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른 즈음에 어떠했었던가요

강제윤의 보길도 편지

등록 2002.09.09 10:23수정 2002.09.11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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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밤, 외딴 참호 안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전령을 기다리는 전사가 있습니다.
말발굽 소리는 점점 가까워오는데, 전령의 뒤에서 들리는 또 한 떼의 말발굽 소리.
그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말을 타고 오는 전령은 대체 어떤 전갈을 가지고 오는 걸까요.
누구나 맞이했고, 누구나 맞이하게 될 저 서른 살이라는 세월의 전령은.

후배는 지난 봄 여러 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여름부터 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했습니다.
새로 시작한 일의 성패에 대한 불안과 곧 닥쳐올 서른이라는 나이가 주는 무게로 인해 후배에게는 이 가을날들이 아주 많이 고독한 전장입니다.
후배가 보내온 진중 편지에서 진한 외로움이 묻어납니다.


"학교 다닐 때 서로의 고민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고, 서로 배려하고, 상대방을 통해 자신을 변화 발전시킨다고 믿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더라도, 그러한 관계는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에 대한 단상 하나.
- 졸업을 하고 학교 임시교사를 하던 친구는 목포에서 옷가게를 하던 엄마가 건강이 악화되고, 집안에 여러 문제들이 생기자 자신이 가게를 운영해야만 했지요! 목포에서 2년여 가게를 하면서, 가끔 남대문 시장에 올 때마다 오랜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 친구에 대한 단상 둘.
- 20대 중반 나도 힘들게 살아갈 때, 혼자 남해의 외딴 섬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 불쑥 그 친구 사는 목포를 갔었지요. 갈 때는 자고 가려는 생각이었는데, 그 친구와 친구의 엄마가 사는 집에 도저히 내가 끼여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황급하게 올라오고 말았습니다.

그 친구에 대한 단상 셋.
- 제가 시립대 뒤편 허름한 자취방에서 살 때, 그 친구가 이대로 살아서는 안되겠다고 아픈 엄마를 뒤로하고, 공부한다고 상경을 했습니다. 마땅히 기거할 곳이 없어 제 자취방에서 함께 생활했었는데... 교사의 꿈을 가지고 임용고시를 준비 했었죠!

3달 정도를 지내다가 당뇨가 악화된 엄마 때문에 다시 내려갔습니다.
"요즈음은 엄마랑 일요일마다 교회를 나가."
한달 후쯤인가 그런 내용으로 통화를 했었습니다.


그 친구에 대한 단상 넷.
- 그 뒤 한 1년이 지났을까, 다시 상경을 했습니다.
아는 사람 소개로 회사에 취직을 했다구요!
웹사이트 제작 및 마케팅을 대행해 주던 회사라고 했습니다. 축하해 주고 싶었습니다. 참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친군데, 사회진출과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아 걱정이 컸었거든요!

그리고 한달 후 점심을 같이 먹자고 온 친구의 얼굴에 고단함이 배어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대화 중에 50%만 알아들어."
목포에서 옷을 팔던 그 친구에게는 웹과 관련된 용어가 너무나 생소하게 들어왔을 겁니다.


그 친구에 대한 단상 다섯.
- 회사 일에 너무나 잘 적응하면서 다닌다고 가끔 통화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와 연애를 하던 친구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혜민이가 심각해."
"뭐가?" "모든 생활의 패턴이 교회로 집중되고, 나도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아."

그러고 생각해 보니 가끔 만나는 나에게도 함께 교회에 가자고, 졸랐던 기억들이 났습니다. 무심코 넘기고, 농담으로 받아치곤 했었지요.

남자친구의 얘기로는 주말마다, 심지어 여름휴가 때도 데이트를 하기보다는 교회에 가는 시간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럼, 너도 교회에 다녀."
그렇게 얘긴 했지만 쉽지만은 않겠다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그 친구에 대한 단상 여섯 .
- 많은 선후배들 사이에서 그 친구에 대한 얘기가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선배는 전화를 해서, 그 상태가 될 때까지 무얼 했냐고 난리를 치기도 했습니다. 저는 안타깝지만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그가 살아온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뿐더러, 그가 힘들고 외로울 때, 그래서 무언가를 의지하고자 했을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옆에 없었다는 사실이니까요!

그 친구에 대한 단상 마지막
- 아주 오랜만에 전화가 왔습니다.
"점심시간 괜찮냐?" "그래."
한 1년만에 만나는 사람들의 대화치곤 좀 싱거웠습니다.
회사 앞에서 점심을 먹는데, 회사를 그만두었다더군요!

조금 쉬고 싶었고, 이제 경력도 좀 된다고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서로 만나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나이는 나보다 어린데, 일단 신앙이 같고 나에 대한 배려가 깊어!"
"그래! 뭐가 어떻든간에 착하고 너한테 잘해주면 되지 뭐!"
그 친구가 피식 웃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피식 웃었습니다.

학교 때에 같은 관심과 같은 지향을 가지고 살아갈 친구라 생각했는데, 과연 서른 즈음에 우리가 바라보는 지향은, 살고 싶은 세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깨닫기에는 서른이라는 나이는 아직 이른 것인가요?

추신) 사이트 막바지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이제부터 사업시작입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고비들이 있었지만, 잘 넘기고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9월 9일 오픈이거든요. 처음이 중요한데, 가슴이 떨리네요.


나 또한 서른의 문턱을 넘어 선 지 오래지만 후배의 고민은 현재의 내 고민에 다름 아닙니다.
삶이 지속되는 한 삶에 대한 성찰은 끝날 수가 없겠지요.
가을 밤, 나는 전장의 참호 속에 있는 후배에게 짧은 답장을 띄웁니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 했으니, 삶은 그토록 소중한 것이다.'

그래도 말이다. 소로우의 말처럼 삶은 그토록 애타게 소중한 것이 아니겠니. 우리는 자주 삶으로부터 배신을 당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마저 삶을 배신할 수는 없겠지.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우리는 삶의 노예가 아니라 삶의 주인이므로.

이제 곧 길고 고된 여름날의 노동이 결실로 돌아오게 되었구나.
축하한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

너도, 나도, 그 여름날의 태풍마저 견디고 잘 살아왔으니, 이 가을
무엇이 안타깝고, 아쉽다 하겠니.
행복하여라,
화염의 나날과 폭풍우를 뚫고 찾아 온 네 스물 아홉의 가을은.

저녁 무렵, 모처럼 만에 배추김치를 담갔다.
그 동안은 작년 김장 김치로 잘 버텨왔다만 이제 묵은 지도 다 떨어지고, 김치 없는 밥을 여러 날 먹다보니 김치가 그립더구나.
좀 무리하게 지출해서 배추를 샀다.
배추 값이 많이 비싸더구나.

조그만 크기의 배추가 네 포기에 1만3천 원, 무 한 개가 3천 원.
텃밭의 갓과, 열무도 뜯어다 양념에 버무려서 담았더니 중간크기 김치 통으로 두 개가 나오더라.
저녁은 막 담은 햇김치로 달게 먹었다.
김치 몇 포기 새로 담았다고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더라.

이 선선하고 기분 좋은 가을 밤, 문득 한 현 선생의 글 한 구절이 생각나는구나.
너에게도 묵은 배추김치처럼 오래 두고 먹을수록 맛난 반찬이 됐으면 좋겠다.

"삶은 짧고, 죽음이 우리를 데려 가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삶의 전체적인 의미를 생각하는데 최선을 다하라."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후배는 서른 살의 날들도 잘 살아낼 것입니다.
나처럼 못난 사람도 아직껏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지요.
나는 서른 즈음에 어떠했었던가요.
적어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나 행복하지 않았으나
불행이 동행은 아니었다
나 아직 이룬 것 없으나
청춘을 허비한 적 없다
나는 늙지 않았다
누구도 쓸모 없다 손가락질 하지 않았다
마음이 굽어 얼굴을 들지 못하였구나.
나는 다시 숲으로 가지 않겠다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헤매지도 않겠다
나 아직 삶은 서투르나 소망은 건강하다
어리석은 늙은이처럼
지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겠다
(졸시, 삼십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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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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