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을 걷고 개울을 건너는 마을 할머니이형덕
개울을 건너와 신망애 재활원 길목에서 큰길과 만난다. 사람 걸어다닐 인도도 없는 차도 가상이로 눈치를 보며 자전거가 지나간다.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몸이 비틀거린다. 아스팔트에 그려진 도로 가상이의 흰선이 생사를 가늠하는 표지판 같다. 자동차를 타고 다닐 때는 모르던 걷는 이와 자전거 탄 이의 심정을 알게 된다. 자동차를 탈 때면 차도로 걷는 사람과 자전거 탄 이가 조심성없어 보였건만 이제는 순전히 입장이 바뀌었다.
만취대까지는 거의 평지에 가깝다. 운수리에서 차도를 버리고 다시 뒷길로 들어선다. 파위리로 들어선다. 처음엔 원적사로 가볼 셈이었지만, 경사가 만만찮아 용화사라는 표지에 눈을 돌렸다. 전원주택이 연이어 들어선 파위 골짜기로 들어서니, 차로는 들어설 수 없는 좁은 내리막 길이 나온다.
골짜기로 내려서는 길은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길인데 자전거는 여전히 함께 걷는다. 절이라기보다는 약수터 부근의 암자 같은 절이 나온다. 어디론가 막 나서던 나이 지긋한 주지스님이 약수나 드시고 가시란다. 한가로운 산막 같은 집의 뒤에 모셔진 불상이 아니라면 어디고 사찰이라는 느낌이 없다. 그래도 심상찮은 검은 바위 위에 불상을 올리고, 그 뒤에 샘이 솟는 곳에는 즐비하니 촛불이 켜져 있다.
그곳에 들러 물 한 잔을 마시고 나오자니, 혼자 책을 읽고 있던 스님 한 분이 따라 나오며 쉬었다 가란다. 마당의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원래는 무속인이 거처하던 곳인데, 이곳에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을 하고자 네 분의 스님이 자리를 잡았다 한다. 그러나 '원력'이 부족하여 아직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하면서도 이번에 안되면 다음 세상엔 되겠지라는 느긋함이 좋았다.
"절이 어디 볼 거 있습니까? 하지만 거처야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마음이 중요하지요."
이웃의 원적사가 큰 집을 짓고, 이번에 불국사의 다보탑을 본뜬 큰 탑 불사를 일으킨다는데 거기 비하면 이 작은 암자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슬그머니 스님의 옆구리를 찌르니 그 절의 스님은 원력이 좋으셔셔 그렇다는 말이다.
원력이 어디 지금의 노력뿐이랴. 이미 전생에서 쌓아온 공업의 소산이니 스스로 약한 원력을 탓하면서도 비록 지금은 그러하나 다음 세상의 성취를 기대하는 느긋함이 있다.
안동으로 설악산까지 두루 돌아다녔다는 스님은 이따금 심심할 때면 놀러 오라 권한다. 일어서려는데 주지 스님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녀석, 또 경치겠네."
앉아 있던 스님이 빙그시 웃으며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는 주지스님을 바라본다. 어린 아이 하나를 살피고 있는데, 학교가 끝났는데도 오지 않는 아이를 찾아 주지스님이 찾으러 나갔던 길이었다. 어디 가족도 없이 스님들 틈에서 자라는 아이야 절보다 또래친구들이 벅적거리는 피씨방이 더 좋았겠다.
"학원 끝나면 바로 오라고 했는데도, 또 게임방에 갔더만"
아이를 야단치며 산길을 내려오는 스님의 모습은 영락없는 속세의 필부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아이를 야단치는 스님의 목소리가 내게는 심산에 묻혀 근엄하니 독경좌선에 잠겨 있는 선승보다 더 정겹게 느껴진다.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이고 내려온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내게 그래도 합장을 하며 인사를 잊지 않는다.
자전거를 앞세우고 산길을 걸어오르는데, 저만치서 스님의 외침이 들려온다. 무언가 들고 헐레벌떡 달려온다. 내 카메라였다. 찾아가라고 해도 될 것을 부랴부랴 가져다준다. 그걸 찾아들며 이것도 자전거 덕이라 여긴다. 자동차에 올라타고 붕 떠났다면 어찌 산길을 오르는 스님이 따라잡을 수 있으랴.
오늘 길에는 무량사에 들러본다. 용화사에 비하면 엄청나게 큰 절이다. 절은 큰데,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입구에 곱게 쌓아 놓은 돌담에 앉아 본다.
벌서 날은 저물고, 모처럼 아름다운 노을이 물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