야 했던 70년대'를 아직 잊지 못한다.

김씨는 "창문을 쳐다보고 있어도 교도관들이 '탈옥 생각하는 것 아니냐'고 시비를 걸어 몰매를 때렸고, '전향하지 않는 사람은 죽는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왔다"고 회상했다.

59년 남파됐다 34년간 옥살이를 한 박종린(70)씨는 손윤규 사건을 직접 진정한 당사자다. 손씨가 단식중 옥사한 것을 계기로 대구교도소 비전향장기수들 전체가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결국 당시 교무과장 강모씨는 "구타 등으로 강제전향 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했다.

"평양에 딸이 살고 있다"는 박씨는 결국 전향서를 쓰지 않았지만, 안면이 있는 목사가 보증을 서는 형식으로 93년 풀려났다. 그러나 나중에 '목사의 신원보증'이 전향으로 간주돼 2000년 고향으로 송환된 이북출신 비전향 장기수들의 대열에 합류하지 못했다.

박씨는 "왜 그때는 '너희에겐 법도 필요 없다'고 하다가 이제 와서는 자기들이 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지 못하냐?"고 관련자들을 책망했다. / 손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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