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외곽의 거리. 잠옷을 입은 여인들이 통화 중이거나 걷고 있다.노순택
언젠가 패션의 변천사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기술한 책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요즘 중고등학교를 막론하고 대학가에까지 '명품' 바람이 일고 있다지요. 한번은 어떤 고등학교 앞을 지나가다가 여학생들이 똑같은 가방을 메고 교문을 나서는 걸 보았습니다. 하얀 교복에 까만 가방...
'요즘은 가방까지도 교복인가 보구나' 했는데 알고 보니 '프라다 짝퉁'이라더군요. "비록 짝퉁(가짜)이라도 '명품'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무시당하지 않는다"나요. 한술 더 떠 '짝퉁의 세계'에도 등급이 있다며 '짝퉁같은' 짝퉁 보다는 '오리지널같은' 짝퉁이라야 제대로 대접을 받는다고 귀뜸을 하는 겁니다.
짝퉁같은 짝퉁은 무엇이며, 오리지널같은 짝퉁은 또 무엇입니까. 심지어 '짝퉁의 세계'에도 등급이 있을진대, 그렇다면 오리지널과 짝퉁의 사이에는 얼마나 깊고 넓은 강이 흐르고 있을까요?
신분계급의 구분이 엄격했던 봉건시대에는 옷차림이 곧 신분을 의미했고, 설령 돈이 있다해도 감히 걸칠 수 없는 의관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사회에선 돈이 곧 의복이요, 취향이며 문화이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신분과 남의 신분을 나누려는 얄팍한 시도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올해 1월에 타계한 프랑스의 비판적 지식인 삐에르 부르디외는 이미 20여 년 전부터 '구별짓기'라는 개념을 통해 계급의 취향과 생활양식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며, 그것들의 재생산구조와 의미는 무엇인지를 날카롭게 파헤쳐왔습니다.
문화는 단지 일탈이나 위반의 계기가 아니며, 패션 역시 단순한 옷걸치게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취미 또한 개개인의 성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계급투쟁-분류투쟁의 가장 격렬하고 미세한 장에 다름 아니라는 게 부르디외의 설득력 있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구별짓기'의 사회인 것이지요.
오리지널은 오리지널만의 '아우라'를 통해 짝퉁과 구별되려 하고, '오리지널같은 짝퉁'은 오리지널도 속아넘어갈 완벽한 흉내내기로 '짝퉁같은 짝퉁'과 구별되려 하며, 짝퉁같은 짝퉁은 이른바 '비명품'과 구별되려는 이 연쇄구조...
"어, 나는 그저 명품 사 모으는 게 취미라서 산 것뿐"이라고요? "계급이니, 투쟁이니 그런 건 잘 모른다"고요? "나 자신을 꾸미려 했을 뿐 남들을 무시하거나 구별되려 하지는 않았다"고요?
다시 중국입니다
중국에서 가장 잘 사는 동네, "13억 중국인민을 먹여살리는 게 우리"라는 프라이드가 지나쳐 배타성이 가장 심하다는 동네 상하이에서는 얼마 전부터 아주 재미있는 패션이 유행하고 있답니다.
이른 바 잠옷 패션이죠. 얼마전 상하이를 다녀온 어떤 분의 얘기를 잠깐 들어볼까요?
"음... 그러니까 상하이 최대의 번화가에 있는 한 유명백화점을 갔을 때였어. 단란하게 한 가족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데 모두들 잠옷을 입고 있지 않겠어. 그것도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실크 잠옷 말야. 게다가 여자 손에는 고급스런 핸드백이 쥐어져 있고, 모두들 번쩍번쩍 빛나는 구두를 신었더라고. 어찌나 우스꽝스럽던지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니까."
이것이 이른바 상하이를 휩쓴 잠옷 패션입니다. 더 고급스러운 잠옷을 입은 사람들일수록 '부자'라는 신분을 나타낸다나요. 중국의 패션문화는 개혁개방 특구들이 많은 상하이, 광저우 등의 남방에서 먼저 유행한 후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감안하면, 적어도 수억명이 잠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만약 부르디외가 살아서 이런 세태를 전해들었다면 뭐라고 얘기했을지 궁금해집니다. 그 역시 한 번은 웃었겠지요. 속된말로 '우끼는 얘기' 아닙니까.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한 허위의식적 소비가 '잠옷'패션으로 나타난 것에 대해 '샤오쯔 문화'(소자산계층 문화)가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경계의 목소리가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겠습니다만,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있는 중국에서 이런 자성의 소리에 얼마나 힘이 실릴지는 모를 일입니다.
사진은 베이징 외곽의 거리입니다. 오후 대여섯 시나 됐을까요? 번쩍이는 잠옷을 입은 여인은 전화를 걸고, 꽃무늬 잠옷을 입은 여인은 남자와 길을 걷고 있군요. 아직 베이징은 상하이만큼 잠옷패션이 유행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오후 무렵이면 심심찮게 잠옷만 걸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분들은 유행패션을 따랐다기보다는 그냥 별 뜻 없이 잠옷만 걸치고 길을 나선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요즘에야 별로 없지만 20여년 전 서울만 해도 동네에서 잠옷바람으로 가게에 물건 사러 가는 사람들 많이 봤거든요.
두 잠옷 여인 사이에 짐싣는 자전거들이 주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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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옷패션에 대한 정보는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는 박현숙 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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