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잎 깔아 소담하게 쪄낸 떡속에
꼭꼭 눌러 담은 맛있는 이야기들

[추석특집] 송편 빚는 날의 맛있는 추억

등록 2002.09.17 11:35수정 2002.09.18 10:24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추석이 즐거운 것은 뭐니뭐니해도 먹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저것 떠올릴 것 없이 한 순간에 '추석 맛'을 느끼게 해주는 먹을거리는 누가 뭐래도 송편이다.


떡살과 고물 준비를 마친 추석 전날, 어머니는 솔가지를 몇 개 쳐오라고 하신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쏙쏙 뽑히던 솔잎이 또 추석 무렵이 되면 가지에 묻혀 있던 끝 부분에 까만 깍지를 달고 나와 그냥은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소쿠리 끼고 그 자리에서 뽑아오는 것이 더 좋겠지만, 낫 한 자루 들고 야산에 올라 그래도 거미줄 안 치고 말끔하게 생긴 놈으로 두어 가지 꺾어온다. 그리고 마당에 놓고는 가위로 솔잎만 잘라내서 한 바가지 씻어낸다.

이렇게 떡살과 고물과 솔잎까지 차려놓은 서늘한 가을 오후에 송편 빚기가 시작된다. 막내 작은어머니나 고모가 반죽을 해서 한 개 크기만큼 똑똑 잘라 던지면 어머니와 둘째 작은어머니, 그리고 누나들과 내가 받아서 송편을 빚는다.

이럴 즈음에 남자들은 밤을 까고 깎는 등 억센 칼질을 하거나, 오랜만에 들른 집 구석구석 일거리를 찾아 삽질도 하고 못질도 하면서 시간 죽이기를 한다. 그런데 누나 둘 사이에서 자란 안방사내의 위치는 좀 어중간해서, 어머니가 '은식이 송편이 우리 집에서 제일 예쁘다'고 잡아끌면 송편을 빚기도 하고, '나와서 이것 좀 들어 옮겨라, 여기 좀 치워라'하는 아버지나 작은아버지들의 고함이 들리면 또 손 털고 쫒아나가게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가 좋은 자리를 꼽으라면 단연 송편쟁반 앞이고, 또 필요하다면 부엌 언저리이다.

추석은 무언가 함께 떠올리는 시간이고, 일하는 시간이고, 먹는 시간인 동시에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시간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사촌 이내 식구들의 소식을 직접 듣고 덕담을 하고 참견을 하는 시간이 일년에 설을 빼면 추석뿐이다. 그런데 송편쟁반을 둘러안고 나누는 것들이야말로 추석 이야기마당의 본무대가 된다.

흔히 제대로 둘러앉아 남자들이 이야기를 주도하는 추석날 아침 차례상에서야, '넌 자리가 잡혔나? 음, 그래 얼른 잡혀야지'하는 식의 엄숙하고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뼈대들만 오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차례상 준비로 한창 바쁜 부엌에서는 각자 끓이고 부치고 굽고 씻느라 얼굴 마주칠 겨를도 없기가 쉽다.

그래서 각 집안 대표선수들이 얼굴을 마주하고, 손은 바쁘되 입이 심심한 송편 빚는 시간이야말로 별 것 따질 필요 없이 그저 여유만만하게 수다를 떠는 시간이다. 이 시간만은 아마도 서로 떡가루 묻혀가며 같은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로서의 공감대 때문인지, 일 년에 한두 번 몰아서 듣게 되는 직장문제, 결혼문제 등등의 난감한 문답도 꽤 부드럽게 넘어간다.


어느 사촌동생이 학교에서 무슨 상이라도 받았다면, 장황한 축하의 말부터 더 장황하게 이어지는 비슷한 자랑거리, 혹은 누구누구가 십여 년 전 학교에서 받은 더 큰 상 이야기들. 또 어느 집에서 자동차 접촉사고라도 났었다면, 사람 안 다치길 천만다행이라는 위로와 함께 이어지는 누구누구네 집 더 큰 사고 이야기, 각자 차 이야기, 또 차 없던 시절 이야기들.

아마도 그렇게 손끝으로 꼭꼭 눌러지는 이야기와 웃음, 흥분과 탄식이 추석 분위기만큼만 여유 있게 다져 들어가 송편은 시루에 앉는다. 그리고 깨끗한 솔잎으로 덮여 소담하게 쪄내진 떡을 하나 집어들고 투명한 느낌까지 감도는 떡살 속으로 비치는 깨고물 까만 빛깔이 침을 모으고, 서늘한 가을 공기 속으로 하얗게 번지는 김을 따라 전해오는 쌉쌀한 솔내음.


엉겨붙은 솔잎을 하나하나 떼어내고 입에 넣으면 앉아있던 자리마다 그어진 솔잎 무늬가 혀에 만져진다. 그리고 속 간이 딱 맞는다는 둥, 떡살이 쫄깃하다는 둥, 그리고 이건 한눈에도 못생긴 것이 누가 만든 것이니 누가 다 먹어야겠다는 둥 수다를 떨어가며 가을과 추석과 가족의 향을 씹는다. 그리고 쪄낸 송편시루를 둘러싸고는 하늘에다 비춰보면서 깨떡을 고르는 꼬마들 등짝도 한 대씩 쳐대며 잔소리도 한다. 송편은 이렇게 먹는다.

동네 입구에 현수막 걸릴 만큼 출세한 것도 없고 이날 아니라도 쌀밥에 고깃국 배불리 못 먹을 일도 아니지만,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기 부담스러울 때도 있고 괜히 번잡스럽기도 하지만 또 여름 지나면 추석이 기다려진다. 송편을 빚고 먹는 시간이 있어서인 것 같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전국 최고 휴게소 행담도의 눈물...도로공사를 향한 외침 전국 최고 휴게소 행담도의 눈물...도로공사를 향한 외침
  2. 2 "꽝" 소리 나더니 도시 쑥대밭... 취재기자들도 넋이 나갔다 "꽝" 소리 나더니 도시 쑥대밭... 취재기자들도 넋이 나갔다
  3. 3 [단독] 김태열 "명태균이 대표 만든 이준석,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단독] 김태열 "명태균이 대표 만든 이준석,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4. 4 1만2000 조각 났던 국보, 113년만에 제모습 갖췄다 1만2000 조각 났던 국보, 113년만에 제모습 갖췄다
  5. 5 빨래터에서 얼굴 한번 보고 결혼을 결심한 남자 빨래터에서 얼굴 한번 보고 결혼을 결심한 남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