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 보유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pentagon
부시 행정부의 대표적 매파인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기정사실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국내 일부 보수언론이 이에 부화뇌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큰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럼스펠드 장관은 지난 16일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발언을 해 파문을 일으킨 이후에, 이틀 뒤인 18일에 열린 하원 군사위원회에서 다시 "북한은 `거의 확실히(almost certainly)' 핵무기들을 갖고 있고 미국 대륙의 대부분 지역에 도달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고 주장해 자신의 발언이 '실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럼스펠드 장관의 발언에 이어 미 국무부는 정례 브리핑을 통해 북미대화가 재개될 경우, 최우선적으로 핵문제가 거론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물론 부시 행정부는 2001년 6월 대북대화 재개를 선언한 이후, 핵문제가 최우선적인 의제가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왔다. 그러나 미국측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현상으로 미국측의 의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럼스펠드 지원 사격
<조선일보>는 럼스펠드 장관 발언 이틀 후, 그리고 북일 정상회담 다음날인 19일 "'북한 核·미사일' 더 미룰 수 없다"는 제하의 사설을 통해, 럼스펠드의 발언을 "의미심장"하게 다뤘다.
<조선일보>는 이 사설을 통해 럼스펠드 장관과 토머스 허바드 주한미국 대사의 북한 핵무기 관련 발언을 소개하면서 "이를 그저 지나가는 말로 치부할 수는 없다. 전후사정으로 미뤄볼 때 럼스펠드의 발언은 상당한 목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이어 "북한 핵문제의 시급성 등을 감안할 때 미국정부는 핵·미사일·북한 위협 등을 의제로 하는 본격적인 대북(對北) 담판에 나설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며, "이를 위해서는 한·미·일 3국이 북한 관련 정보들을 모두 공유하면서 효과적인 대북공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이는 럼스펠드 발언의 사실 여부를 떠나 미국 주도의 한미일 공조체계가 작동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조선일보>의 사설에 하루 앞서 <동아일보>는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다면"이라는 가정형의 표현을 써가면서 "너무나 놀라운 발언이어서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며 회의적인 반응으로 사설을 시작했다.
특히 <동아일보>는 럼스펠드 발언의 진위와 의도, 그리고 한국 정부에의 통보 여부를 문제삼으면서 사실 확인부터 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이내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사실로 판명된다면 대북정책은 전면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핵무기의 실험 생산 사용 등을 하지 않기로 규정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위반한 북한과 지금처럼 태평스럽게 교류할 수는 없다.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는데 국민에게 눈감으라고 할 수는 없다. 미국 등 국제사회의 대북정책도 핵개발 중단이 아니라 핵무기 폐기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며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렇듯 국내 보수언론이 미국 강경파의 장단에 춤을 춰온 것은 물론 새로운 것이 아니다. 보수언론은 남한 정부가 대북 강경노선을 추구할 때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리고 대북 화해노선을 추구할 때는 이를 발목잡기 위해 미국 강경파가 근거없이 주장해온 '북한위협론'을 확대재생산해왔다.
이러한 경향은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고, 이를 근거로 한미간의 이견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면서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에 딴지를 걸어왔다.
경의선, 동해선 철도와 도로 연결 착공식이 진행되고, 북일 정상회담을 통해 동북아 냉전구조의 또 다른 한축이 무너질 조짐을 보이자, 럼스펠드는 그 조바심을 '북한 핵무기 보유' 발언을 통해 나타냈고, 일부 국내 보수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덥썩 받아먹은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 조짐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냉전세력의 불안감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시 행정부의 '탈출구 찾기 전술'
럼스펠드의 '북한 핵무기 보유' 발언이나 이후 미국 국방부와 국무부가 '실언'이 아니라고 확인해준 것은 부시 행정부의 자기모순적인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만약 부시 행정부의 주장대로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이는 명백한 제네바 합의 위반이자 비확산체제의 근본을 뒤흔드는 엄청난 일이 된다.
럼스펠드 등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 증거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1990년대 중반 미국의 정보기관의 분석과 평가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성실히 준수하고 있다며, 매년 중유를 제공하고 비록 더디기는 하지만 경수로 사업을 진행시켜오고 있다.
미국 정부가 90년대 중반에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해놓고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준수해오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이다.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할 '조짐'만 보여도 정치적, 군사적 수단을 통해 이를 무력화해오려고 해오지 않았던가? 미국이 오래 전에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알고서도 가만히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럼스펠드의 북한 핵무기 보유 발언은 '사실'의 관점보다는 '정치적 의도'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는 일종의 '탈출구 찾기 전술'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선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지역의 가장 민감한 문제인 북한의 핵무기 보유설을 유포시킴으로써 급진전되고 있는 남북관계와 북일관계의 속도를 제어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북한의 전향적인 태도와 남한 및 일본이 여기에 호응하고 있는 모습은 미국 내의 강경파의 입지가 축소될 수 있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공격적인 대북 핵전략을 정당화시키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9월 초 미국의 노틸러스 연구소가 비밀해제된 문서를 입수해 폭로한 것을 보면, 미국은 91년 한반도 핵무기 철수와 94년 제네바 합의 이후에도 북한을 상정한 핵공격 훈련을 해왔던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또한 부시 행정부는 유사시 북한 등에 선제 핵공격을 할 수 있는 새로운 핵태세검토(NPR)를 채택한 바 있고,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럼스펠드이다.
이러한 공격적인 핵전략에 대한 미국 안팎의 비판이 거세지자, 럼스펠드는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핵무기 사용 옵션을 채택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근거를 제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또한 핵무기 등 이른바 대량살상무기 및 미사일을 파괴하기 위한 새로운 핵무기 개발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근거로도 활용될 수 있는 것이고, 또 실제로 럼스펠드는 이를 활용해왔다.
세 번째로는 한반도 냉전구조의 핵심축인 북미관계마저 급진전하는 것을 사전에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이 지금까지 문제삼아왔던 북한의 핵 문제는 제네바 합의 이전에 북한이 추출했을 수도 있는 무기급 플루토늄의 행방이다. 즉 북한의 과거 핵활동의 투명성을 확보하겠다는 것이고 이것이 제네바 합의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나가 북한이 영변 이외의 지역에서도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고 있다는 의혹을 갖고 있다. 즉 현재의 핵활동도 문제삼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있을 수도 있는' 비밀 핵프로그램도 사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최근에는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기정사실하는 것을 시도함으로써 북미관계에 까다로운 조건과 의제를 추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타당한 근거 없이 핵의혹을 제기하고 '없다면 사찰을 받아라'는 식의 오만한 일방주의적 행태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 책임을 북한에게 전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부시의 마지막 탈출구
마지막으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시의 탈출구는 또 있다. 이는 '테러와의 전쟁'의 총구를 북한으로 돌릴 가능성이다. 이라크 공격을 준비해온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의 무조건적인 사찰 수용과 유엔의 사찰 활동 준비로 벽에 부딪힌 상태이다.
부시 행정부는 대이라크 정책의 목표가 무기사찰이 아니라 '무장해제'와 '후세인 제거'라며 전쟁 고집을 꺾고 있지 않지만, 사찰이 재개되면 쉽게 공격에 나설 수도 없는 상황이다.
대이라크 전쟁 계획에 차질을 빚으면서, 부시 행정부는 느닷없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 등 북한위협론을 강조하고 나왔다. 북한이 미사일 시험 발사 유예를 연장하고 핵문제와 관련해 대화와 협상을 통해 풀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는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의 이러한 태도를 우연이라고 봐야 할까? 이라크 공격을 준비할 때는 "북한은 이라크와 다르다"고 강조했던 부시 행정부가 아니었던가?
물론 이는 '음모론'에 가까운 해석일 수 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근본적으로 전쟁과 전쟁 위협을 통해 먹고사는 정권이다. 이를 위해서는 외부에서의 적절한 위협이 있어주어야 하고, 위협이 없으면 만들어내야 한다.
2003년 미국의 군사비는 4000억달러에 육박한다. 군수산업체들은 전시가동체제를 유지하면서, 대량의 무기를 생산하고 있다. 군수산업체와 펜타곤의 창고에 쌓여가고 있는 무기들은 '전쟁'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부시 행정부는 이를 외면하기 힘들다.
집권 과정에서, 또 집권 이후에도 군산복합체로부터 막대한 정치 자금과 인적 수혈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가 군산복합체와 인적, 물적 네트워크를 유지·강화시키는 것은 재선을 위한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기어코 전쟁을 하고 말겠다는 부시 행정부의 입장에서 그 대상은 2차적인 문제이다. 또 마음만 먹으면 전쟁 명분은 쉽게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럼스펠드의 '북한의 핵무기 보유' 발언은 그 명분을 찾는 한가지 방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군산복합체에게 '전쟁'은 최대의 이윤을 보장한다. 그러나 전쟁이 쉽지 않으면 차선으로 '위협'을 찾아 나선다. 이 과정에서 이라크는 물론 북한도 예외일 수 없다. 암울한 현실은 이러한 부시 행정부와 군산복합체의 검은 커넥션과 못되먹은 버릇이 쉽게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일부 세력들이 끊임없이 '북한위협론'을 주창하는 것은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있기 때문이라고 치자. 그런데 이 땅의 일부 언론과 정치인, 그리고 지식인은 도대체 무슨 연유 때문에 미국 강경파들의 장단에 맞춰 덩달아 춤을 추고 있는 것인가?
덧붙이는 글 | 북한의 핵무장 능력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평화네트워크 홈페이지 (www.peacekorea.org)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