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주고 판매 1등하는 신문
우린 그런 '1등신문' 사양합니다"

홍석현 <중앙> 회장, 창간기념사서 '과열경쟁 중단' 촉구

등록 2002.09.23 17:40수정 2002.09.24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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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 사보 중앙

90년대 중반 이후 경품 공세와 무차별 증면으로 신문사들간의 판촉 경쟁이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무모한 증면 전쟁과 판촉경쟁을 지양하자"는 취지의 발언을 해 관심을 끌고 있다.

홍 회장의 발언은 자전거 경품 공세와 '경제섹션' 신설로 부수 확장 경쟁을 주도하고 있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두 메이저 신문사들을 겨냥한 것으로, "과열 경쟁을 지양하자"는 <중앙> 회장의 제안이 자사는 물론, 신문업계 전반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질지 주목된다.

홍 회장은 지난 19일 오전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창간 37주년 기념식 연설을 통해 "경쟁신문사들이 지난해 세무조사의 시련을 겪은 후 신문경쟁에 더욱 전력 투구할 것이라는 예측이 틀리지 않았다"고 전제하고 두 신문사의 과열 경쟁 양상을 비판했다.

홍 회장은 "어떤 신문은 올 봄부터 최신형 고가의 자전거를 판촉용으로 쓰기 시작했다. 신문 한 부에 자전거 한 대라는 가위 전대미문의 판촉 경쟁이 지금 신문시장에서 이뤄지고 있다"며 최근 논란이 돼온 동아일보의 자전거 판촉 공세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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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회장은 또 <조선경제>를 만든 조선일보를 겨냥해 "어떤 신문은 올 여름 <중앙경제> 섹션을 겨냥해 대량 증면을 단행했다"고 언급했다.

홍 회장은 이어 "자전거를 주고 판매에서 1등하는 신문이라면 1등신문이 아니고, 내용 없는 증면으로 1등하는 신문 역시 1등신문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양사를 비판하고 "증면경쟁, 판촉경쟁이 아무도 모를 무한 경쟁으로 치닫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홍 회장은 특히 "시장경제사회에서 언론도 경쟁에서 예외가 될 수 없지만, 그 경쟁은 값어치 있는 경쟁, 아름다운 경쟁이어야 한다"며 "무모한 증면전쟁, 상상할 수 없는 판촉경쟁의 늪에 빠지지 않고 우리 스스로 개혁해 나가야 무모한 신문경쟁이 사라질 수 있다. 다른 경쟁지들이 치졸한 판촉경쟁에 골몰하고 물량공세로 언론의 정도를 흐리는 과당경쟁에 빠져들고 있을 때, 우리가 의연히 이런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재 조중동 3개 신문은 내달 8일 발표될 한국발행부수인증협회(ABC 협회, 회장 최종률)의 보고서에 반영될 자사의 발행 및 유가부수를 최대한 늘려 잡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광고단체연합회, 한국광고주협회, 한국광고업협회 등 광고 3단체가 "ABC협회에 가입하지 않는 신문-잡지사에 대해 광고비를 차등 지급하거나 아예 광고를 주지 않겠다"는 얘기를 공공연히 하는 상황에서 신문업계에서는 한정된 독자층을 놓고 '총성 없는 전쟁'에 돌입한 상태라는 게 업계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실력자라면 외국인이라도 채용한다"
카이로, 모스크바 특파원 공개채용 '눈길'

"중동지역에는 아랍어, 러시아에는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는 기자를 보내자."

영어와 일어, 중국어 등에 어학실력자들이 편중된 우리 언론의 현실에서 언뜻 당연하게 들리는 '현지어 가능 인력의 특파원 파견' 원칙은 중동과 아프리카, 남미지역에서는 지켜지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홍 회장이 19일 기념사에서 "카이로·런던·모스크바에 해외특파원을 신설 또는 재파견해 신문의 질적 변화를 유도하자"고 밝힌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중앙>은 6개국 10명의 특파원을 보유하고 있지만, 모두가 미국과 유럽, 아시아에 치우쳐 있는 상황이다.

<중앙>은 런던 특파원의 경우 내부 기자들을 상대로 적임자를 물색하고 있지만, 카이로와 모스크바 특파원은 '현지 언어와 정세에 능통하고 한국어 구사가 가능한 사람으로서 취재 경험이 있거나 뜻이 있는 사람'에게 문호를 개방한 상태다.

<중앙> 경영지원팀의 담당자는 "외국인이라도 지원이 가능하다. 현지 대사관을 통해 문의해오는 경우도 있는데, 2일까지 접수를 받은 후 국장단 회의에서 심사를 하게된다"고 설명했다.

최근 3년간의 카이로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귀임한 연합뉴스의 이기창 기자(특신부 차장)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아랍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현지 영자신문 번역에 급급한 형편에서는 10∼20년씩 현지에 상주한 서구 특파원들과의 경쟁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왜 메이저 신문사들은 중동 특파원 1명 키우는 데 인색한가?"라고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돈 많은 신문사의 지역 전문가 양성'이 한국 언론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을 지 지켜볼 일이다. / 손병관 기자
"경제신문을 하나 더 준다"는 다소 유혹적인 홍보문구와 함께 8월부터 신설된 조중동의 '경제섹션' 역시 대기업 CEO의 사생활을 캐는 등의 흥미성 기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광고를 끼워 팔기 위해 지면만 늘렸다"는 뼈아픈 비판에 직면해 있다.

최근 서울 강남지역 땅값의 폭등이 사회 문제화되고 있지만, 아파트 분양 광고를 남발하고 "어느 곳의 땅을 사두면 수익성 있다"는 식의 광고성 기사를 마구 써댄 신문들은 책임을 면할 수 있는가라는 자성론도 나오고 있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중앙> 회장이 신문부수 경쟁을 주도하는 메이저신문사의 최고경영자라는 점에서, 홍 회장의 발언에 적잖은 무게가 실리고 있으나 혼탁한 신문시장을 진정시키는 데 어느 정도 효력이 있을 지는 미지수다.

<중앙> 고객서비스 지원팀의 관계자는 23일 "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부수 확장을 위해 본사에서 지국에 돌리는 지원비는 거의 없앴다. 이달 초부터 오프라인 독자를 상대로 온라인상의 유료 컨텐츠를 무료로 제공하는 프리미엄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무리하게 타 신문 독자를 빼앗아오느니 차라리 기존 독자를 철저히 지키자는 판촉전략의 변화로 해석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장기적으로 한정된 독자들을 놓고 신문사간의 경쟁이 날로 치열해져 언제까지 우리 회사만 '정상적인 경쟁'을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고 고민을 드러냈다.

김영호 전 세계일보 편집국장은 "조중동이 신문시장의 75% 이상을 점유하고 과열 경쟁을 부추기는 상황에서 당사자 중 한 명이 과열경쟁을 자제하자고 한 것은 분명 바람직한 발언"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장사꾼이 한 말이니 실천이 중요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한편 홍 회장의 과열경쟁 중단 촉구발언에 대해 따가운 시선도 없지 않다. 언론단체의 한 간부는 "칼부림 살인사건까지 촉발시킨 신문전쟁도 따지고 보면 <중앙>이 한몫을 했으며, 과열 판촉경쟁의 선두에는 늘 <중앙>이 자리하고 있었다"며 "경쟁사들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중앙>이 과연 정도를 지킬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홍 회장의 중앙일보 37주년 창간기념사 <전문>이다.

친애하는 중앙일보 임직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새해 벽두 신년사에서 올 한해가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엄혹한 경쟁과 도전이 우리 눈앞에 닥쳐 오리라”고 예측한 바 있습니다.

동업경쟁 신문사들이 지난해 세무조사의 시련을 겪고 난 후 더욱 강해진 체질로 신문경쟁에 전력을 투구하리라 예측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예측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신문은 올 봄부터 최신형 고가의 자전거를 판촉용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신문 한부에 자전거 한대라는 가위 전대미문의 판촉 경쟁이 지금 신문시장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또 어떤 신문은 올 여름 우리 신문의 간판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중앙 경제 섹션을 겨냥해 대량 증면을 단행한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편집국 기자들이 ‘경쟁자가 우리의 안방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뭉쳐 경쟁지보다 앞서 새로운 중앙경제를 선보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문경영이 이처럼 어려운 사면초가의 심각한 경쟁에 빠져있습니다. 몇달 안에 이런 경쟁이 끝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증면경쟁, 판촉경쟁이 또 어떤 방향으로 비화할지 아무도 모를 무한 경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중앙일보 임직원 여러분!

경쟁은 경쟁다워야 합니다. 시장경제 사회에서 언론도 경쟁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경쟁은 값어치 있는 경쟁, 아름다운 경쟁이어야 합니다.

무모한 증면전쟁, 상상할 수 없는 판촉경쟁의 늪에 빠지지 않고 우리의 길을 우리 스스로 개혁해 나갈 수 있어야 이런 무모한 신문경쟁은 사라질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신년사에서 1등신문이 아닌 일류신문을 주장했고 4차에 걸친 워크숍에서 일류신문을 만들기 위한 중앙인들의 발상의 전환을 거듭 역설했던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강조합니다.

자전거를 주고 판매에서 1등하는 그런 신문이라면 1등신문이 아니라고 봅니다. 내용 없는 증면으로 1등하는 그런 신문이 결코 1등신문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런 신문이 1등신문이라면 우리는 사양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신문은 그런 1등신문이 아니라 일류국가를 만들기 위해 중앙인들이 헌신하는 일류신문이어야 할 것입니다.

자유와 진실추구의 열정에 근거한 열린 보수언론, 경쟁과 다양성을 추구해 우리 사회의 다양한 존재 영역을 지키고 키워나가는 신문, 인류 공통의 가치추구에 게을리하지 않는 신문, 이런 신문이 일류 신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양비·양시론같은 정태적 비판기능에서 벗어나 보다 분명하고 과감하게 시비를 가리고 대안을 제시하는 신문, 이분법적 이데올로기와 지역주의에서 벗어나 큰틀의 좌와 우, 지역과 계층의 분열 및 갈등을 치유하고 통합해 공동체의 번영과 평화를 추구하는 언론이어야 할 것입니다.

세계성·시장성·개혁성을 바탕으로 시대의 흐름을 짚어내고 때맞춰 어젠다를 설정하고 제시하는 그런 언론이 바로 일류신문이라고 저는 규정하고 싶습니다.

친애하는 중앙일보 임직원 여러분!

저는 지난 6월 세계신문협회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세계 유수의 언론인·신문경영인들과 만나 언론에 대한 여러 의견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글로벌리즘과 로컬리즘간의 마찰과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우리 현실의 언론과 세계 일류지들의 수준간에는 너무나 큰 격차를 느낍니다. 우리 언론의 어쩔 수 없는 현실과 세계 일류언론의 앞서가는 이상을 바라보면서 그 격차를 어떻게 메워야 하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현실을 무시한 채 이상만을 좇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 현실을 인정하면서 끊임없는 개혁과 변화를 시도하는 노력이 일류지를 향한 우리의 부단한 자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편집의 외형상 많은 시도를 해왔고 국내언론이 그 뒤를 따라 온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는 형식이 아닌 내용의 변화를 우리가 주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평소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고 사회부의 모양을 바꿔보자 했으며 기사의 퓨전화를 강조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해외 특파원 숫자를 늘리고 카이로·런던·모스크바에 해외특파원을 신설 또는 재파견하자는 것도 신문의 질적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뜻에서였습니다.

양적인 경쟁 아닌 질적인 개혁과 변화를 우리가 선도할 때, 우리 언론도 무모한 양적 경쟁에서 선의의 질적 경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문의 질적 변화는 기자들 개개인의 전문성과 치열성에서 비롯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 전문성과 치열성이 완결될 때, 퀄리티 페이퍼가 태어나고 질 높은 일류신문이 자리잡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친애하는 중앙인 여러분!

저는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가 다른 어떤 언론기관보다 더 큰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는 부분이 우리의 인적 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40대 전후의 인적 구성이 막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지금 부장 또는 차장으로 편집·제작·광고·판매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들이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의 허리 부분에 속합니다. 튼튼하고 강한 허리를 지닌 신문이 우리 중앙입니다. 개혁과 변화, 신문의 질적 변화를 이들 부·차장 그룹이 주도해 나가야 합니다.

부장 중심의 신문제작, 판매·광고전략이 세워지고 강력히 추진돼야 할 것입니다. 편집국 부장은 신문의 꽃입니다. 부장의 머리에서 기획이 나오고 부장의 지시에 따라 기자들이 불철주야 뛰어야 합니다. 우리 기자들은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마는 악착스러움이랄까 강인력에선 경쟁지 기자와 다소 떨어진다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강한 부장 밑에 강한 기자가 태어납니다. 실력있는 부장 밑에서 실력있는 기자, 실력있는 사원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부장들이 힘을 내 일할 수 있도록 경영진에선 물심양면의 지원을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임직원 여러분!

중앙일보가 창간 37주년을 맞는 장년의 나이가 되었듯, 일류신문 중앙일보를 책임질 중추적 역할은 부·차장 그룹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폭넓고 깊이있는 신문, 프로들이 만드는 신문, 오피니언 리더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회자되는 신문, 전문성이 확보되고 사실에 기초한 튼튼한 취재력에 바탕을 둔 신문, 이런 신문을 만들어 봅시다.

다른 경쟁지들이 치졸한 판촉경쟁에 골몰하고 물량공세로 언론의 정도를 흐리는 과당경쟁에 빠져들고 있을 때, 우리가 의연히 이런 유혹을 물리치고 우뚝 서기 위해선 임직원 여러분들, 부·차장 여러분들의 헌신적 노력이 없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앞으로 1년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제 뭔가 올라갈 고개의 정상이 보이는듯 합니다.
이 고비, 이 고개를 넘어서면 우리도 세계에 일류신문의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중앙인 여러분! 다시 분발합시다. 다시 힘을 모읍시다. 감사합니다.

2002년 9월 19일
회장 홍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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