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생활의 깨달음 수필에 담아

임의진, <종소리>(이레)

등록 2002.09.12 21:28수정 2002.09.16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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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진

서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슬픈 시인 기형도는, "우리 동네 목사님"이라는 시에서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이 말을 염두에 둔 것일까? 작가는 가난한 시골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일상을 자신의 스승이라 말한다. 과연 이 수필집은 거창하고 별난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의 진솔한 생활을 그대로 옮겨 적어 놓은 것이다. 이 점은 그의 첫 번째 수필집인 "참꽃 피는 마을"에서도 그랬거니와 이번도 역시 마찬가지다.

남도의 변방 강진에서 재작년 여름에 그를 만났을 때다. 그가 맡아 일하고 있는 남녘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백련사로 우리 일행을 데려 가는 것이었다. 그곳 주지 스님과 차(茶)를 한 잔 나누기로 약속되어 있다면서.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지역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모습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그가 얼마나 스스럼없이 사람들을 만나며 일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


요즘 들어 귀농이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거덜난 농촌의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가기란 그리 녹녹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작가는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나름대로 재미나게 사는 것 같다. 여기에는 "짠하고 안쓰러워 거두어주고 싶은 인간"이라며 그를 아끼고 챙겨주는 동네 사람들의 연민이 크게 한몫하고 있단다. 물론 이것은 그냥 아무나 되는 게 결코 아니다. 기꺼이 농촌 총각의 말벗이 되고, 시골 노인들의 아들 노릇을 도맡아 하는 작가의 지극 정성이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를 배운다. 가난한 시골 사람들의 아픔을 나누는 따스한 마음도, 이웃 종교와 허울 없이 지내는 열린 신앙도,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와 우리말을 맛깔스럽게 담아내는 글 솜씨까지도 말이다. 때때로 "왕사이비 목사"라는 악평을 듣기도 한다지만, 그의 자못 파격적인 목회활동은 누구나 그에게 다가설 수 있는 길을 툭 터놓고 있다. 가령, 동네 사는 벌골 할매 생신에 초대받아 목사님이니 기도 한번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는 이렇게 기도한다.

"하느님! 눈 내리는 저녁, 이렇게 밥상에 둘러앉았습니다.
우리 할머니, 관세음보살 같은 우리 할머니.
오늘이 예순아홉 해째 되는 생신날이랍니다.
자녀들과 이웃들 이렇게 축하드리는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하느님! 무어라고 하느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년에도 저 내년에도, 할머니 생신날이면 우리가 이렇게
모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거룩한 불자이신 우리 할머니.
그동안처럼 항상 도와주시고
마침내 극락왕생 하도록 이끄소서.
밥상을 마련한 손길 위에 축복하소서.
가난한 자들의 친구,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땅의 종교인들이 이 정도의 기도만 드릴 수 있어도 살맛 나는 세상이 되는 날이 멀지 않을텐데. 머시기 눈에는 머만 보인다고 이 기도 한 자락이 가슴에 울컥 와 닿았다. 걱정되는 것 한 가지. 이름이 알려지면 세상을 피하기 힘들다고 했던가?

본문 "손님"이라는 대목에서 언급되듯이 여기 저기서 그를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아 날이 갈수록 손님 접대하기가 그의 성가신 일이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혼자만 조심한다고 될성싶은 일은 아니겠지만, 그가 너무 바쁘지 않았으면 한다.

종소리 - 임의진 참수필집

임의진 지음, 이동진 그림,
이레,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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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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