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폭력 헤쳐온 민중의 이름

<즐거운 책읽기> 권정생의 <몽실 언니>

등록 2002.09.02 23:13수정 2002.09.03 11:39
0
원고료로 응원
a

ⓒ 정병진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은 해방 전후의 혼란스럽던 정국과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대표적 대하 소설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에 견줄 만한 빼어난 작품을 아동문학에서 고르라면 나는 단연코 권정생의 <몽실 언니>를 들고 싶다.

일전에 정운영 교수가 작가 조정래씨와 대담하면서 <태백산맥>에서 누굴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썼느냐고 묻자, 그는 굳이 주인공을 말한다면 하대치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뜻밖이었다. 작품에서 하대치는 김범우 같이 학식 높은 민족주의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염상진 같은 철두철미한 공산주의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극한의 가난에서 떨쳐 일어선 무식한 농투성이에 지나지 않았던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데 작가는 왜 그를 주인공이라고 말했을까? 그것은 민중의 전형인 하대치만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았기 때문이란다. 그 대답을 듣고 보니, 비로소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이 '몽실 언니'는 전쟁의 참화와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 남은 민중의 질긴 생명력을 형상화한 인물이 아닌가 싶다. 작품에서 몽실이는 흔히 동화가 그러하듯이 가난하지만 장래가 촉망된 똑똑한 아이나 별난 아이였다는 식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보다 몽실이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불우한 결손 가정 아이들 가운데 하나에 더 가깝다. 비록 남들 다니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으나, 마음씨 곱고 사려 깊은 아이라는 점은 돋보인다. 그러니까 몽실이는 해방 전후 가난했던 시절의 격랑을 헤쳐온 우리네 할머니나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다.

이야기는 어린 몽실이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어려운 가정사와 민족의 수난이 계속 겹친 채 진행되고 있다. 배고픔을 도무지 견딜 수 없어서 남편이 돈을 벌러간 사이에 새로 시집을 가버린 어머니, 새아버지의 폭력으로 입은 다리 장애, 처참한 전쟁, 새어머니 북촌댁의 죽음, 거지생활, 친어머니의 죽음. '몽실 언니'를 읽노라면 착하디 착한 몽실이에게 왜 이리 슬픈 일이 계속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처연해질 정도다.

어디에고 희망의 전조가 보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몽실이 주변에 누구도 몽실이가 기댈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어린 몽실이가 오히려 돌봐줘야 할 짐이 되었다. 마지막에는 곱추 남편까지도 말이다.


어린 몽실이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었다. 친어머니가 새어머니 북촌댁이 낳은 불쌍한 난남이에게 젖을 물려주지 않는 것도, 착한 북촌댁이 몹쓸 병으로 쉽게 세상을 떠난 것도, 국군과 인민군이 서로를 죽이는 것도, 양공주가 낳은 검둥이 아기를 죽이려 달려드는 뭇 어른들도…. 전쟁 중에 만난 인민군 최금순 언니는 국군과 인민군 중에 누가 더 나쁘고 누가 착하냐고 묻는 몽실이에게 이런 대답을 들려준다.

"사람은 누구나 처음 본 사람도 사람으로 만났을 땐 다 착하게 사귈 수 있어. 그러나 너에겐 좀 어려운 말이지만, 신분이나 지위나 이득을 생각해서 만나면 나쁘게 된단다. 국군이나 인민군이 서로 만나면 적이기 때문에 죽이려 하지만 사람으로 만나면 죽일 수 없단다"<124쪽>


작가는 1984년에 나온 초판 머릿글에서 '몽실 언니'를 "너무도 어렵게 쓴 작품"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최근에 나온 개정판 서문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몽실 언니는 작가가 본래 원고지 1천장 분량으로 쓸 계획이었으나, 겨우 7백장으로 대폭 축소되어 끝맺게 되었다 한다. 일부의 인민군 이야기가 잘못되었다고 당국의 압력을 받은 것이다.

작가에 따르면, 그 내용은 인민군 청년 박동식이 몽실이를 찾아와 통일이 되면 서로 편지를 하자고 주소를 적어주는 장면이었단다. 통일을 앞둔 지금, 일반의 왜곡된 민족 적대의식을 누그러뜨리고 통일의 절박한 필요성을 환기시켜준 그러한 내용이 잘려나갔다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원치 않은 전쟁과 분단으로 고통 당하는 민중을 상징하듯, 몽실이는 다리를 절면서 힘겨운 폭력과 가난의 나날을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야 했다. 이토록 슬픔으로 점철된 몽실이의 이야기는 "그때를 아십니까?"에나 나옴직한 지나간 과거의 회고담으로 그치지 않는다.

작가가 작품에서 제기한 문제가 아직까지도 우리네 삶 가운데 버젓이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몽실이가 행복하게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폭력, 분단, 가난, 차별이 사라지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수밖에 없음을 독자는 깨닫게 될 것이다.

몽실 언니 - 권정생 소년소설, 개정판

권정생 지음, 이철수 그림,
창비, 2012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2. 2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3. 3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4. 4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5. 5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