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깨어있으라?

틱낫한,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

등록 2002.09.18 22:02수정 2002.09.19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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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진

바야흐로 틱낫한 열풍이다.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된 틱낫한 스님의 책만도 무려 11권에 달하며 속속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이러한 틱낫한 열풍은 우리 사회에 명상에 대한 새로운 붐을 일으키는 데 적지 않게 일조하고 있는 모양이다.

주위를 둘러볼 겨를도 없이 일에 매여 바삐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생각하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마음을 닦고, 생각을 바르게 다스리며,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임제선사는 "바로 지금이지 다시 시절이 없다"(卽時現今 更無時節)고 일갈한 바 있다. 이 말처럼 틱낫한 스님은 "지금 이 순간"을 자각하라고 계속하여 강조한다. 먼 미래를 꿈꾸거나 과거에 매여 정작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지 않는 사람들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깨어있는" 맨 정신으로 테러를 응징한다는 명목 하에 또 다른 살상을 일삼는 전쟁을 준비할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다. 또한 깨어있는 상태에서 이성을 잃고 분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자신을 예리하게 알아차리고 깨어있도록 만드는 명상훈련은 여러모로 유익하리라 본다.

번역자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은 류시화씨가 틱낫한의 허락을 얻어 그의 대표적인 저서 20여권과 강연 및 글 중에 핵심적인 가르침들을 골라 편집하여 펴낸 것이다. 나는 틱낫한의 글을 처음 읽기 때문에 80여권에 이른다는 그의 방대한 책들을 모두 읽기는 힘들고 해서 이 책을 먼저 택해서 읽었다.

사실 그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골랐다"는 데 무엇보다 끌렸다. 허나, 읽은 소감은 기대했던 만큼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극렬한 베트남 전쟁 한 가운데서 목숨을 걸고 평화운동을 벌여왔다는 틱낫한이었기에 여타의 명상가들의 그것과는 다름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다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틱낫한은 깨어 있는 마음으로 호흡하고, 걷고, 한 잔의 차를 마실 때 고요와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삶의 궁극적인 차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절대의 세계는 죽은 다음에 도달하는 세계가 결코 아니다. 즉 명상은 5년이나 10년 뒤에 깨달음을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을 진정으로 느끼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명상은 생각하고 두뇌를 회전시켜 분석해야 하는 사색과는 다르다. 그보다 명상은 마음을 쉬고 이 순간 일어나는 일을 자각하기 위해 깨어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틱낫한의 이러한 기본 가르침은 여러 예화들과 함께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 이는 라즈니쉬의 말하는 방식과 엇비슷한 면이 있다. 그의 글이 쉬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그의 글은 명상을 오래 한 사람답게 매우 맑고 정갈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세파에 찌든 독자들에 강력한 호소력을 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하지만, 틱낫한의 가르침에 대한 약간의 의구심도 생겼다. 하긴,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건 틱낫한에 한정된 문제만이 아니라 명상이나 영성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에 대한 전반적인 의구심이다.


틱낫한은 본문에서 사람을 파도에 비유하여 "파도의 차원"과 "바다의 차원"을 말한다. 그가 보기에 사람이 파도의 차원에 머물러 있을 때 끊임없이 우월함과 열등함에 시달린다. 예컨대 "왜 나는 이렇게 작은 파도에 지나지 않은가?", "왜 다른 이들은 큰 파도로 창조되어 존경을 받는가?" 이런 의문들을 갖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심한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고 그들 중에는 모든 것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 혁명가가 되려는 자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 파도의 차원을 넘어 서면 탄생과 죽음, 위와 아래, 존재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없는 바다의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틱낫한은 이 바다의 차원은 파도의 삶을 살면서 깨달음을 얻으면 동시에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언뜻 보기에 그럴 듯한 비유다.

그러나 욕망과 망상, 고집이 없는 평정된 삶이라는 것도 어쩌면 무미 건조하고 불행한 삶이 아닐까? 가령, 깊은 산 속에 은둔하여 홀로 오두막을 짓고 사는 것도 그것이 좋아서 하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엄청난 고역일 것이다. 적어도 이 땅을 발 딛고 사는 한, 누구든 역사에 대한 책임을 초연하게 지워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며 또한 가부좌만 틀고 앉아 살수도 없다.

요컨대 홀로 홀연히 득도(?)하기보다는 소란스럽기는 해도 부단히 거짓되고 잘못된 현실을 고쳐나가며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이 내게는 더욱 귀하게 보인다. 그러려면 명상이라는 것도 이를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활용하는 것은 좋으나, 여기에 모든 참 진리나 있는 것처럼 말한다면 동의할 수 없다.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

틱낫한 지음, 류시화 옮김,
김영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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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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