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타고 동네 한바퀴

나의 작고 느린 여행기

등록 2002.08.31 21:04수정 2002.09.01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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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내, 마당 한구석에서 비를 맞던 자전거를 꺼낸다. 질금거리던 비가 잠시 물러서고, 모처럼 상량한 볕이 있는 저녁이다. 바람도 서늘하고, 비에 씻겨 맑은 하늘에는 볕이 눈부시다.


늘 자동차로 굴러다니던 길로 자전거를 몰고 나서 본다. 반바지 차림에 티셔츠 한 장 걸치고, 옆구리에는 카메라가 들어 있는 가방 하나를 걸쳤을 뿐이다.

집에서 지둔리로 내려서는 길은 그야말로 자전거의 천국길이다. 눈에 뵈지 않을 경사가 비스듬히 이어진 아스팔트 길은 거의 패달을 구룰 필요가 없다.

가만히 앉아 있자니, 푸릇한 벼들로 이어진 논들이 지나고, 이제 막 피어난 구절초들이 지나간다. 향기로운 풀냄새가 풍겨오고, 적당히 서늘한 바람이 온몸으로 안겨온다. 자동차에선 느끼지 못했던 냄새와 촉감들이다.

오랜만에 타는 자전거인지라 아직은 조심스럽다. 길 위에 쌓인 모래를 지나며 지르륵 미끄러질 뻔했다. 요즈음 자전거들은 거개가 기어가 달린 반면에 핸들 손잡이가 지나치게 낮아서 거의 허리를 내리꽂듯이 구부려야 한다. 상체를 곳곳이 세우고, 이리저리 둘러보며 지나가는 사람들과 태연히 이야기도 나눌 여유를 되찾기 힘든 구조이다.

가나안 사슴농장을 지나 지둔1리로 내려와 차들이 다니는 큰길을 버리고, 슬그머니 옆으로 돌아선다. 토담골 가는 길이다. 태동고전연구소까지 이어지는 오르막길은 좁고 힘이 든다. 그래도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이 거의 없어 한가로이 자전거 타기에는 제격이다.


고추를 뽑아내고 새로 열무를 심기 위해 밭을 가는 사람들 곁을 지난다. 자동차를 타고 갈 때면 공연히 미안스럽던 그런 만남도 자전거에선 덜하다. 무어랄까. 정물처럼 조용히 지나가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요즘 길을 두고 한창 실랑이를 벌이는 곳의 안내판 앞에 선다.
길을 막겠다는 안내판에도 아랑곳없는 나의 자전거
길을 막겠다는 안내판에도 아랑곳없는 나의 자전거이형덕
격앙된 문구의 안내판 앞에서도 내 자전거는 잘도 빠져나간다. 곧 이어 개울과 만난다. 개울에선 아주머니 몇이 어항에 걸린 물고기들을 건지고 있었다. 자전거를 비켜놓고 구경도 하고, 많이 잡았냐고 참견도 한다. 불어난 물에 잠긴 시멘트 다리를 자전거를 타고 건넌다. 차르르 바퀴를 적시며 종아리에 달라붙는 물방울이 싱그럽다.

개울을 건너는 자전거
개울을 건너는 자전거이형덕
다리를 건너니, 이번 큰물에 밀려온 호박돌들로 자동차들은 도저히 다닐 엄두를 못낸다. 비록 자전거를 데리고 걷는 길이긴 해도, 자전거는 용케도 그 길을 헤쳐나간다. 물가까지 내려온 자동차 하나가 난감해 하며 되돌아선다.


아하, 바로 이 거로다. 속도가 따라잡지 못하는 느림의 미학. 자동차를 타고 갈 수 없는 길과, 그것이 놓쳐 버리는 작은 만남들을 자전거는 건져낸다. 걷는다면 더욱 그 만남은 여유롭고 넓어지겠지만 자전거는 그래도 순진한 바퀴이다. 사람과 다리를 맞출 줄 알고, 지나치게 앞서려 하지 않으며 사람과 언제든 함께 걸으려 하는 바퀴이다.

발목을 걷고 개울을 건너는 마을 할머니
발목을 걷고 개울을 건너는 마을 할머니이형덕
개울을 건너와 신망애 재활원 길목에서 큰길과 만난다. 사람 걸어다닐 인도도 없는 차도 가상이로 눈치를 보며 자전거가 지나간다.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몸이 비틀거린다. 아스팔트에 그려진 도로 가상이의 흰선이 생사를 가늠하는 표지판 같다. 자동차를 타고 다닐 때는 모르던 걷는 이와 자전거 탄 이의 심정을 알게 된다. 자동차를 탈 때면 차도로 걷는 사람과 자전거 탄 이가 조심성없어 보였건만 이제는 순전히 입장이 바뀌었다.

만취대까지는 거의 평지에 가깝다. 운수리에서 차도를 버리고 다시 뒷길로 들어선다. 파위리로 들어선다. 처음엔 원적사로 가볼 셈이었지만, 경사가 만만찮아 용화사라는 표지에 눈을 돌렸다. 전원주택이 연이어 들어선 파위 골짜기로 들어서니, 차로는 들어설 수 없는 좁은 내리막 길이 나온다.

골짜기로 내려서는 길은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길인데 자전거는 여전히 함께 걷는다. 절이라기보다는 약수터 부근의 암자 같은 절이 나온다. 어디론가 막 나서던 나이 지긋한 주지스님이 약수나 드시고 가시란다. 한가로운 산막 같은 집의 뒤에 모셔진 불상이 아니라면 어디고 사찰이라는 느낌이 없다. 그래도 심상찮은 검은 바위 위에 불상을 올리고, 그 뒤에 샘이 솟는 곳에는 즐비하니 촛불이 켜져 있다.

그곳에 들러 물 한 잔을 마시고 나오자니, 혼자 책을 읽고 있던 스님 한 분이 따라 나오며 쉬었다 가란다. 마당의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원래는 무속인이 거처하던 곳인데, 이곳에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을 하고자 네 분의 스님이 자리를 잡았다 한다. 그러나 '원력'이 부족하여 아직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하면서도 이번에 안되면 다음 세상엔 되겠지라는 느긋함이 좋았다.

"절이 어디 볼 거 있습니까? 하지만 거처야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마음이 중요하지요."

이웃의 원적사가 큰 집을 짓고, 이번에 불국사의 다보탑을 본뜬 큰 탑 불사를 일으킨다는데 거기 비하면 이 작은 암자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슬그머니 스님의 옆구리를 찌르니 그 절의 스님은 원력이 좋으셔셔 그렇다는 말이다.

원력이 어디 지금의 노력뿐이랴. 이미 전생에서 쌓아온 공업의 소산이니 스스로 약한 원력을 탓하면서도 비록 지금은 그러하나 다음 세상의 성취를 기대하는 느긋함이 있다.

안동으로 설악산까지 두루 돌아다녔다는 스님은 이따금 심심할 때면 놀러 오라 권한다. 일어서려는데 주지 스님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녀석, 또 경치겠네."

앉아 있던 스님이 빙그시 웃으며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는 주지스님을 바라본다. 어린 아이 하나를 살피고 있는데, 학교가 끝났는데도 오지 않는 아이를 찾아 주지스님이 찾으러 나갔던 길이었다. 어디 가족도 없이 스님들 틈에서 자라는 아이야 절보다 또래친구들이 벅적거리는 피씨방이 더 좋았겠다.

"학원 끝나면 바로 오라고 했는데도, 또 게임방에 갔더만"

아이를 야단치며 산길을 내려오는 스님의 모습은 영락없는 속세의 필부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아이를 야단치는 스님의 목소리가 내게는 심산에 묻혀 근엄하니 독경좌선에 잠겨 있는 선승보다 더 정겹게 느껴진다.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이고 내려온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내게 그래도 합장을 하며 인사를 잊지 않는다.

자전거를 앞세우고 산길을 걸어오르는데, 저만치서 스님의 외침이 들려온다. 무언가 들고 헐레벌떡 달려온다. 내 카메라였다. 찾아가라고 해도 될 것을 부랴부랴 가져다준다. 그걸 찾아들며 이것도 자전거 덕이라 여긴다. 자동차에 올라타고 붕 떠났다면 어찌 산길을 오르는 스님이 따라잡을 수 있으랴.

오늘 길에는 무량사에 들러본다. 용화사에 비하면 엄청나게 큰 절이다. 절은 큰데,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입구에 곱게 쌓아 놓은 돌담에 앉아 본다.

벌서 날은 저물고, 모처럼 아름다운 노을이 물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저녁 노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저녁 노을이형덕
마을길로 접어 들어 한참을 오르는데 앞서 걸어가는 이웃이 보인다. 자전거에서 내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는다. 고추 수확부터 이번 비 피해와 누구네 집 짓는 이야기까지... 두런두런 나누다 보니 긴 길이 벌써 다 와 있다.

비록 자전거를 탄 것이 아니라 데리고 온 것이지만, 그래도 이웃과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여유가 좋았다. 자동차를 타고 지날 때면 꾸벅 고개 한 번 숙이고, 지나치던 만남이 이렇게 깊어지는 것이다. 아, 길이란 내가 걷는 것이 아니고 길이 내게 오는 것이구나.

이웃과 풀냄새와 노을과 서늘한 저녁 바람이 내게 다가오던 그런 길들이 자전거를 탄 내게 다가왔었다. 비록 마을 한바퀴를 이리저리 돌아다닌 길이지만, 내게는 자동차로 헐레벌떡 달려가던 강원도행의 여행보다 더 소중하고, 깊이가 있던 여행길이었다. 마당에 세워진 자전거를 보며, 나는 아직 내게 남아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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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면 광대울에서, 텃밭을 일구며 틈이 나면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http://sigo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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