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부 수급'은 폐지되어야 한다

현행제도, 최소생계욕구마저 충족시키지 못한다

등록 2002.09.18 15:31수정 2002.09.19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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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부가 추진했던 사회개혁 프로그램들은 하나같이 성한 것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의약분업, 건강보험 통합, 국민연금 전국민 확대 등이 모두 심각한 문제가 노정되었다.

특히 생산적 복지의 꽃으로 내세우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역시 삐걱거리고 있다. 내년부터 소득인정제를 실시하게 되어 있는데, 과연 제대로 시행할 수 있을지 의문시된다. 보수세력들의 저항도 강했지만 현 정부가 국민을 설득하지 못하는 무능함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현 정권이 국민들이나 보수세력을 설득하기보다는 차라리 그 쪽의 입장을 반영해 한 수 접어주고 도입한 것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조건부 수급>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근로능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가난한 사람에게 일할 것을 조건으로 생계급여를 제공하는 것이다. 소위 퍼주기 복지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일을 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선행조건으로 일하는 것을 부과한 것이다.

이렇게만 알아들으면 괜찮은 제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위 진보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조차 그러하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사회복지제도 중에서 공공부조에 속한다. 즉, 일정 수준 이하의 가난한 사람에게 국가가 자산(소득)조사를 행하여 대상자를 선정해서 생계급여를 제공해주는 제도라는 것이다. 보수적 인사들 중에는 이러한 공공부조제도 자체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많다.

가난하면 제 힘으로 벌어먹어야지 국가가 어떻게 생활비를 대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 제도의 대상자('수급자'라 부른다)가 되려면 최저생계비 이하의 소득과 일정 정도 이하의 재산 수준이어야 하지만, 우선적으로 부양의무자가 없어야 한다.


이것이 외국과 다른 우리 제도의 특징(?)이다. 예전에 생활보호제도에서는 민법상 부양의무자의 범위를 준용했으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는 2촌 이내의 친족으로 한정지었다. 그만큼 수급권자에게는 유리해진 것이다.

부양의무자 조건을 두는 것은 가족부양을 철저하게 개인책임으로 돌리겠다는 취지이다. 복지국가처럼 사회부양의 이념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자식이 노부모를 버리고 지내도 호적상 부양의무자가 있기 때문에 국가는 그런 노인들을 돌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국가가 1인에게 20여만 원, 4인가구일 때 80여만 원을 제공하는 것이 퍼주기 복지라고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부양의무자가 없는 4인 가구는 흔히 도시근로자 평균소득을 말할 때 대표적인 예로 드는 4인 가족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이들은 부양의무자도 없고 근로능력도 없고 재산과 소득이 법에서 정한 최저수준 이하에 있는 사람들이다. 대개 노인, 장애인, 아동들이다.

그런데 현행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는 수급자를 근로능력이 있는 사람까지 확대한 것이다. 일하는 조건을 달아서 말이다. 과거 취로사업의 취지를 발전적으로 계승했다고나 할까? 대부분의 조건부 수급자들은 자활후견기관의 자활사업에 참여해서 일을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이들의 근로능력이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다. 이미 사회로부터 일자리에서 배제된 지 오래 되었고,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정상적으로는 직업활동을 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자활후견기관에서도 이들에게 생계의 근거가 되는 일자리를 마련해주기 어려운 것이다. 일을 해서 얼마간의 소득이 생기면 국가는 생계급여에서 그만큼의 액수를 공제하고 준다. 물론 10% 정도 소득공제를 해주기는 한다. 그러니까 일을 하라고 해 놓고 일을 하지 않도록 유도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하기 싫은 일이라도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근로의 자유나 직업선택의 자유 같은 헌법상의 권리는 별로 고려되지 않는다. 이렇게 열악한 조건을 가진 사람들에게 강제노역 같은 일을 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근본적으로 빈곤이나 실업의 책임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관념 때문이다. 이것은 농경사회에서 오랫동안에 걸쳐 형성된 거의 고정관념이다. 농업의 속성상 약간의 노동이라도 할 수 있다면 생산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빈곤과 실업이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빈민과 실업자에 대해서는 아직도 처벌주의적인 관념이 지배적이다. 이것은 사회의 희생자에게 비난을 가하는 태도일 뿐이다.

앞으로 조건부 수급은 폐지해야 한다. 부양의무자 조건과 무관하게 실업자를 위한 자활정책이 수립되어야 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들에게는 일단 생존의 욕구를 충족해주는 제도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그들을 가난하게 한 사회가 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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